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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버스앤러버스 Jun 22. 2022

끝내주는 토론 러버

에디터 하레

  토론, 하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개인적으로는 학생 때 종종 봤던 <대학토론배틀>이나,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들 간 이루어지는 정책토론회 등이 생각난다. ‘말’을 무기로, 치열한 공격과 방어를 주고받는 과정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어쩐지 ‘토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정해져 있는 이미지가 있는 듯하다. 금방이라도 안경을 추켜올리며 내 말의 허점을 짚어내서 똑 부러지는 말투로 반박할 것 같은… 어떤 주제를 던져도 금세 주장과 근거를 정리해서 착착 말해줄 것 같은, 아무튼 그런 느낌 말이다.


  토론이 취향이라고 말하는 사람, 사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워서 모셔 보았다. 토론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다들 기피하는 토론 수업을 찾아 듣고, 토론 학회에 발들였다가 회장까지 하게 된 ‘끝내주는 토론 러버’이다. 스스로 토론을 좋아한다고 말하기까지, 토론 러버의 성장기가 궁금하다면 끝까지 읽어 주시길.






Q. 간단하게 인사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영란입니다. (하레: 정말 간단하네요!)



Q. 언제부터 토론을 좋아하셨나요? 혹시, 유치원생 때부터?

중학생 때 처음 접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토론이란 ‘공적인 자리에서 얼굴 붉히면서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토론대회는 무서워서 못 나가겠다면서 스피치나 연극, 글쓰기 대회 같은 것만 나갔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토론만 안 했다는 게 오히려 웃기긴 하네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계단참에 붙은 토론 동아리 모집 포스터에 꽂혀 홀린 것처럼 들어갔어요. 그때 처음으로 ‘의견을 모아 내 것으로 소화해서 말로 표현하는’ 과정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Q. 고등학교 때 토론의 매력을 처음 느꼈다니 약간 의외네요. 고등학생 시절의 토론은 어땠나요?

음, 이제 다들 학업에 바쁘다 보니 기대한 만큼 활동하지 못해서, 토론에 대한 갈증이 늘 있었어요. 소년만화에서 “나를 만족시킬 상대를 데려와!” 하는 것처럼, 해소되지 않는 느낌이요. 현장에서 직접 지적하고 설득하는 과정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다 보니, 설득은 논리로 밀어붙이는 것, 싸우는 것이라고도 생각했었어요. 


고3 때 전교회장/부회장 정책토론에서 공약을 검증하는 사람을 따로 두어서 진행했었는데, 그때 후보였던 친구의 공약을 갖고 엄청 꼽줬던 기억이 있어요. 음, 지금도 너무 미안한데, 전교생이 다 듣는 토론에서 공약 검증인보다 학교 정책을 잘 모르는 후보자들에게 고3 히스테리를 부린 거 같기도 해요… 돌아보면 효과적인 말하기 방식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못했던 거죠. 



Q. 대학에서의 토론은 조금 달라졌나요?

입학 전까지 대학이란 공간의 이미지는 다 같이 손 들고 질문하고, 다들 의견을 적극적으로 나눌 줄 알았어요. 물론 비대면 수업 여파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말을 안 하는 거예요! (대단히 분노했다) 토론 수업에서조차 의견 교환이 별로 없이 그냥 서로서로 묻어가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여전히 적극적인 토론과 배움에 대한 열망이 있었어요. 그렇게 대학 토론 학회에 들어가게 되었죠.



Q. 토론 학회를 통해 토론에 대한 열망이 해소되셨나요?

차고 넘칠 정도로 해소됐죠…  학회에 들어가면 처음 한 달 동안 일주일에 1번씩 토론을 해요. 다시 생각해도 토가 나오는 과정이네요. 


저는 뭔가 항상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아요. 중학생 때 강남역 살인사건이 터지면서 관련해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했었는데, 그때 처음 내 의견이 ‘사회 일반’으로 받아들여지는 의견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나에게는 상식처럼 당연한 것을 잘 설명하기만 하면 모두가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죠. 물론 지금은… 노코멘트입니다.



Q. 현재 몸담고 있는 토론 학회의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이다”라는 표어가 굉장히 인상 깊어요.

저에게도 그 표어가 굉장히 절실하게 다가왔어요.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내가 모르는 것이고, 내가 말할 수 있어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아무리 안다고 생각해도, 말해 보라고 하면 또 다르거든요. 말은 글보다 더 어렵잖아요. 글쓰기는 어느 정도 독자의 맥락 파악 능력을 믿고 던질 수 있고, 강조점을 주기도 더 쉽죠. 글은 텍스트 대 사람이지만, 말은 사람 대 사람이라 현장감이 있어요.


아, 물론 그 표어를 보고 들어왔긴 한데, 최근에는 또 다른 슬로건에 깊이 공감하고 있어요. 담당 교수님이 “좋은 사람이 말을 잘한다”를 제시하셨거든요. 처음 들었을 때는 이전 표어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곱씹을수록 그건 형식적 토론의 영역이고, 진정한 의미의 토론에 대해서는 “좋은 사람이 말을 잘한다”는 표어가 더 잘 들어맞는 것 같아요. 


Q. “좋은 사람이 말을 잘한다”라니, 조금 추상적인데요. 혹시 더 자세히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

많은 토론을 경험하면서, 토론 주제를 단순히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하는 것과 직접 뛰어들어 고민하고 답을 찾아 얘기하는 사람의 울림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느껴요. 회색 지대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어려운데, 이미 대척점에 있는 사람을 끌어오는 설득의 힘은 마법 같은 일이잖아요. 그런 힘을 가지려면 더더욱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 무엇인지 궁금한데요.

상상과 공감의 범위가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생>에서 “위치에 따라 책임의 강도도 달라진다”는 대사가 있었는데, 토론을 하면서 그걸 정말 많이 느껴요. 저는 한국인이고, 여성이고, 제주 출신 인서울 대학생이라는 틀에 갇혀 있었는데, 토론을 하면 지방대 학생, 성매매 여성, 외국인 노동자 등 다른 많은 사람의 입장에 이입하고 그들의 삶을 톺아봐야 해요. 세상의 문제들은 독립사건이 아니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잖아요. 내게 보이는 만큼 이상의 더 넓은 범위를 보려고 노력하고, 타인의 감정에 깊게 이입해서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 거죠. 



Q. 영란 씨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은 사회학적 상상력이 있는 사람이네요. 그럼 다시 조금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와 볼까요. 토론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할 때는 힘들어 죽겠는데 끝나고 나면 또 하고 싶다는 것…? 중독성이 강하죠. 토론이 아니었다면 가닿지 못했을 곳까지 생각이 가 닿는 것, 뇌를 빨래 짜듯 쥐어짜는 것을 토론을 통해 할 수 있어요. 실제로 토론 주제로 어려운 질문들을 많이 던지는데, 거기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찾았을 때, 논리의 정합성을 달성했을 때의 그 희열!



Q. 토론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있다는 거네요! 그간 다양한 토론 유형을 경험하셨을 텐데, 그중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유형이 있으신가요?

원래는 CEDA(세다) 토론을 좋아했어요. 입론과 교차조사가 치열하게 반복되기 때문에 논증을 엄청 세세하고 세밀하게 해야 해요. 질문을 하면 상대가 짧은 대답밖에 하지 못하는 구조여서 교차조사에서 상대의 논리를 무너뜨릴 때의 쾌감이 있어요. 생각 연습에도 도움이 되고요. 그런데 그만큼 즉흥성이 떨어지고 계속 하다 보면 시간 분량을 재는 데 너무 익숙해지기 때문에 오히려 지루하더라고요. 그래서 요새는 특정 이슈를 가지고 하는 자유토론이 훨씬 재밌습니다!



Q. 본인이 생각하는 토론 잘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나요? 또는 롤모델!

앞에서 말한 ‘좋은 사람’과 어느 정도 통하는 부분이 있는데, 어떤 주제든 본인도 잘 이입하고 남도 잘 이입하게 하는 사람이요. 롤모델은… 음, 더 나은 나? (웃음) 롤모델을 두고 사는 타입은 아니라서요. 



Q. 학회에서 활동하다 보면 평소 본인의 의견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토론을 할 때가 많을 텐데, 그럴 때는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기억에 남는 건 성매매 합법화를 찬성하는 입장에서 토론에 참여해야 했던 경험이 있네요. 개같이 멸망… 근거로 성 판매자 비범죄화를 준비했는데, 사실 어쩔 수 없이 영혼부터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토론이었죠… 상대측이 제시하는 의견에 ‘어 맞아ㅠㅠ’ 하면서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마음이 기억나요. 


그래도 그런 식으로 반대 입장에서 토론하다 보면, 관련된 사람의 입장에서 많이 생각하다 보니 백 퍼센트 이해하지는 못해도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에 대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게 돼요. 국민 정서에 의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반드시 합리적일 수만은 없다는 것도 알게 되고요. 억지로라도 시야를 넓히게 되는 거죠.



Q. 말싸움과 토론의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일반 말싸움은 상대방이 딱히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고, 각자 입장을 피력하는 데 더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 처음에 토론은 상대 간 말싸움이고, 상대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청중에 더 초점을 두게 되었어요. 토론 과정이 청중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대 주장에 대한 단순 공격보다 내 주장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청중에게 전달해서 전체 토론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결국 논제에 개입된 사람들, 듣는 사람들의 특성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야 해요.



Q. 상호 의견을 들을 의향이 있는지, 청중에게 전달될 것을 고려하는지가 토론과 말싸움의 차이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그럼 혹시 보통 토론에 승패가 있나요?

음, 학회에서는 승패를 정하지는 않고, 질문과 피드백 시간을 가져요. 근거로서의 사례가 변하면 논리도 흔들리지 않는지 비판도 하고, 공격이나 방어 패턴에 대한 세세한 피드백도 하고요. 말버릇이나 제스처, 감정이입의 정도까지도 이야기해요! 그래서 피드백 내용을 들어 보면 나름의 승패가 결정되기도 하죠. ^^



Q. 토론하기에 이 주제는 조금 힘들었다, 하는 것이 있으신가요?

힘들었다기보다는, 토론의 영역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주제들이 있긴 해요. 예를 들면 노키즈존! 토론은 찬반의 입장이 명확히 갈려서 논의를 양분해서 진행하는 과정인데, 이 과정 자체가 사회에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면 토론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 주장 자체도 반박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죠. 하하… 



Q. 토론 학회에서 웃기거나 재미있었던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학회 세션을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주제로 토론했던 게 생각나네요. ‘전 국민 1일 3회 양치질 법제화; 같은 주제로, 찬성하는 한 명이 나머지에게 다굴 당하는 1대다 토론 방식으로 했었어요. 기본적으로 토론을 즐기는 사람들이라 말을 잘하다 보니, 핀트가 나간 주장도 그럴싸하게 한다는 게 가장 웃긴 부분이죠. 예를 들면 양치 법제화를 어떻게 확인할 것이냐는 주장에 화장실 출입으로 양치 패스를 도입하자거나, 충치 검사를 받아오면 이틀 봐주냐는 등 재밌는 헛소리들이 난무해요.



Q. <대학토론배틀>이 아직도 있다면 나갈 의향이 있으신가요?

완전요! 학회에서 사실 적시 명예훼손에 대한 토론을 하고 나서, 토론 붐이 일었던 2013년에서 2017년 사이의 <대학토론배틀>, <토론대첩> 등 토론 프로그램들을 열심히 챙겨봤어요. 학회 선배가 나갔었거든요.



Q. 토론 학회 밖, 일상에서 토론의 욕구를 느꼈던 순간이 있었나요?

최근에는 깻잎 논쟁… 주변에서 ‘아버지가 어머니 친구 깻잎을 떼 주는 걸 상상해 보라’는 강경파의 입장도 있었고, ‘깻잎을 떼 주는 게 호감 표시면 다른 건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등 극단적인 의견들이 많았어요.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말장난을 잘 치면 그런 것도 재밌죠.



Q. 이건 다른 에디터들이 매우 궁금해하던 질문인데, MBTI가 T이신가요?

앗, 그렇습니다. 당연히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T입니다… 저번에 토론 학회의 전 회장 부회장과 현 회장 부회장 네 명이 만났는데, 넷 다 TJ에 앞이 하나씩 다 달라서 신기했어요.



Q. 마지막으로 저희 잡지의 공통 질문입니다. 손민수하고 싶은 취향이나 사람이 있나요?

교수님들의 뇌를 손민수하고 싶습니다. 본인의 지식을 말에 잘 녹여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요. 그만큼 고민하고 생각했다는 것이 티가 나는 사람이요. 그 외에는 제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향수인 우드 세이지 앤 시솔트… 음, 전반적으로 날로 먹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네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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