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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사 Nov 18. 2024

때론 육아에도 엄격함이 필요하다

너무 수용적이었던 엄마

아이를 낳기 전까지만 해도 나의 육아 모토는 “강한 아이로 키우자“였다. 아들이라는 성별 때문에도 그랬지만, 나 역시 강인한 성격 덕에 삶의 여러 힘든 구간들을 잘 헤쳐나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아이들을 너무 수용적으로 키워버린 것 같다. 둘째의 경우는 갓난아기 때부터 워낙 유난스러웠기에 시시때때로 훈육이 가해지긴 했다. 그런데 나름 순했던 첫째에게 나는 너무 관대하고 나이브한 엄마였다. 때론 아빠가 조금 엄격한 모습들을 보였기에 나는 그와 반대로 아이들에게 더없이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엄마 역할을 자처했다.


천성 탓도 있다. 남에게 화를 잘 내지 않는. 아니, 화가 잘 나지 않는 성향이다. 아이가 무언가 짜증을 내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겠지 했다. 무언가를 먹기 싫어하면 굳이 어거지로 먹이지 않았다. 아이들과 한바탕 소란을 피우기보다는 내가 수용하고 인내하는 법을 택했다. 사실 지금도 아이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은 가능하면 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아이들이 너무 평온하게만 크는 것도 문제라는

것을 요즘 서서히 깨닫고 있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론 내가 하기 싫은 일도 꾹 참고 해야 하는 것이 실제 세상의 법칙이다. 가정에서 너무 수용만 해주면 그런 맷집이 생기지 않는다. 아이에게도 적절한 시련이 필요하다.


‘엄부자모’라 하지만 아빠는 저녁에만 잠깐 보기 때문에 엄하게 하기가 더 힘들다. 사랑만 주어도 모자란 느낌이기 때문이다. 아이들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는 엄마가 아무래도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요샌 보육기관에서도 잘 혼내지 않는다. 잘못하면 아동학대로 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지나치게 근자감이 커진다고 본다. 물론 아이 하나하나가 다들 소중하고 중요한 인격체이지. 그렇지만 너네가 소중한 만큼 너네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도 소중하다. 그걸 먼저 알아야 한다. 하지만 너무 사랑만 받고 크게 되면 그 배려심이 생기기 쉽지 않다.


엄마도 때에 따라 너네를 혼낼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본다. 그러니까 너네가 엄마를 배려하지 않고 매너 없는 행동을 해서 엄마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거나 불편함을 야기했다면 엄마도 너네를 맘에 안 들어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엄마도 소중한 사람이고 따라서 함부로 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옳지 않은 비매너 행동은 고쳐야 한다.


나의 부모님은 굳이 따져보자면 자애롭기보단 엄격한 부모에 속했다. 자식이 많다 보니 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선지 자식들 모두 어디서 싸가지 없다거나 경우 없다는 말을 듣고 자라진 않았다. ((그런데 솔직히 어렸을 때엔 나도 무조건적인 수용과 사랑을 바라긴 했다. 이 바람이 어쩌면 나의 아이들에게 지나친 수용의 양육 형태로 발현된 것인지도…)


밝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예쁘다. 그렇지만 버릇없고, 이기적인 면모도 함께 있다면 그건 아웃이다. 내가 내 자식을 자식으로서 보는 것이 아닌, 제삼자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눈살을 찌푸리는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고쳐야 할 것이다. 왜? 결국 아이들의 더 나은 미래를 영위하기에 필요하니까.


그렇게 온화한 엄마는 카리스마 있는 엄마가 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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