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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24-

24화.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by 동노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24화.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6부.


24.


나만 느낀 사실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다들 102호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102호 아주머니는 졸고 있던 딸을 살짝 흔들어 깨웠다.


"성경아. 집에 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계신 분들이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엄마는 이야기 좀 하다가 내려갈게. 성경이 아직 학교 갈 때까지 시간 좀 있으니까. 잠깐이라도 더 자자. 엄마도 금방 내려갈게."


102호 아주머니의 딸은 별일이 다 있다는 표정을 하고 총총총 문을 나섰다.


"이번엔. 제가 말할 차례인가 보네요. 아마 같이 사시는 분들한테도 말씀드린 적이 없었던 것 같네요. 근데. 이계성... 그러니까. 계성 이모가 돌아가셨다니. 이제 말을 해야겠네요."


3단봉 아줌마, 101호 아저씨, 202호 할아버지 모두 궁금한 눈을 하고 있다.


"아주머니는 이계성 할머니와 어떤 관계였나요? 좀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계성 할머니가 임대계약서를 작성한 것도 102호 아주머니뿐이시고. 다른 분들한테도 102호 아주머니를 잘 챙겨달라고 한 걸 보면, 특별한 관계였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특별한 관계죠."

"그렇다면 혹시. 102호 아주머니가 이계성 할머니의 자녀이실까요?"


모두 숨을 죽이고 102호 아주머니의 입을 응시했다.


"아니에요. 저는 이계성 할머니 가족은 아니에요."

"그러시군요."


허탈하다. 102호 아주머니가 이계성 할머니 이야기의 종착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근데. 제가 계성 이모 딸인 지연 언니를 알아요. 계성 이모도 지연 언니 통해서 알게 된 분이에요."

주변을 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계성 할머니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분위기다.

"102호!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이 말 처음 들어! 계성 언니가 딸이 있어?"

"예전에는 102호가 이계성 씨와 모르는 사이라고 했잖아요."

"저... 102호 아주머니랑... 옆집 살았는데. 이계성 할머니랑 같이 계신 걸 본 적이 없는데..."

"그게, 사연이 좀 있어요."

"혹시 말씀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102호 아주머니는 오랜 시간 침묵을 지켰다.


"다른 분들한테 먼저 말씀드리지 못한 건 죄송해요. 계성 이모가 자기 안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따로 말씀 먼저 못 드렸어요. 죄송해요."

"그러면 대체 102호 아주머니는 이계성 할머니와 어떤 관계인 거예요?"


102호 아주머니는 또 한참을 망설였다. 102호 아주머니는 눈을 한번 질끈 감더니 말을 이어갔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계성 이모가 어떤 분이셨는지 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 마당에 그게 맞는 것 같고요. 무엇보다 제가 그걸 바라고요. 대신 다들 약속 해줘요. 계성 이모를... 잊지 말아주세요."

"약속할게."

"내 약속하리다."

"약속할게요..."


다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이계성 할머니한테 딱히 추모하지는 않지만. 핑클의 옥주현도 약속으로 성공했는데, 나라고 못할소냐.


"약속하겠습니다."

"저는 계성 이모의 딸. 그러니까 지연 언니랑 아는 사이였어요. 지연 언니와 제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이 여기 신사동이었어요. 이제 거의 30년 전이니까. 아마 그때 압구정동에서 신사동이 분리되고 아주 오래 지나지 않았을 때일 거예요. 지연 언니랑 처음부터 아주 가까웠던 사이는 아니었어요. 다만 사는 동네가 같아서, 오며 가며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였어요."

"그럼 이계성 할머니는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그게... 계성 이모가 사연이 좀 있어요. 저도 나중에야 계성 이모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계성 이모가 영등포 쪽 부자의 후처였대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집들 많았잖아요. 아들 낳으려고 후처 들이고 그런."

"이계성 씨가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 전혀 몰랐어요."

"세상이 아무리 변했어도 자랑하고 다닐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근데 계성 이모가 서른이 넘어도 좀처럼 아이가 안 생겼대요. 그러다가 서른 하나인가 임신을 하셨대요. 근데 딸을 낳으셨고. 그게 지연 언니였어요."

"계성 언니가 딸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데. 근데 후처를 들인 이유가 아들 낳기 위한 거였으면..."

"그게 문제였어요. 계성 이모가 지연 언니 낳고. 바로 그 집 본처가 아들을 낳았대요. 그때부터 계성 이모가 집에서 천덕꾸러기가 된 거죠. 남편도 그렇게 자기를 패고. 본처나 시어머니도 계성 이모한테 온갖 트집을 다 잡더래요. 자기 발로 나가라는 거죠."

"우리 계성 언니 불쌍해서 어떻게 해."


3단봉 아줌마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202호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계셨다. 101호 아저씨도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계성 이모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집을 나가겠다고 했대요. 근데 가족 중 아무도 계성 이모를 붙잡지 않더래요. 계성 이모가 집 나간다고 하니까 시어머니란 사람은 꼴에 집안 어른이라고, 다시 이 집이랑 가족들한테 얼씬대지 말라고 나름 큰돈을 줬다고 하더라고요.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사람이었나 봐요."

"가족들한테 얼씬대지 말라? 그럼 딸은?"

"맞아요. 딸한테도 접근하지 말라고 했대요. 그 핏덩이를 두고 그냥 나가라고 한 거죠."

"아무리 그 시절이어도 이계성 씨한테 너무 박정한 처사인데요."

"모르겠어요. 하여튼 계성 이모는 시집간 집에서 쫓겨났고. 친정에 가도 소박 맞은 여자는 집에 안 들인다고 내쫓더래요. 그래서 마냥 몇날 며칠을 울기만 했대요. 근데 또 그 와중에 자기 딸이 미어지듯 보고 싶었대요. 시집살이 지겨워서 나가기만 하면 그냥 괜찮을 줄 알았는데. 계성 이모도 자기가 그럴 줄은 몰랐던 거죠. 그때부터 몇 년은 그냥 미친 사람처럼 방황하고 다녔다고 하셨어요. 무슨 정신이었는지 기억도 없다고."

"그러면 이계성 할머니가 어쩌다 102호 아주머니를 만나게 되신 거예요?"

"계성 이모가 자기 딸. 그러니까 지연 언니가 국민학교에 들어가 있을 나이란 걸 새삼 안 거죠. 진짜 얼이 빠진 사람처럼 살다 보니, 아무것도 못 느끼고 살았는데. 그때 정신이 확 들더래요. 그래서 행여나 자기 딸 얼굴이라도 볼까. 얼굴이라도 보면 자기가 엄마인 걸 알고 자기한테 안기지 않을까. 무작정 여기 신사동으로 왔던 거예요. 그게 이 집이에요."

"세상에나. 이계성 씨가 이 집으로 들어올 때 이상하다고 느꼈었는데. 그게 그런 이유가 있었나 보군요."

"계성 이모는 국민학교 하교 시간만 기다리면서, 근처 아이들이 다니는 국민학교 하나하나 다 다니면서 지연 언니를 찾았대요. 근데. 딱 보니까 한 아이가 자기 딸이란 걸 단박에 알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지연 언니야 정신 차리니 계성 이모, 그러니까 자기 엄마가 없던 거잖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지연 언니가 계성 이모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그럼 어떻게 이계성 할머니가 딸이랑 대화를 하게 되신 거죠?"

"제가 그 중간에서 말을 전달했어요. 저는 그때 국민학교 갓 입학했었는데. 그때 저는 신사동 맨 구석에 살아서 등굣길이 좀 멀었는데, 그 중간에 살던 지연 언니 집 앞을 매일 지나다녔어요. 근데 지연 언니가 어린 애 혼자 왔다갔다 하는 제가 안쓰러웠나 봐요. 지연 언니가 언제부터인가 등하굣길에 저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등교 시간 저를 데리러 저희 집까지 매일 와줬어요. 그렇게 둘이 다니기 시작한 거예요."

"이계성 할머니 따님 분이 심성이 고왔던 모양이네요.

"지연 언니는 워낙 착했어요. 거기에 얼굴도 예뻐서 학교에서 인기쟁이였죠. 지연 언니가 얼마나 착했냐면, 제가 저학년이라서 먼저 하교하면 자기 점심시간에 나와서 저랑 같이 가줄 수 있는 곳까지 같이 가줬을 정도였어요. 참 착한 언니였죠. 그러다 가끔은 제가 먼저 학교 끝나면 그 동네 친구들이랑 놀다가. 지연 언니 학교 마치고 나오면 같이 놀기도 했죠. 제가 지연 언니를 워낙 좋아해서. 주말에는 지연 언니 따라서 교회도 같이 다녔고요."

"이계성 할머니가 그걸 본 거군요!"

"맞아요. 그래서 한 날은 계성 이모가 저를 붙잡고 말을 걸었어요. 저도 처음에는 무서워서 도망 다녔죠. 그 시절에는 유괴다, 뭐다 문제가 많았잖아요. 근데 계성 이모가 저한테 날마다 사탕이나 사이다도 사주면서 한 달인가를 조금씩 조금씩 정을 붙였어요. 그렇게 저랑 계성 이모랑 안면을 튼 거죠. 그렇게 계성 이모가 저한테 평소 같이 다니는 언니, 그러니까 지연 언니랑도 같이 떡볶이를 먹자고 하더라고요. 저는 좋다고 했죠. 어린 나이에 뭘 알았겠어요. 그냥 저한테 잘해주는 아주머니가, 제가 좋아하는 언니랑 맛있는 거 먹자니까 좋았죠."

"그럼. 그때 이계성 할머니와 자녀분, 그러니까 지연 씨랑 만나게 된 거예요?"

"맞아요. 지연 언니도 처음에는 안 가겠다고 하더니. 제가 걱정되는지 따라왔어요. 근데 막상 또 같이 가니까 계성 이모가 지연 언니한테 세상 잘 해주더라고요."

"계성 언니, 자기 딸을 봤는데 얼마나 기뻤겠어."

"근데 신기한 게 제가 아무리 어렸어도 계성 이모가 지연 언니를 대하는 게 뭔가 달라 보였어요. 물론 저한테도 정말 잘 해주셨어요. 나중에는 제가 아픈 날이면 약도 타다 주시고. 비 오는 날에는 우산 가지고 기다려 주시기도 했고요. 저랑도 자주 보다 보니 저한테도 정이 든 거죠. 계성 이모는 심성이 진짜 고운 분이잖아요."

"맞아. 계성 언니가 또 한 번 정이 들면 그렇게 잘해줬어. 그렇게 착한 사람이 계성 언니였어. 듣고 있어 공무원?"

"죄송해요. 참 거 사람 민망하게."

"농담은 나중에 합시다... 101호 아주머니... 그래서 어떻게 된 거예요?"

"대부분은 제가 지연 언니보다 먼저 하교해서, 102호에 와서 놀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지연 언니도 학교 끝나면 이 집으로 왔죠. 둘이 놀다 보면 계성 이모가 102호로 왔어요. 물론 가끔은 계성 이모가 못 오기도 했어요. 일을 많이 하셨다는 말 들으니... 아마 그때는 바빠서 도저히 못 빠져나왔던 것 같네요. 그렇게 만나게 되면 세 명이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어요. 계성 이모가 문방구 가서 학용품도 많이 사줬고요. 세 명이서 같이 한강까지 산책하면서 소풍도 가곤 했어요. 그러다 보니 계성 이모도 저한테 정이 많이 생겼죠. 저도 그렇고요."

"아니. 그럼. 계성 언니가 딸한테 자기가 엄마라고 말은 했어? 그건 말을해야지."

"계성 이모가 직접 말하지는 못했는데. 지연 언니가 알게 된 사건이 있었어요."

"어떤 사건...이요..?"

"지연 언니가 점점 집에 늦게 들어오니까. 지연 언니 할머니. 그러니까 계성 이모한테는 시어머니였던 분이 지연 언니 뒤를 밟았나 봐요."

"아이구야. 어떻게 해... 우리 언니 어떡해."

"난리가 났죠. 갑자기 지연 언니 할머니랑 사람 몇 명이 여기 102호 와서 계성 이모를 엄청 때렸어요. 지연 언니도 엄청 놀랐는지 몸이 다 굳었어요. 근데 그 와중에도 저 놀랄까 봐 저를 꼭 안아줬어요. 계성 이모도 맞는 중에 애들 앞에서 이러시지 말고. 일단 나가자고 계속 말씀하시고요."


102호 아주머니는 숨을 가빠졌다. 잠시 말을 잇지 못했고, 다들 고통스러운 침묵을 지켰다.


"지연 언니 할머니는 계성 이모가 지연 언니한테 자기가 엄마라고 말했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때 지연 언니 할머니가 계성 이모한테 욕지거리하던 중에, 지연 언니가 자기랑 계성 이모 관계를 알 수 있는 말을 많이 했어요. 그때 지연 언니가 알게 된 거죠. 이 아주머니가 내 엄마구나. 근데 아마 지연 언니는 그 사건이 있기 전에도 먼저 눈치를 챘을 것도 같아요. 지연 언니는 똑똑했으니까. 그리고 계성 이모가 지연 언니를 대하는 모습이 저한테도 남다르게 느껴지는데, 지연 언니 본인은 더 느꼈겠죠. 다만 그 해답을 찾은 순간이 너무 잔인했던 거죠.."

"그게 이계성 할머니와 자녀분과 마지막 만남이었을까요?"

"아니요. 지연 언니가 멀리 전학 갈 거라는 소식을 들었어요. 집도 무슨 친척 집으로 보낸다고 했는데. 아주 멀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근데 어느날 지연 언니가 저희 집에 와서는 공책에 뭘 써서 줬어요. 신사동 아주머니... 아니. 엄마한테 가져다 달라고. 처음 그 공책을 계성 이모한테 가져다 드린 날에 계성 이모는 그 공책을 읽고 주저앉아 펑펑 울었어요. 그리고 그 공책에 또 뭘 써서 지연 언니한테 가져다 달라고 했죠."

"설마 그 공책이?"

"맞아요. 아까 저희에게 보여주신 공책이 그 공책일 거예요."

"그... 맞는 것 같네요. 그러면 이계성 할머니가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도 말이 되니까요."

"그럴 것 같았어요. 다만 그 공책이 지연 언니에게 갔어야 할 텐데. 이 집으로 오신 걸 보니. 잘 안된 모양이네요."

"그것도... 맞습니다."

"역시 그렇네요. 지연 언니가 공책에 글을 쓰면 제가 계성 이모한테 공책을 가져다주었어요. 계성 이모가 집에 안 계신 날은 102호 우편함에 공책을 넣어두고, 다음날에 계성 이모가 그 공책에 지연 언니한테 글을 쓰면, 제가 그걸 가지고 지연 언니한테 몰래 전달했죠."

"이계성 할머니와 따님이 공책으로 연결이 되어 있던 거네요. 이계성 할머니 따님이 이사간 곳이나 전학 간 학교가 거리가 꽤 됐을 텐데. 많이 힘드셨겠어요."

"맞아요. 그거 왔다 갔다 했을 시간에 제가 공부를 했다면, 지금 더 제 팔자가 좋았으려나요.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전 좋았어요. 묘한 책임감이 있었 거든요. 지연 언니나 계성 이모를 제가 워낙 좋아하기도 했고요."

"어린 나이였지만 굉장히 어른스러우셨네요."

"아니에요. 생각해 보면 제가 그렇게 많이 왔다 갔다 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리고 공책이 아니더라도. 지연 언니는 종종 놀러 나가는 척하고 몰래 계성 이모랑 따로 만나기도 했어요. 그 약속 시간이나 만나는 곳을 제가 전달했어요. 저도 어린 나이인데 둘의 관계에 대해 묘한 책임감이 있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두 사람이 다 행복해 보였으니까."

"이 공책이 그런 이야기가 있었군요."

"맞아요. 공무원분도 저희한테 말씀 안 하시는 부분이 있으실 테지만, 그 공책은 지연 언니한테 가야만 의미가 있어요. 계성 이모랑 지연 언니가 나눈 대화가 공책이니까요."


마냥 악마처럼 보이던 이계성이라는 사람에게도 가족이 있었고, 아픔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그리고 이유가 있었다. 뭐든 생각이나 말을 해보고 싶다. 다만 어떤 생각과 말도 생기지 않는다.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언제부터인지 제가 102호에 가면 계성 이모가 없는 날이 훨씬 더 많아졌어요. 제 추측이기는 한데. 계성 이모는 돈을 많이 벌어서 지연 언니를 데려가려 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 제가 계성 이모한테 왜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계성 이모는 지연 언니랑 한 약속이 있다고만 했어요. 그게 자기가 돈을 악착같이 버는 이유라고 했어요. 그 약속이 뭔지는 저도 모르지만. 아마 그 이야기가 저 공책에 있겠죠."

"이계성 할머니와 따님은 어떻게 됐나요? 이계성 할머니가 자녀분을 데리고 올 수 있었나요?"

"여기서부터는 저도 잘 몰라요. 어느 날 계성 이모가 저한테 이제는 공책 심부름 안 해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이제 괜찮다고. 그리고 그 시기 전후로 지연 언니도 갑자기 이사를 가버렸어요. 저도 제 삶을 살다 보니 두 사람의 이야기도 잊고 살았죠."

"그럼. 102호 아주머니는 이 집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신 거예요?"

"시간이 많이 지나서 계성 이모를 다시 만나게 됐어요. 인생이 참 신기한 게. 제가 계성 이모랑 똑같은 삶을 살았어요. 사연 있는 남자랑 느지막이 사랑에 빠지고 같이 살림도 차렸죠. 그때 성경이를 갖게 됐고요. 근데 그 남자는 이미 따로 가정이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 관계를 자기 아내에게 들켰어요. 그 남자 처가 식구들이 저 다니던 회사랑 친정 들이닥치고. 난리도 아니었죠. TV 연속극 보면 이런 일 터졌을 때 사람 무너지는 게 다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그냥 살면 되지 뭘 저렇게 청승 떠나. 근데 제가 당하니까 똑같이 무너지더라고요. 사람이 마음의 끈이 톡 하고 끊어지니까. 모은 돈도 흥청망청 막 쓰고. 가족들도 제가 부끄러웠는지 연락도 안 하더라고요."

"102호한테 그런 일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어요. 얼마나 힘들었을고."

"그때는 그냥 막 살았어요. 근데 배는 점점 불러오지. 현실도 점점 다가오지. 돈은 없지. 그렇게 성경이 낳고 나니까.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성경이 고아원에 맡기고 죽으려고 돌아다녔어요. 어디서, 어떻게 죽어야 하나 무작정 돌아다니는데, 내 신세가 계성 이모랑 지연 언니 이야기랑 똑같다는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여기 신사동집 102호로 왔어요."

"아! 그러면 그때 이계성 할머니랑 재회한 거예요?"

"맞아요. 계성 이모는 여전히 102호에 살고 계시더라고요. 둘이 한참 끌어안고 울었어요. 그리고 며칠을 잠만 잤어요. 정신이 드니까. 계성 이모한테 모든 이야기를 다 했어요. 그러더니 계성 이모가 저보고 여기 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제 딸 당장 데리고 오라고. 딸 평생 안 헤어지고 키운다는 자기한테 약속하면. 이 집을 저한테 주겠다고 하셨어요."

"이 집을요?"

"네. 그냥 용기내라고 하신 말씀인 줄 알았어요. 근데 진심이셨어요. 제가 한사코 거부해도. 자기는 이제 가야 할 곳이 있다고. 여기는 너무 많은 기억이 쌓여있어서. 더는 힘 들어서 못 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대신에 계성 이모는 이 집 사람들 다 좋은 사람들이니까 함께 잘 지내라고... 이 사람들 월세 같은 거 받지 말고. 너가 잘 챙기면서 가족처럼 지내라고..."


102호 아주머니는 고개를 바닥에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그때 계성 이모가 씨익 웃으면서 너한테 집 주는 이유도. 여기 사는 사람들 잘 보살피며 살라고 주는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제일 어리니까. 그때 계성 이모 웃는 게 너무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은혜를 갚지도 못 하고... 가셨네요."

"이계성 할머니가 그러셨군요."

"그리고 오늘까지 온 거예요. 계성 이모가 생명의 은인이죠. 수십 년을 연락도 안 하고 지냈는데. 저를 살려주신 거죠."

"그럼. 이계성 할머니는 왜 여길 떠나신 건가요?"

"저도 정말로 모르겠어요. 저한테 그 약속만 받고서는 가야 할 곳이 있다고 가방 하나만 챙기고 떠나셨어요. 자기 절대로 찾지 말라고. 전 그게 마지막일지 몰랐어요. 그게 마지막인 걸 알았으면."


102호 아주머니는 눈물 때문에 말을 멈췄다. 3단봉 아줌마도, 202호 할어버지도, 101호 아저씨도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슬픔을 감내했다. 이들에게 이계성은 가족이었다. 이곳에 있을 자격은 나에게 없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금 이들에게 나는 불청객이니까.


"저. 출근 때문에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밥이라도 먹고 가."

"그러게요. 어차피 다 같이 모인 거 밥이라도 한술 뜨고 가요."


평소 같았으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떠났을 텐데. 밥을 먹자는 말을 거부하기 싫었다. 불청객이지만 초대 받는 기분을 조금 더 누리고 싶다. 3단봉 아줌마는 미역국이 있다며 냄비를 불에 올렸다. 냄비는 내가 본 냄비 중 가장 큰 크기였다. 202호 할아버지는 자기 집에서 오징어 젓갈을 가지고 왔고, 101호 아저씨는 자기 집에서 조미김 한 보따리를 들고 왔다. 102호 아주머니는 잠이 덜 깬 딸을 데리러 간다고 내려갔고, 얼마 안 있어 딸과 함께 김치와 깻잎을 들고 왔다.


식탁이 차려졌고. 식구처럼 숟가락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202호 할어버지의 집도 아래 같이 기도 한다. 다들 마음속으로 어떤 기도를 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나도 평화가 함께 하기를 기도했다.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하나님도 생각이 있으시겠지. 온누리에 사랑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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