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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26-

26화. '쪽지'

by 동노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26화. '쪽지'


6부.


26.


주민센터로 돌아온다. 역시나 주민센터는 민원인들과 전화로 북새통이다. 모르긴 몰라도 베트남전 이후에 한국 사회에서 가장 치열한 곳은 주민센터일 거다. 팀장님에게 복귀 보고를 하기 위해 다가간다.


"팀장님. 다녀왔습니다."

"어. 강 주임 고생했어."

"이계성 할머니 건은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례도 내일이면 끝이고. 유가족도 최종적으로 인수 거부한 게 맞고. 집 처리도 집주인이랑 복지정책과 연결해서 해결했습니다."

"고생했어. 그리고 고마워. 강 주임."

"네?"

"고맙다고. 강 주임 잠깐 이리로 와봐."


팀장님의 책상 위에는 매년 구청에서 주는 업무용 수첩이 있었고. 책상 위 업무용 수첩에는 2001년이라는 먼 과거의 숫자가 각인 되어 있었다.


"강 주임. 내가 예전에 여기 강병1동 주민센... 아니 동사무소에 일했을 때, 내가 이계성 그 아줌마를 상담한 적이 있어. 그때 내가 이계성 할머니 상담기록을 썼는데, 그 업무수첩이 집에 있더라고. 어... 그... 강 주임 줄게. 강 주임도 이번 일 상담기록에 넣어야 하잖아. 이거 참고해. 그리고. 음... 아니야. 가 봐. 고생했어."


팀장님의 업무수첩을 받아 들고 자리에 돌아와 앉는다. 팀장님의 2001년 업무수첩에는 뜬금없이 새로 붙인 걸로 보이는 빳빳한 포스트잇이 있었다. 포스트잇을 붙인 부분을 열어보았다. 해당 장에는 팀장님이 오래전에 쓴 상담기록이 있었다. 상담기록은 이계성 할머니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 민원인 요청에 따른 가정방문(2001.07.14.)

- 대상자 이계성은 소득재산기준을 초과하여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이 부적합 처리 됨. 구체적으로 대상자는 소득재산 조사에서 기초생활수급 적합 기준을 훨씬 초과한 금융 재산과 주택이 확인 됨. 다만 대상자는 이건 나중에 자기가 죽으면 자식에게 주어야 하는 돈임을 강조하며, 당장 자신이 쓸 수 있는 돈이 없음을 주장함. 이에 대상자에게 부적합 사유를 반복하여 설명하였으나 대상자는 이를 수용치 않음. 또한 자신이 실제 생활은 매우 가난하다는 걸 직원이 직접 집에 와서 확인해야 함을 강하게 주장. 이에 대상자가 요청한 가정방문을 실시.

- 대상자의 주거지에는 다량의 약봉지가 발견됨. 대상자에게 이를 물어 보자 대상자는 혼자 사는 여자가 약해 보이면 무시당한다며 자신의 병명을 밝히는 것을 거부함. 다만 자신의 병이 중증이라는 사실은 언급. 이에 추가적으로 몇 가지를 물어보았으나, 정확한 답변을 하지 않음. 이에 대상자는 본인이 큰 병원에 가서 확인했으며 해당 질환 이외에도 점점 기억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음을 주장하며 시간이 없다는 문장을 반복. 이에 관한 사실 여부는 확인 불가.

- 부양의무자 관련 상담 진행 중, 대상자는 자녀를 자신이 손수 키우지 못했기에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는 발언을 반복. 이에 대상자의 부양의무자 관계에 의문이 들어 추가 질문을 함. 이에 대상자는 현재 본인의 남편이 죽었는지, 살아있는지를 모름을 주장함. 이는 혼인관계증명서에 혼인 기록이 없어 당상 사실확인은 불가함.

- 또한 대상자는 본인 자녀의 결혼 여부 역시 모름을 주장. 다만 대상자는 자신과 자녀의 사이가 돈독함을 반복하여 언급함. 대상자에게 자녀와 자주 왕래하며 사이가 좋은 점을 지적하여 자식들과 함께 사는 것을 권유하였으나 대상자는 이에 대해 크게 화를 냄. 화를 내는 이유를 밝히지는 않음.

- 대상자가 직접 자녀에게 어려운 상황을 말하는 걸 어려워하는 것으로 판단. 이에 대상자에게 공무원이 직접 자녀에게 연락을 해보겠다고 권유했으나. 대상자는 이에 격렬히 반대함(폭행 당할 뻔. 주의 요망!). 또한 대상자 이계성은 자녀에게 연락이 간다면 시청에 불을 지르겠다며 격노함. 대상자를 진정시키고자 부양의무자와의 관계가 사실상 단절이 되었다면 자녀들의 소득재산을 보지 않고 대상자의 소득재산만을 심사함을 안내함. 이에 대상자는 침묵으로 일관함




업무수첩 다음 장을 넘겼다. 첫 가정방문 이후 추가적으로 진행한 상담기록이 있었다.




* 2001.8.1. 가정방문 대상자 이계성의 동사무소 내방

- 대상자 이계성은 동사무소에 찾아와 무작정 자신을 상담한 직원을 찾음. 가정방문을 실시했던 본인이 이를 응대함. 대상자 이계성은 담당자의 주머니에 무작정 쪽지를 넣고 동사무소를 나감. 공무원은 뒷돈을 받을 수 없음을 안내하며 따라갔지만 대상자는 무시하고 천호 방면으로 사라짐.

- 쪽지를 확인 한 결과. 대상자의 어려운 상황은 실제로 사실인 것으로 판단됨.

- 다만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음. 방법이...없음... 방법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팀장님이 이계성 할머니 관련된 일을 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게다가 지금과 달리 팀장님은 꽤 열심히 이계성 할머니 업무에 임했으리라 판단된다. 팀장님은 이 사실을 왜 우리에게 말 하지 않았을까. 잠시 질문을 접어두고 팀장님의 업무수첩을 다시 읽는다. 이계성 할머니의 상담기록 마지막 장에는 2001.8.1. 상담기록에 나온, 이계성 할머니가 팀장님에게 무작정 준 준 쪽지가 붙어있었다.




'미안합니다. 결혼을 했지만 소박을 맞았습니다. 화는 나지만 이제 원망은 없습니다. 우리 딸 지연이랑 얼굴도 보고, 연락도 하고 지냈는데. 시댁에서 한 번만 더 나타나면 지연이를 평생 없는 자식 취급할 거라고 해서 지연이한테 연락도 못하고 이곳으로 도망 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유가 있어서 저는 여기 동궁동에 살아야만 합니다. 가지고 있는 신사동 집도 사연이 있어 제가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또 이유가 있어서 월세도 사실상 받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돈이 힘이라고, 악착같이 일했는데. 병원에서는 내가 몸이 많이 아프답디다. 그리고 점점 더 안 좋아진다고 합니다. 오래 살고 싶습니다. 돈은 있는데 쓸 수는 없습니다. 우리 지연이 엄마 없이 자라게 했습니다. 그게 미안해서 제가 모은 돈이라도 주고 싶습니다. 신사동에 집도 있지만, 팔 수는 없습니다. 그래야 좋은 사람들이 안 다칩니다.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말이 안 된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근데. 근데... 제가 진짜로 생활이 어렵습니다.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




팀장님의 업무수첩을 덮는다. 이계성이라는 사람은. 설명하기 어렵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더 자세히 표현 하고 싶지만. 어떻게 더 담아볼 언어가 없다. 차분해진다. 담배라도 피울까. 근데 담배가 끌리지 않는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역시나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나지 않았다. 복지정책과에 전화를 건다.


"안녕하세요. 오전에 연락드렸던 강병1동 강동노입니다. 이계성 할머니 집 사진이랑 집주인 동의서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그리고 공영 장례 담당자분 한 번만 더 연결 부탁드릴게요."

"네. 집 사진이랑 동의서는 제가 검토하고. 문제 있으면 연락드릴게요. 그럼, 공영 장례 담당자 연결해 드릴게요."

전화 연결음이 들린다. 어쩐 일인지 그 연결음이 신난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오전에 연락드렸던 이계성 할머니 담당입니다. 공영 장례식장 주소랑 빈소 호실 번호만 저한테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담당 공무원이라고 해서 거기 가시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의무사항도 아니라서."

"말씀 감사해요. 다만 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요."

"가신다면야 뭐 상관은 없는데. 그러면 제가 메일로 내역 보내드릴게요."


담당자는 메일로 이계성 할머니 공영 장례식장의 주소와 호실을 전달해 주었다. 주소를 검색을 해보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다. 문자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업무용 프로그램을 켠다. 이계성 할머니의 장례를 알리는 문자를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보낸 뒤,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님 자리로 간다.


"팀장님."

"왜?"

"저. 오늘 오후 반차랑, 내일 연차 좀 쓰겠습니다."

"그래."

"이유는 안 물어보세요?"

"다 이유가 있겠지. 갑자기 쓰는 거 보면, 이유를 물어보지 않는 게 도리잖아. 푹 쉬고 와."

"감사합니다."


내 자리로 돌아와 수진이의 어깨를 톡톡 친다.


"말로 하지 왜 사람을 때려?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 한번 당할래? 나랏밥을 다른 방식으로 먹고 싶어진 거야?"

"수진아. 나의 후배 수진아."

"또 시작이네."

"나 오늘 오후 반차 쓰고. 내일 연차 쓴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알았어."

"이제는 화도 안 내는구나. 이유는 안 물어봐?"

"오빠 쉴 때 됐어. 푹 쉬어. 꼭."

"짜식. 나 퇴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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