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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27-

27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by 동노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27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7부.


27.


집으로 돌아와 낮잠을 퍼질러 잔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일어나 샤워를 한다. 면도를 하고 머리를 말린다. 몸에 물기를 닦아내고 방으로 돌아와 왁스를 바른다. 그리고 제법 번듯한 양복을 입고 집을 나선다. 현재 시간은 오후 5시 49분. 오늘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일몰의 빛을 따라가고 싶어서 해가 넘어가고 있는 저 서쪽의 빛을 따라 걷는다. 마지막 해의 끄트머리가 정말 '뿅!'하고 넘어간다. 안녕! 안녕.


목적지는 이계성 할머니 장례식장이다. 걷는 거라면 이골이 날 법도 하지만 일단 걷는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다리가 아파서 실패. 택시를 탄다. 택시 기사님께 공영 장례식장으로 가달라고 부탁한다. 은평구 신사동에 내리지 않기 위해 주소도 자세히 불러드린다. 출발. 그리고 도착. 택시 요금은 카드로 샤악. 공영 장례식장은 단출했다. 이계성 할머니의 빈소인 2호실이 정면에 보인다. 호흡을 가다듬고, 2호실로 향한다.


입구와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는 강병동의 대포동 미사일 박 여사님과 사람 관찰 하기를 좋아하는 할아버지 내외가 이미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이대윤 아저씨가 몸에 안 맞는 큰 양복을 입고 짐짓 근엄하게 앉아 있다. 이대윤 아저씨 건너편에는 인상 좋은 할머니가 앉아 있지만 누구인지 모르겠다. 다만 여기 빈소 테이블마다 순대가 가득 놓여 있는 걸 보니. 시장에서 순대를 파는 할머니라 추측 해본다. 그 옆에서 왜소한 남자가 쪼그려 앉아 순대 한 알을 낼름 집어 먹는다. 이 사람은 누군가 싶어 은근슬쩍 테이블 가까이 다가간다. 이 박사였다. 혹시 몰라 문자를 보냈는데, 진짜 왔네. 그게 아니라면 이대윤 아저씨에게 동행 서비스 제공차 온 걸까. 뭐든 어떤가. 웰컴 웰컴. 이 박사는 나에게 윙크를 날렸다.


"자네. 이번에는 해냈네?"

"그러게요. 덕분에 이번에는 운이 좋았네요."


이 박사는 나를 보더니 씨익 웃고는 또 한 알의 순대를 집어 먹었다. 많이 드시면 통풍 걸릴 텐데. 뭐 알아서 건강하시겠지. 박사까지 하신 분이라면.


강병1동 동네 사람들 옆 테이블에는 병원 사람들이 있었다. 친절하던 원무과 직원과 딱딱하지만 진지했던 간호사. 그리고 사람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던 의사도 있다. 신기한 건 어떻게 인연이 됐는지 '욧' 119 대원도 병원 사람들 테이블에 합석 중이다. 다들 서로 친하지는 않은지 서로 쭈뼛쭈뼛 안부 인만 반복하고 있다. 배웠다는 사람들은 예의를 지킨답시고 서로 친근하게 대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 알 바는 아니다. 알아서 잘 지내겠지 뭐.


건너 테이블에는 신사동 집 식구들이 있었다. 예의가 바른 202호 할아버지는 잘 다린 와이셔츠를 입고 앉아 계셨고, 말이 어눌한 101호 아저씨는 불편한 다리 때문인지 한쪽 다리를 편 채로 앉아 있다. 3단봉의 명수 201호 아줌마는 3단봉 대신 과도를 들고 과일을 깎아 102호 아주머니의 딸인 성경이 입에 넣어주고 있었다. 102호 아주머니는 상주처럼 테이블을 오가며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연신 인사를 건넨다. 이제 한 팀 더 올 때가 됐는데...


"어! 강 주임이 먼저 왔네?"

"동노 오빠. 아니 강 주임은 더 일찍 왔어야죠. 팀장님."

"수진 주임. 퇴근하고 사석이니까, 내 앞에서도 동노 오빠라고 불러도 괜찮아. 둘이 대학교 선후배 사이인 건 나도 아니까."

"아녜요. 자꾸 오빠라고 해주니까. 지가 친오빠인 줄 알고 자기 멋대로 해서. 앞으로는 강동노 주무관님이라고 딱딱하게 부르려고요."


수진이와 팀장님은 나를 지나쳐 빈 테이블에 앉는다. 팀장님은 고맙다는 듯이 내 팔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오빠. 이 사람들 다 누구야? 나도 받아서 오기는 했는데."

"그냥. 생각나는 사람들한테는 다 문자 보냈어. 병원 사람들한테는 원무과에 전화했고. 동네 사람들은 박 여사님한테 보냈고."

"꽤 많이 왔네. 이계성 할머니라길래 아무도 없을 것 같아서 왔는데."

"다들 비슷한 마음이겠지. 일단 앉아. 순대랑 사과 먹어.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따로는 다 맛있어."


수진이와 팀장님이 착석했다. 곧바로 테이블끼리 인사를 나눈다. 과일과 순대가 오고 간다. 병원 팀은 자기들은 빈손이어서 죄송하다고 한다. 그리고 다들 괜찮다고 한다. 모두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심야가 되자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 상주 역할을 하던 102호 아주머니에게 내가 있을 테니 집에 들어가시라고 했다. 102호 아주머니는 연신 괜찮다며 자기가 있겠다고 했지만, 102호 아주머니에게 아직 한 사람이 이곳에 와야만 하기에 내가 자리를 지키겠노라 말했다. 102호 아주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102호 아주머니는 나에게 고맙고 또 고맙다며 말하며 나를 안아주고는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나는 지금 덩그러니 빈소에 앉아 있다. 혼자 남아 앉아 있는 장례식장의 기분은 참 묘하다. 피곤하기도 하고. 조용하기도 하고. 즐거워할 거리를 찾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괜히 침잠되는 기분도 든다. 시계를 본다. 새벽 3시 13분. 다른 일을 하기에는 늦은 시간이다. 애매한 시간은 언제나 잊고 살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해준다. 나는 잘살고 있는 걸까. 마른 세수를 해본다. 손바닥은 따뜻했다. 다행히 감각이 생생하다.


"실례하겠습니다."

"누구..?"

"그... 이계성 씨. 그러니까... 딸. 김지연입니다.


이계성 할머니의 딸인 지연 씨였다. 장례 문자를 보내기는 했지만. 막상 진짜로 오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연락드렸던. 강병1동 공무원 강동노입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오는 게 맞으니까요."

"그쵸. 그런... 사이시니까요. 아! 이계성 할머니 관련해서 따님께 전달해 드릴 게 있어요. 무조건 받아주셔야 해요. 이거 하나 때문에 제가 개고생을 했거든요."


가방에서 공책을 꺼낸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이계성 할머니의 딸에게 공책을 건넨다.


"어쩌면 아실 수도 있는데. 이계성 할머님이 이 공책을 꼭 따님에게 전달해 달라고 하셔서. 받아주세요."

"이 공책... 알죠..."

김지연 씨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오래 침묵을 지켰다.

"엄마는 매번 볼 때마다 저한테 같이 살자고 했었어요. 참 좋았죠. 언젠가는 같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 하기도 했고요. 근데 엄마는... 갑자기 사라졌어요."


김지연 씨는 이계성 할머니를 '이계성 씨'라고 부르지 않고, '엄마'라고 불렀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던 걸까. 그렇다면 내가 아는 이계성 할머니의 이야기를 모두 말해야 할까. 이것도 잘 모르겠다. 일단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엄마랑 제가 사연이 좀 있어요. 여러 이유로 엄마랑 헤어지게 됐는데. 엄마를 찾지 못했어요. 다 핑계겠지만, 무서웠어요. 진짜 엄마가 나를 버린 거면 어떻게 하나 싶더라고요. 그리고... 말씀 못 드릴 이유가 있기는 한데, 제가 엄마를 찾으면 엄마가 다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이계성 할머니, 그러니까 어머님도 이유가 있으셨을 거예요."


김지연 씨는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할머니는 엄마가 날 버렸다고 했어요. 그래서 엄마가 우리 집에서도 나간 거고. 자기가 보고 싶을 때만 나를 찾다가 문제가 생기니까 무책임하게 도망간 거라고. 이제는 엄마를 놓아주라고 하셨었죠. 할머니는 저에게 네 엄마가 너를 안 보고 사는 게 마음 편할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모든 게 다 엉망이었어요. 저도...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달리 말씀을 드릴 수가 없네요. 얼마나 힘드셨을지 유감입니다."

"아니에요. 공무원분이 무슨 잘못이 있으시겠어요. 모든 게 다 엉망이네요. 아. 제가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제가 답변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뭐든 대답해 드릴게요."

"이계성 씨는, 그러니까 엄마는 어떤... 사람이셨나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저도 사적으로 친했던 관계는 아니어서. 음. 아마. 제가 아는 이계성 할머니는. 좀 '그런' 분이셨어요."

"네?"

"좀 '그런' 분이었다는 말이 제일 정직한 대답일 것 같아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씀 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자녀분도 여기까지 오셨으면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실 테니까요. 장례 절차는 내일 오전 10시에 여기 담당자분이 알아서 하실 테니. 두 분이서 같이 시간 보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요."

"아!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그... 이계성 할머니. 그러니까 김지연 씨의 어머님."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셨을 거예요. 너무 미워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진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계성 할머니의 따님은 내가 준 공책을 품에 계속 안고 있었다.


터덜터덜 장례식장 건물에서 나온다. 몸이든 마음이든 그럭저럭 모든 게 다 제법 괜찮다. 끊어져 있던 이계성이라는 이야기를 얼기설기 이어 붙여, 이계성 할머니의 딸에게 데려다준 까닭이겠지. 그리고 강동노라는 사람에게도 강동노를 데려다준 까닭이겠지. 몸을 돌려 장례식장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장례식장 앞에서 택시를 잡고, 내 집 주소를 정확히 말한다. 신사동들에 또 갈 수 없다. 이번에는 제대로 가야 할 곳에 가야지. 택시 창밖의 새벽은 무겁다. 집 근처 사거리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렸고. 집에 도착했고. 머리를 감았고. 바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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