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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25-

25화. 동궁동(東宮洞)이었다.

by 동노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25화. 동궁동(東宮洞)이었다.



6부.


25.


식사를 한다. 나에게 식사란 주유에 가까운 일이다. 딱히 즐겁지 않지만, 생존을 위해 해야만 하는 숙제가 식사다. 그렇기에 언제나 밥을 먹을 때는 사료를 먹듯이 빨리 해치우는 편이다. 다만 오늘은 천천히 식사를 한다. 3단봉 아줌마의 잔소리와 202호 할아버지의 부질없지만 그럭저럭 따뜻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나도 이에 대해 뻔한 답들을 한다. 101호 아저씨는 천천히 고개만 끄덕이고, 102호 아주머니는 딸의 밥 위에 반찬을 놓아준다. 그렇게 천천히 다같이 식사를 한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건지, 빠르게 가는 건지 잘 모르겠다. 다만. 그저 그렇게 다 같이 밥을 먹는다.


"저는 일어나겠습니다. 이제 슬슬 출근 해야 해서요."

"벌써 가? 과일 깎아 줄게 먹고 가!"

"아닙니다. 밥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하죠. 그리고 102호 아주머니. 이거."


102호 아주머니에게 공책을 건넨다.


"이계성 할머니의 마지막 부탁은 이 공책을 딸에게 전달해달라는 거였지만. 불가능한 일이 되었으니 102호 아주머니에게 드릴게요. 102호 아주머니도 이걸 받으실 자격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102호 아주머니가 공책을 받고는 한참을 공책을 쥐고 있었다.


"아니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받으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 공책은 지연 언니한테 가야지만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신경 써 주신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102호 아주머니의 거절은 너무나 단호해서 말을 더 걸 수 없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 공책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에게는 전달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 지금은 공무원분 판단이 제일 옳은 판단을 하실 거 같아요. 계성 이모 일에 대해 가장 많이 고민하셨을 테니까요."

"그건 또 그렇네요... 알겠습니다. 제가 조금 더 고민 해볼게요."


공책을 다시 가방 속에 넣는다. 그리고 신사동 집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모두 현관 앞까지 나와 나를 배웅 한다. 202호 할아버지는 만약 이계성 할머니 공영 장례식을 하게 된다면 꼭 자신에게 연락을 달라며 메모지에 자기의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메모지만 주기는 좀 그러셨는지 쌍화탕 한 병도 주셨다.


다시 출근길에 오른다. 신사역 사거리까지 걸어간다. 공책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다만 고민 이전에 밤을 새운 탓인지 피곤이 몰려온다. 공중도덕이나 체면을 논할 처지가 아니기에 사거리에 주저앉는다. 이제는 새벽도 아닌 완전한 아침이다. 몸이 욱신거린다. 기지개를 켜본다. 그리고 다시 쪼그라든다. 문득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느낀다. 다시 공책에 대해 고민한다. 이 공책을 어떻게 해야 할까. 파쇄기에 갈아버리기는 싫다. 이계성 할머니는 공책을 어떻게 하기를 원할까. 물어볼 수도 없고. 실마리라도 있을까 싶어 공책 마지막 페이지를 찾아 펴본다. 공책의 마지막 장에는 한 문장이, 또박또박 새겨져 있었다.



'마가 미안해. 엄마가 너무 지쳐서 생각이 오락가락 하네. 엄마 출근해야 해서 이만 줄일게... 이제는 지연이 한테 말을 더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대신 엄마가 약속할게. 엄마가 거기로 갈게. 거기서 우리 지연이 기다릴게.‘



공책 마지막 장의 첫 문장의 첫 글자가 '마'인 걸 보면, 아마 마지막 장의 앞의 장에서 이어지는 내용인 것 같다. 앞 장까지 읽어 볼까. 앞 장에는 무슨 내용이 또 있기는 할 텐데. 하지만 공책을 덮는다. 이제는 몸 상태가 고민이라는 정신노동을 더 할 수 없는 상태다. 일단 출근을 하자. 그 후에 생각을 해보자. 신사역을 향해 다시 걷는다. 근데 이계성 할머니가 갔다는 '거기'는 또 어디일까.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알지 못하지만. 이계성 할머니가 거기로 간 까닭도 모르겠다. 이유는 차치하고 거기는 또 어디일까. 그만 생각하자.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냈다. 이제는 내가 더 고민해 봐야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게 사실이다. 이제 공책을 전달할 사람도 없지 않은가. 이계성 할머니에게 공책을 돌려드리러 가자. 이계성 할머니 집으로 공책을 돌려드리러 가자. 가는 길에. 국화라도 한 송이 사서 가자.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다.


지하철역에 도착한다. 하염없이 지하 세계로 내려가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교대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탄 뒤에는 그냥 사람들 사이에 수납되어 눈을 감고 잠을 잔다. 의외로 만원 지하철은 잠을 자기 좋다. 사람들 몸에 끼어서 택배 마냥 같이 이송되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 역쯤이면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때 나도 기상해서 어느 역쯤 왔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그렇게 지하철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고, 환승하고. 또 환승하고. 지하철역에 내린다. 그렇게 다시 어제 떠난 나의 직장으로 돌아간다.


주민센터 쪽으로 난 지하철 출구로 나와, 왼쪽으로 몸을 돌리면 주거지역으로 뚫린 인도가 보인다. 조금 더 걸어서 주민센터에 도착한다. 주민센터 문을 열고 들어가서 먼저 출근한 동료들에게 반가운 듯 인사를 한다. 출근 지문을 찍고 자리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누른다. 그리고 몇 초가 지나면 모니터 화면이 밝아진다. 마우스를 좌우로 흔들고 업무용 포털 홈페이지를 접속한다. 머리로 기억은 못 하지만 손가락이 기억하는 업무용 포털 홈페이지 비밀번호를 입력한다. 로그인 성공하고 창을 훑어본다. 안 읽은 공문 0개. 다행히 바쁜 일은 없다는 의미다. 잠도 못 잤는데 대충 핑계나 대고 창고에서 한숨 자고 올까. 아니면 연차를 쓰고 집에서 잠이나 잘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빨리 공책을 이계성 할머니 집에 두고 와야 한다. 이제 이계성을 나에게서 떠나보내야 한다. 그게 지극한 현실이다.


"오빠 안녕! 어? 왜 이렇게 초췌해? 노숙이라도 했어?"


수진이다. 세상 반갑다.


"수진아. 너 혹시 바쁘냐?"

"딱히 뭐 없기는 해. 왜? 일 도와줄 거 있어?"

"도와줄 거는 없어. 근데.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어."

"뭐라는 거야. 바쁘단 거야. 안 바쁘다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나한테 뭘 해달라는 거야. 뭐야. 오빠 어제 술 마셨어? 정 피곤하면 연차라도 써. 사람 몰골이 말이 아니네."

"수진아."

"왜."

"피곤한 게 아니야."

"그러면?"

"못생긴 거야."

"그냥 죽어라. 장례는 내가 잘 치를게."


8시 57분. 팀장님이 출근한다.


"다들 왔네?"

"안녕하세요. 팀장님."

"강 주임. 얼굴이 왜 그래? 몸 안 좋아? 병원이라도 가봐. 아니면 연차라도 써. 오늘 큰 건은 없잖아."

"팀장님."

"몸이 안 좋은 게 아니라."


수진이가 나를 노려본다. 찡그린 얼굴은 아마 나보고 입을 다물라는 협박이리라. 실없는 농담을 참는다. 가끔 느끼는 사실이지만 헛소리에는 매가 약일 때도 있다.


"팀장님! 동노 오빠가. 아니 강 주임이 감기약을 먹고 지금 헤롱헤롱 하네요. 잠깐 쉬게 하는 게 어떨까요?"

"그래. 강 주임. 오전에 사우나라도 다녀와. 정 아니다 싶으면 연차 쓰고. 수진 주임. 바쁘겠지만 강 주임 사정 좀 봐주자."

"네. 당장 바쁜 일 없으니. 일들은 제가 처리할게요. 동노 오빠. 좀 쉬고 와. 팀장님도 허락하셨잖아."

걱정하는 수진이를 뒤로 하고 팀장님은 자기 자리에 앉아. 무선 이어폰을 꽂고. 태블릿 PC로 유튜브를 든다. 그리고 신문을 펼쳐 읽는다. 상팔자다. 수진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오빠. 어디든 나갔다 와. 오빠 쉬어야 해."

"아니야. 아까 말했잖아. 해야 할 일이 있어."

팀장님에게 다가간다. 팀장님은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을 빼고는 의아하다는 듯 나를 본다.

"팀장님. 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오전에 출장 좀 다녀오겠습니다."

"강 주임 쉬라니까. 요새 좀 안 좋아 보이기도 해서 그래. 남은 일이라는 게 급한 일이야? 아주 급한 거 아니면 그냥 쉬어."

"이계성 할머니 관련한 일이라서요. 오늘로 끝내려 합니다."


팀장님은 말이 없다. 자기 멋대로인 나를 한번 혼낼 법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다. 사람이 착한 걸까? 그건 아닐 거다. 팀장님은 그냥 어떤 일이든 자기 책임을 만들지 않으려는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게 나의 중론이다. 다만 신기한 게, 내가 구청에 있을 때 같은 부서에서 일했던 과장님은 지금 우리 팀장님을 극찬했었다. 구청 과장님은 지금의 내 팀장님에 대해 일을 진짜 열심히 하는 건 차치하고. 마음이 너무 착해서 걱정된다는 칭찬을 늘어놓았었다. 근데 지금 팀장님에게 그 모습은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나이가 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초심도 잃고 하겠지만 정도가 너무 심하다. 아마 팀장님이 과거에 윗사람들 앞에서 성실한 척, 착한 척 연기를 했던 거겠지. 난 저렇게 늙지 않으리라.


"그래. 다녀와. 무리는 말고."


팀장님은 다시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신문을 펼친다. 떠나간 과거의 팀장님을 애도하며.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출장 전에 복지정책과에 전화를 건다.


"안녕하세요. 강병1동 주민센터 주임 강동노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이계성 할머니 관련해서 연락드렸습니다. 그때 공영 장례식 사업 말씀 해주셨었는데. 혹시 자세히 좀 알 수 있을까요?"

"이계성이요? 잠깐만요. 이계성... 이계성... 찾았다. 이제 기억 나네요. 이계성 씨 공영 장례는 오늘부터 내일까지. 2일간 약식으로 빈소 차릴 거예요. 공영 장례식장 주소는 제가 주임님한테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제가 따로 할 게 남아있을까요?"

"아니에요. 강동노 주임님이 따로 더 할 일은 없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망자 짐 정리도 주임님께 여쭤봐도 될까요?"

"그건 제 담당이 아니라. 담당자 연결 해드릴게요."


공무원들은 전화를 자주 돌린다. 처음에는 일을 하기 싫은가 싶었다. 다만 현실은 그저 담당 업무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돌리는 거다. 근데 더 생각을 해보니, 그것도 아니다. 공무원들이 전화를 계속 돌리는 건 한 사람의 공무원이 한 사람의 인생을 모두 감내하는 게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무원들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쪼개서 나누어 부담하는 거다. 직원들이 감내해야 할 누군가의 고통을 나누어 갖기 위해 업무를 쪼개어 놓았고, 전화를 돌리게 된 거다. 아니라고? 뭐 어떤가. 그렇다면 그런 줄도 알아야 사는 게 편해진다.


"안녕하세요. 복지정책과 전진 주임입니다."

"안녕하세요. 강병1동 주민센터 주임 강동노입니다. 저희 동 사망자 유가족이 장례 인수를 거부해서요. 사망자 짐 정리 해주는 사업, 그게 뭐였더라. 하여튼 그걸 좀 신청하려고 하는데요. 혹시 담당하시는 주임님 맞으실까요?"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사망자 유품 정리랑 집 청소 대행은 구청이랑 사회적 기업이랑 제휴 맺어서 하는 사업이 있어요. 그걸 신청 하시면 되는데. 그 전에 혹시 사망자 집 크기나 짐이 대충 얼마나 되는지 아실까요?"

"대충은 아는데. 혹시 모르니까. 제가 지금 직접 가서 집 확인 해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담당자분도 정확하게 업무 진행하시는 게 더 좋으실 거고요."

"그럼 저야 감사하죠. 그리고 집주인 동의서도 한 장 필요해요. 집 청소 사업이 비용 청구를 집주인이 가지고 있는 보증금에 대해서 해야 하는 거라. 서식을 보내드릴까요?"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오후까지 회신하고, 주임님한테 연락드릴게요."

요건을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는다. 나가자.

"수진아."

"화상아 그만 좀 불러. 왜!"

"끝내고 올게."

"뭘 끝내? 됐어. 빨리 갔다 와. 그리고 좀 쉬어. 제발 좀 쉬어. 요새 자주 이야기 하지만 오빠 좀 쉬어야 해."

"다녀올게. 그럼 쉴 수 있어."


구청 직원이 보내준 집 주인 동의서를 출력해서 가방에 집어넣는다. 주민센터를 나와 이계성 할머니의 똥궁빌라로 간다. 가는 길에 똥궁빌라 집주인 박 여사에게 전화를 건다. 이계성 할머니 집 정리에 관해 집주인 서명을 받아야 하니 잠시 시간을 내어달라고 박 여사에게 요청한다. 박 여사는 어차피 근처라고 이계성 할머니 집 앞에서 보자며 전화를 끊는다. 그렇게 골목들을 지나. 똥궁빌라에 도착. 박 여사가 집 앞에 있다. 가져온 집 주인 동의서를 박 여사에게 건넨다.


"이거 전화로 말씀드린 집주인 동의서예요. 서명만 부탁드릴게요. 집안 물건 치우고, 청소까지 해드릴 텐데. 금액은 민간업체보다 훨씬 쌀 거예요."

"금액은 상관없어. 자네도 고생했어."

"할아버님은요? 같이 안 오셨어요?"

"몰라. 심란하다고 산에 좀 다녀온대."

"큰 산 가셨나 봐요. 2박 3일 일정으로 가신 거예요?"

"아니야. 그 양반 힘이 없어서 그런 산 못 가. 아차산 갔어. 어차피 체력도 엉망이라 언덕이나 좀 오르다가 그냥 내려올 거야. 걱정하지 마."


침묵이 흘렀다. 박 여사가 나에게 할 말이 남아있다는 듯 내 소매를 잡았다.


"이봐 501호. 이번주 토요일 오전 중에 임대차계약서 가지고. 사거리에 있는 신가부동산으로 와. 지난번에 말해준 것처럼 계약 해줄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성댁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공영 장례를 오늘부터 내일까지 약식으로 치를 것 같습니다."

"세상 좋아졌어. 그래도 가는 마당에 국가가 위로도 해주고."

"그렇죠. 세상이 좋아졌죠."

"501호."

"네?"

"계성댁 너무 미워하지 마."

"아?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501호만 믿고 갈게. 고생했어."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살펴 가세요."


박 여사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움찔움찔 어깨를 들썩이다가 됐다는 제스쳐를 하고는 대포동 미사일처럼 햇살이 드는 남쪽으로 떠났다. 똥궁빌라 앞 모레들이 먼지를 일으킨다. 바람 때문일까. 아니면 박 여사의 역동적 움직임 때문일까. 모를 일이다. 많은 일들이 참 모를 일들이다. 그렇게 박 여사를 뒤로하고 똥궁빌라 101호로 내려간다.


문은 여전히 잠기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문을 열고 이계성 할머니 집을 훑어본다. 짐이랄 것도 없다. 먼지 쌓인 오래된 가전들. 한 아름에 안을 수 있을 정도의 옷가지. 여기저기 놓여있는 약봉지들. 구청에 보낼 보고서용 현장 사진을 5장 정도 찍으니 집 전체를 모두 담을 수 있었다. 이계성이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은 딱 이 정도다. 다 무너져 가는 이계성 할머니 집의 소파에 앉는다. 잠이 쏟아진다. 한숨 자고 갈까. 안 되겠지. 일어나자. 잠이라도 깨볼 겸 스트레칭을 한다. 등 뒤 가방에서 이물감이 느껴진다. 이계성 할머니의 공책이었다. 깜빡 잊을 뻔했다. 이 공책 하나 때문에 밤새 고생 했는데 말이다.


국화꽃은 잊어버렸지만, 공책은 이계성 할머니 집에 두고 가자. 이계성 할머니에게 공책을 돌려드리자. 공책을 꺼낸다. 지긋지긋 한 이계성 할머니와의 인연도 이제 끝이구나. 공책을 탁자 위에 올려둔다. 문득 신사동에서 읽은 공책 마지막 장의 내용이 생각났다.



'마가 미안해. 엄마가 너무 지쳐서 생각이 오락가락 하네. 엄마 출근해야 해서 이만 줄일게... 이제는 지연이 한테 말을 더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대신 엄마가 약속할게. 엄마가 거기로 갈게. 거기서 우리 지연이 기다릴게.‘



공책 마지막 장의 첫 글자인 '마'의 바로 앞 글자는 뭘까. 아마 '엄마'라는 단어겠지. 다만 그 앞의 문장도 궁금해진다. 공책을 읽어보고 싶다. 이제 고인이 된 이계성 할머니의 공책을 내가 읽어도 될까. 양심의 가책이 들지만 궁금하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참 모를 일이다. 나에게 이계성이라는 사람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다니. 이제 뭐가 더 문제겠는가. 게다가 이계성 할머니의 식구들과 밥도 같이 먹은 사이인데. 나도 알 자격이 조금은 있다. 이계성 할머니. 미안합니다. 좀 읽을게요. 제가 자식 같아서 혼냈다고 하셨으니, 자식된 마음으로 읽어볼게요. 그렇게 이계성 할머니의 공책을 펼친다.



19XX년 12월 12일 화요일. 날씨 눈.

"지연아. 나중에 지연이도 어른이 되고, 엄마도 돈 많이 벌면. 그때는 여기 말고. 한강 고수부지 보이는 동네 가서 살자. 날씨가 좋으면 눈에 걸리는 거 하나 없이 저 멀리 하늘 끝까지 보이는 강변 가서 살자. 지연이랑 엄마랑 누구 괴롭히는 사람 하나 없는. 그런 캥기는 것 하나 없는 동네 가서 엄마랑 지연이랑 둘이 행복하게 살자. 엄마가 봐둔 동네가 있어. 신사동 사거리 버스 정류장에서 12-5번 버스 타고 종점까지 오면 있는 동궁동라는 동네야. 거꾸로 해도 동궁동. 이름이 웃기지? 엄마도 얼마나 웃었나 몰라. 궁의 동쪽 끝에 있는 곳이라서 동궁동이래. 나중에 엄마랑 지연이랑 둘이서 행복하게 살자. 이제 아무도 괴롭히지 않고 둘만 행복하게 살자. 지연이도 엄마도 그동안 너무 힘들었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 행복하게 살고 싶다. 에휴. 괜한 말을 꺼냈네. 지연이 한테 힘든 이야기는 안 하려 했는데. 엄"



이계성 할머니가 쓴 걸로 보이는 편지였다. 그리고 이 편지의 다음 장은 신사역에서 읽었던 문장인 '마가 미안해. 엄마가 너무 지쳐서 생각이 오락가락 하네. 엄마 출근해야 해서 이만 줄일게... 이제는 지연이 한테 말을 더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대신 엄마가 약속할게. 엄마가 거기로 갈게. 거기서 우리 지연이 기다릴게.'였다.


공책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계성 할머니는 왜 이곳에 왔으며. 대체 무슨 일로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을까. 역시나 모를 일이다. 신사동 사람들의 이계성, 나의 이계썽, 공책의 이계성의 이야기를 이어 붙이려 노력했지만 쉽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이계성 할머니는 딸과의 재회를 현실적으로 포기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친 걸까. 이야기의 끝을 누군가 이어 쓰지 않는 이상 이제 누구도 이계성의 이야기를 알 수가 없다.


"계십니까."


문이 열리고 누군가 집으로 들어온다. 화들짝 놀라 공책을 가방에 쑤셔 넣는다.


"아니 이게 누구야! 동 사무소의 새마을 일꾼. 강 주임이잖아!"


이대윤 아저씨였다. 이미 만취 상태였고. 손에는 순대를 들고 있었다. 깊은 짜증이 터져 나온다. 손에 순대를 쥐고 다니는 인류는 어떤 인류일까. 호모 사피엔스 다음으로 지구를 정복할 호모 순대쿠스의 시작을 나는 목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주여. 현생 인류를 구원하소서.


"깜짝이야! 대윤 아저씨 남의 집 함부로 들어오면 안 돼!"

"이게 또 반말이네. 야 인마. 너도 주인 허락 없이 들어왔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윤 아저씨와 말싸움 할 여유가 없다.

"됐고. 여기는 또 왜 왔어요. 뭐라도 훔쳐 가려고요?"

"시끄러! 너랑 싸울 여유 없어."


원래 말싸움은 치졸한 거지만. 내가 했어야 할 말을 이대윤 아저씨가 먼저 하다니. 이건 이것대로 억울하다.


"술 한잔 올리러 왔지."

"술이요?"

"계성 할매. 잘 가라고. 이 순대 계성 할매가 오며 가며 나 많이 사줬어. 처음에는 내가 거지도 아니고 기분 나빴는데. 먹다 보니까 또 맛있더라고. 그래서 여기 순대 파는 할머니 단골 됐지. 나중에 순대 할매한테 물어보니까. 계성 할매가 나 오면 양 좀 넉넉히 주라고 그랬대. 자기가 나중에 돈 더 내겠다고. 계성 할매가 싸가지는 없어도 사람은 좋았어. 맨날 나한테 욕하면서도 이렇게 순대도 챙겨주고."


이대윤 아저씨는 손에 쥐고 온 순대를 이계성 할머니가 누웠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불 앞에 놓아두고는 술을 이계성 할머니의 베개에 조금 뿌렸다.


"계성 할매. 잘 가쇼. 순대는 맛있었소. 순대 할매도 고맙다고 전해달라네요. 허허."


이 순간만큼은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고개를 숙인다. 고개를 숙이고 양손을 모은다. 추모하는 마음까지는 아니지만. 그냥 그 정도는 하고 싶다.


8.jpg


"이봐. 강병1동의 일꾼 강 주임. 나 이제 이 동네에서 이사 가."

"좋은 소식이네요. 대윤 아저씨도 이 동네도 재개발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어차피 다른 동네로 가셔야 할 테니까."

"근데 너 갑자기 왜 또 존댓말이냐?"

"내 마음이에요."

"됐고. 나도 이 동네 오래 살았다. 지금 이 동네 이름이 강병? 강원? 하여튼 근본 없는 이름으로 바뀌기도 전부터 살았는데. 이제는 갈 때가 된 거지 뭐."

"강병 1동이 원래는 다른 이름이었어요? 생각해보니 그런 이야기 저도 들어본 적은 있네요."

"어린 노무 자슥이 뭘 알겠냐. 서울이 다 그렇지. 몇십 년 전에 서울시에서 이 동네 개발한다고, 미친 듯이 집 지을 때 이 동네 구획도 싹 다 바뀌고, 이름도 바뀌었어,"

"원래 여기 동네 이름이 뭐였는데요? 신사동이라도 됐어요?"

"이 새끼 이거. 관악구 신사동 사는 사람처럼 생긴 놈이, 이 동네 이름이 역사와 전통의 동네인 ’동궁동‘이었어. 나 같은 신사들에게 잘 어울리는 동네 이름이었는데."

"에이. 왜 나한테 관악구 신사동 사람이라고 그래요. 나 생긴 건 고급스러워서 강남구 신사..."

"네가 강남구 신사동이면 인마. 난 런던 북구 출신이다 인마."

"아저씨 뭐라고 했어요?"

"런던 북구. 쪼크를 설명까지 해줘야 하냐? 인마 이거 유머도 없나?"

"아니. 아니. 그 전에. 무슨 동?"

"동궁동! 궁의 동쪽 끝이라 하여 동궁동(東宮洞). 얼마나 예스러운 이름이냐. 근본 없는 공무원 놈들이 동네 찢어발겨서 강병이고 뭐고 이상한 이름이나 붙이고."

"동궁동..."

"그래서 여기 빌라도 동궁빌라잖아. 몰랐어? 이거 상상 이상으로 멍청한 놈이네. 넌 출세 하기는 틀린 것 같다."

"고마워요. 아저씨."

"어랍쇼? 왜 닭살 돋게 고맙다고 하는 거야? 됐고. 나 가기 전에 소주나 한 잔 하자. 나 이 동네 순대 잘하는 집 알아. 그 집은 당연히!"

"아저씨 나 먼저 갈게요. 술 좀 줄여요. 아저씨!"

"야 인마! 순대 먹고 가!"


그랬구나. 그랬던 거구나. 공책을 다시 가방에 넣고 똥궁빌라를 빠져나온다. 빠른 걸음으로 주민센터로 향한다. 혹시 몰라 걸으면서 휴대전화로 검색을 해본다. 이계성 할머니가 살았고, 또 내가 일하는 강병1동, 아니 뭐 대충 강병동은 서울시 행정 대개편 때 이름이 바뀐 적이 있었다. 이곳 강병동 명칭이 바뀌기 전, 이 동네 이름은 동궁동(東宮洞)이었다.


이계성 할머니가 공책 마지막 장에 있던, 딸에게 같이 살자고 했던 곳 이름이 ’동궁동‘이었다. 그리고 동궁동이 지금의 강병동이다. 이계성 할머니는 여기 동궁동을 딸과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장소로 생각했던 거다. 다만 이계성 할머니의 마지막 바람을 이루어지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게 이계성 할머니는 재회하지 못한 딸에게, 그동안의 이계성을 공책으로 보낸 거다.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공책을, 이계성을 딸에게 전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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