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허허허. 이래서 글쓰기는 지고의 행복이다.
<작가의 말>
‘작가의 말’이라니. 참 민망한 말이다. 하지만 가장 쓰고 싶었던 글이기도 하다.
소설을 쓰며 나의 삶과 감정들이 승화 되는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소설 쓰기는 내가 느낄 수 있는 지고의 행복이라 여겼다. 이 행복이 무르익었다고 느낄 때 즈음, 나름 호흡이 긴 소설을 쓰고 싶어서 이번 소설을 쓰게 되었다.
완성을 하고 나니 세상 행복했다. '나'라는 존재를 요리조리 잧도 모아 세상에 출가시킨 기분이었고, 내가 느끼던 고통과 번민들도 함께 출가시킨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불행도 따라왔다. 문학상과 신춘문예에 낙방하면서 내가 재능이 없다는 슬픔이 그 불행들이었다. 물론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면 나아질 거다. 다만 나는 직장이 있고, 직장이 나의 삶을 지켜주기에, 노력을 해야 한다는 자명한 진리는 직장이 주는 피로와 나태함이 해치워버렸다. 하지만 인쇄된 나의 책을 가지고 싶다는 번민은 여던히 사라지지 않았다. 노력은 하기 싫은데 성과는 가지고 싶은 참 못난 자기 자신을 느낀 거다. 오호 통재라.
아!
그때 한 가지 진리에 닿았다. 내가 하는 이 고통 자가발전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를 말이다.
내가 행복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걸 또 열심히 망치고 있었던 거다. 그냥 읽고, 쓰고, 걷고. 그러다 고치러 뛰어가고. 그게 행복했다. '나'라는 총체를 승화시킨다는 그 일련의 행위가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나의 이런 잡념들이 나의 첫 소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속 주인공 ‘강동노’와 똑같은 행보라는 것도 새삼 자각했다. 그렇게 나는 작가, 작 중 주인공, 글을 쓰고난 이후 일상의 ‘나’까지 모두 같은 존재였다. 나는 바보처럼 이걸 또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브런치에 올리는 걸로 타협했다. 누군가는 읽어주겠지. 물론 블로그나 다른 SNS들처럼 홍보나 알고리즘을 위해 후두두 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한 명이라도 읽겠지. 그거면 된 거지. 지금 쓰고 있는 나의 ‘작가 후기’도 마찬가지겠지.
그렇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를 보낸다.
그렇게 ‘강동노’를 보낸다.
그렇게 ‘나’를 보낸다.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글을 읽고, 당신의 글을 쓰는 당신에게도 말을 건네본다.
“행복했다면, 그거면 된 거라 생각해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어 고마워요. 앞으로도 더 많이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고마워요. 또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