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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28(완)-

28화. '나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by 동노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28화(완). '나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7부.


28(완).


평범한 나날들이 지나갔다. 오늘들을 안녕히 맞이하고. 또 안녕히 보내고. 나도 안녕히 지냈다. 행정고시는 어려울 것 같아 공인노무사 준비용 책들을 샀는데. 어려워서 다시 중고 책방에 팔았다. 금전적 손해가 막심하다. 돈 아껴서 임플란트나 할 걸. 대신 글쓰기 관련 책을 샀다.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고 있다. 언젠가는 글을 써야겠다. 죽여주는 정치극을 그리고 싶다. 정치인 관련한 글을 쓰려는 걸 보면, 난 여전히 힘을 가지고 싶나 보다.


"팀장 나와! 일을 뭐 이따구로 해!"


민원대에서 싸움이 났다. 언제나 그랬듯 팀장님은 도망갔고, 오늘 민원상담 담당인 수진이는 양손 엄지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며 화를 참고 있다. 민원대 건너편을 살펴본다. 말 많은 할아버지나 이대윤 아저씨는 아니다. 격노를 분출하고 있던 민원인은 초면인 사람이었다. 민원대 넘어 민원인의 목소리가 점점 더 카랑카랑 해진다.


"아니. 우리 옆집 노인네가 며칠째 안 보인다니까. 그럼 공무원이 와서 안부도 확인하고, 돌봐주고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선생님. 우선 진정하시고."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내가 낸 세금으로 먹고 사는 공무원들이 말이야!"

민원인을 진정시켜 볼 요량으로 민원대로 향한다. 무엇보다 험상궂게 생긴 남자 직원이 오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기도 하는 게 골 때리는 현실이기도 하니까.

"안녕하세요. 선임 주무관인 강동노입니다. 우선, 전 국민의 40%는 사실상 간접세를 제외한 세금을 사실상 내지 않는..."

"너 지금 뭐라 그랬어? 내가 돈 없다고 무시하는 거야?"


말실수를 한 것 같다. 역시 주둥이는 죄를 짓는 구멍, 작죄구다.


"에이. 선생님! 이건 웃자고 한 말이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시끄러! 이게 웃겨? 이거 아주 웃기는 새끼네. 여기 사장 나오라 그래!"


주민센터에서 사장은 누굴까. 모르겠다. 있지 않은 걸 찾아다 줄 수는 없다. 도망이나 가야지. 수진이에게 윙크를 갈기고 빠르게 주민센터에서 도망 나온다. 팀장님이 이래서 악성 민원인이 오면 항상 도망을 쳤구나. 역시 사람은 자기가 당해보면 모든 걸 알게 된다. 이제 어디서 시간을 낭비 해볼까. 일단 시간이나 보낼 겸, 익숙한 길을 걸어볼까. 그러면 아마도 주민센터에서 나와, 골목을 지나, 공원을 끼고 끝까지 걸어가다가, 편의점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끝까지 걸어간다는 마음가짐으로 걸어가다가, 간판에 '콤푸타 세탁'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세탁소 입구에서 몸을 45도 방면으로 왼쪽으로 틀어서, 그렇게 또 걸어가야겠지. 그렇게 가다 보면 과거 시장이 존재했던 티가 나는 골목이 보이겠지. 이제는 재개발의 여파로 손님이 줄어든 것을 넘어. 장사를 하는 매장도 거의 없는, 저물어 가는 시장통에 이대윤 아저씨가. 사람 관찰하기를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그 옆에는 강병동 대포동 미사일 박 여사가 있다. 그런 사람이 그곳에 있겠지. 강남구 신사동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행운병원에도, 119에도, 택시에도, 강남역 편의점에도 있겠지.


만약 심심해서 이대윤 아저씨한테 말이나 붙이려 하면. 그럼 사람 관찰하기를 좋아하는 아저씨가 참견할 테고. 박 여사는 화를 내며 입으로 대포동 미사일을 쏘겠지. 그러다가 누구 하나 화가 나서 쓰러지면 꼭 '욧'을 문장 마지막에 뱉어내는 119 구급대원이 그를 데려갈 거고, 그러고 나면 행운병원에서 사람 좋은 간호사와 의사가 치료를 해주지 않을까. 그리고 퇴원할 때는 성실한 원무과 직원이 병원비 계산을 해주겠지. 퇴원하고 나오면 이 박사가 도와주겠지. 그렇게 다들 또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에구머니나 추워라. 휘적휘적 다시 주민센터로 돌아온다. 수진이한테 미안해서 믹스 커피를 타준다. 수진이는 나를 노려보며 비싼 스타벅스 커피로 바꿔오라고 한다. 내가 민원을 키운 걸 생각한다면, 이 정도 수진이 부탁이야 쉬운 부탁이다. 다만 바로 사다주는 건 선배로서의 자존심이 상하기에 조금 더 놀 계획이다. 그렇게 주민센터 건물 뒤로 간 뒤 벽에 등을 기댄다.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문다. 불을 붙이고. 천천히 빨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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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어지럽다. 담배 맛도 이상하다. 이제 담배를 끊을 때가 온 모양이다. 어금니는 여전히 아프다. 지난 며칠 고생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이를 꽉 깨물었더니 치통이 심해진 모양이다. 아니면 그냥 늙었던가. 추위가 좀 가실까 싶어서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얼마 전에 산 로또 용지가 있었다. 당첨되면 누구 하나 뺨이나 올려붙이고 그만두려 했는데 이제야 꿈이 이루어지려나. 휴대전화로 당첨 번호를 확인한다. 역시나 꽝이다. 집에 갈 때 한 장 더 사볼까. 꽝이라고 해도 한 주 정도 '당첨되면 뭐 해야지.'라는 행복한 망상을 할 수 있으니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 뭘 또 살아가는 데 망상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로또 살 돈 아껴서 월세나 내야겠다.


이제는 원룸이 아니라 조금 큰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상대가 누구든, 모양이 어떻든 사랑도 다시 하고 싶다. 그리고 그냥 또 잘 살아가고 싶다. 그럴 수 있을까. 더 큰 집에 가려면 돈도 많이 필요하고, 결혼도 하려면 외모도 더 가꿔야 할 텐데. 둘 다 자신이 없다. 난 박봉의 공무원이고 호랑이상이지만. 못생긴. 말 그대로 그냥 평범한 사람이니까.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시선 끝에 공사 중인 아파트가 보인다. 몇 달 전만 해도 아파트 터만 파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서나 눈에 보일 만큼 층수가 많이 올라갔다. 고개를 돌려보니 주변도 다 아파트다. 참 열심히들 짓는다. 기분이 좋다. 세상천지에 집이 이렇게나 많은데, 나 하나 살 집이 없을까. 사거리만 나가도 사람이 저렇게 차고 넘치는데, 나랑 사랑할 사람 하나 없을까. 날이 이렇게 좋은데, 내 삶이 나빠 봐야 얼마나 나쁘겠나. 피던 담배를 털어낸다. 역시나 담배는 끊어야겠다. 담배곽을 통째로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 조금 더 농땡이를 피울 겸 벽에 기대 쪼그려 앉는다. 이계성 할머니 딸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계성 할머니의 공책은 읽었을까. 이계성 할머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신사동 가족들과 이야기는 해봤을까. 잘 모르겠다. 다들 어떻게든 잘 살아가겠지.


조용해진다. 이계성 할머니는 어쩌다 그렇게 됐으려나.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겠지. 다들 그렇게 살아가겠지. 그나저나 나는 또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다행히도 이제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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