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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23-

23화. "알겠습니다. 다 이유가 있겠죠."

by 동노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23화. "알겠습니다. 다 이유가 있겠죠."


6부.


23.


아무리 공부를 오래 해도 어떤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혹은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사람을 마주하는 일을 오래 하다 보면 한 가지 능력이 생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그리고 내 앞에 앉아 단호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102호 아주머니의 말은 진심이 분명하다. 알 수 있다. 도대체 이계성 할머니는 이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에게는 재난 같았던 이계성 할머니에게 이들은 왜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걸까. 내 앞에 앉아있는 이 사람들이 바보라서 이러는 걸까. 모르겠다. 이건 아예 모르겠다.


머리가 또 아프다. 뇌종양일까. 그러면 치아 치료가 문제가 아닐 텐데. 만병의 원인인 스트레스 때문이라 확신한다. 역시 이계성 할머니가 죽었을 때 공책이고 뭐고 다 잊는 게 좋은 선택이었을까. 그냥 지금처럼 그럭저럭 살아가면 되는 게 아니었을까. 아마 그건 아닌 것 같다. 그 순간에 멈추지 않았던 게 다행이다. 아예 모르는 와중에 여기까지가 내가 확신하는 부분이다. 이제는 이계성 할머니의 이야기를 끝내야만 한다. 끝내자. 정면 돌파다.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어떤?"

"저는. 그...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계성 할머니를 싫어합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요."

102호 아주머니는 딸의 귀를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개인적으로 찝찝한 게 있어서 이계성 할머니의 유언을 들어 드리려고 오기는 왔는데, 솔직히 여러분들이 이러시는 게 이해가 안 가요. 그래서 자꾸 의심이 듭니다. 이계성 할머니 성격이라면 여기 계신 분들을 괴롭혔으면 괴롭혔지. 베풀지는 않으셨을 테니까요. 게다가 이계성 할머니가 신청하신 게 있어서 제출 서류로 자기 재산 서류를 내셨어야 했는데, 임대계약서도 102호를 제외한 다른 분들 임대계약서는 내지도 않으셨어요. 이거는 여러분들한테 피해가 갈 수도 있는 일입니다."


202호 할아버지가 말을 낚아챘다.


"이봐요. 말조심해요. 이계성 씨가..."

"죄송하지만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솔직히 여러분들 이 집 임대차계약이나 소유권 때문에 지금 이러시는 거 아닌가요?"


3단봉 아줌마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는다. 입을 한참 벌리고 있던 3단봉 아줌마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내 앞에 앉았다.


"여기. 이 집 사는 사람들 전부 다 계성 언니가 살린 목숨들이야. 그리고 당신이 말한 대로 여기 월세 계약서 쓴 사람 102호밖에 없어. 나머지는 계성 언니가 월세도 안 받고 무료로 살게 해준 거야. 그리고 이 집. 계성 언니가 이미 변호사 끼고 생전에 유언도 해놓았어. 이 집은 102호가 물려받을 거야."

"네? 그게 무슨."


101호 아저씨가 물을 한 번에 들이킨 말을 이어갔다.


"201호 아주머니 말씀이 맞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이계성 아주머니가... 살린 사람들이고... 이 집도 유언 집행되면 102호 아주머니 집이 될 거에요... 우리도 다 알고 있고, 동의하고 있는 일이에요..."

"다들 뭐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닙니까? 이계성 할머니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요? 아니면 지금 저 속이시려는 거죠?"


다들 말이 없다. 3단봉 아줌마가 안타깝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당신 계성 언니를 잘 모르는구나. 계속 계성 언니 욕하는데. 왜 자꾸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거야? 계성 언니 그런 사람 아니야. 계성 언니가 좀 드세서 그렇지. 얼마나 착한 사람인데. 만약 계성 언니가 뭐라 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잘못이 분명히 있는 거야."

"착한 사람이요?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데."

"내가 계성 언니랑 30년 지기야. 계성 언니 처음 만났을 때는, 뭐 다들 없이 살던 때였어. 나도 아버지 6.25 전쟁으로 잃고, 참 없이 살았지. 그래서 나는 국민학교만 마치고 바로 공장에 들어갔어. 근데 어느날인가 나이는 좀 있는데, 행동은 좀 어수룩한 언니가 와서 일을 하는 거야. 솜씨가 영 별로여서 다들 무시했는데. 내가 보이게 사람이 뭔가 넋이 좀 나가 있더라고. 나도 그냥 무시하려 했는데. 마음이 답답하더라고. 괜히 좀 안쓰러워서 내가 이것저것 챙겨주고 같이 지냈지. 사람은 착해 보였거든."

"그 사람이 이계성 할머니인가요?"

"맞아. 계성 언니랑 처음에 만난 게 그때야. 나중에는 친해져서 둘이 자매처럼 지냈어. 서로 기댈 곳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서로 엄청 챙겼어. 그런데 그 즈음에 우리 엄마가 폐병에 걸린 거야. 하이고 썪을. 돈은 없지. 도움받을 곳도 없지. 콱 죽고 싶었어. 근데 계성 언니가 나를 따로 부르더니 봉투를 주는 거야. 그때 돈으로 꽤 큰 돈이었어. 계성 언니가 일단은 자기 돈으로 우리 엄마 병원비 해결하고, 나중에 나 사정 괜찮아지면 갚으라고 하더라고."

"이계성 할머니가요?"


이계성이라는 인간이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이 꿈인가 싶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계성 언니가 준 돈으로 엄마 병원비를 내기는 했는데. 우리 엄마가 그때도 이미 늦은 상태였나 봐. 결국 돌아가셨지. 그래도 내가 어떻게 계성 언니 은혜를 잊겠어. 그래서 나도 밤낮 없이 일 해서 계성 언니한테 돈도 갚고. 부업이나 뭐 적금 이런 거 돈 생기는 일 있으면 계성 언니를 꼭 데리고 다녔어. 운이 좋았는지 나나 계성 언니나 형편이 괜찮아 지더라고. 그래서 나중에는 우리 둘이 미싱 몇 대 놓고 사업도 했어. 우리 둘 다 워낙 성실해서 평판도 빨리 생겨서 일이 잘 풀렸지. 나나 계성 언니나 사장님 소리도 들으면서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일도 많이 했어."

"이계성 할머니가요? 누구한테 협조하거나 전혀 그러실 분이 아닌데?"

"시끄러! 모르면 가만히나 있어! 나중에 내가 뭔 바람이 불었는지 다 지긋지긋 해셔 일을 대충대충 했는데, 그때도 계성 언니는 처음이랑 똑같이 성실하게 일하던 사람이야. 새벽이든 저녁 늦게든 무조건 일만 해댔다니까. 그리고 주말에는 가끔 공사장 같은 데를 다니더니만, 나중에는 나한테 공사장 밥집 장사를 하자고 하더라고. 난 피곤해 죽겠는데, 계성 언니가 이거 돈 된다고 확신을 하더라고. 이제 알겠지? 우리 계성 언니가 똑똑하고 야망도 있는 사람이야. 그때는 가끔은 이 언니가 돈 귀신이 들렸나 걱정할 정도였다니까."

"귀신은 들린 게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인마! 어른이 말하는데 계속 야지를 놓고 있어. 하여튼 내가 계성 언니는 진짜 앞으로 친언니처럼 모시고 살아야지 했지. 근데 내가 나쁜 년이지. 내가 그때 즈음에 결혼을 했는데. 그 시절에는 결혼하면 일은 당연히 그만두는 거였잖아."

"그렇죠. 아무래도 그 시절에는."

"내가 계성 언니한테, 결혼 때문에 우리 일 그만둔다고 하니까. 계성 언니가 축의금이라고 엄청 큰돈 주더라고. 그때 돈으로 거의 집 두 채 값이었어. 난 그거 넙죽 받고 그냥 살았지. 내가 어리고 배은망덕 한 놈이지. 그렇게 계성 언니한테 연락도 안 하고 지냈어. 그렇게 계성 언니랑 서서히 멀어졌지."

"그때부터 이계성 할머니랑 인연이 끊기신 거예요?"

"그건 아닌데... 내가 계성 언니한테 참 염치없는 일을 좀 했어. 계성 언니랑 연락 끊기고 몇 년인가 지났을 때였어. 내가 사촌 언니한테 크게 사기를 당했어. 내가 미친년이지. 돈을 불려준다고 투자하라고 하더라고. 그렇게 조금씩 투자 했는데. 처음 몇 번은 진짜로 돈을 불려다 주더라고. 그래서 이거다 싶어서 남편이랑 우리 아들 결혼시키려고 모아둔 돈까지 싹 다 투자했지. 은행이랑 지인들한테 돈도 빌려서 전부 투자했어. 나도 이제 좀 떵떵거리고 살고 싶었어. 아들도 한몫 잡아주고 싶었고. 근데 딱 그때 사촌 언니라는 년이 돈을 먹고 튄 거야. 아차 싶었지."

"아. 폰지 사기를 당하신 거네요."

"에휴. 온 동네에 수소문하고, 경찰이든 국회든 가서 아무나 양복 입은 사람이면 그냥 붙잡고는 무릎 꿇고 제발 부탁 좀 한다고, 제발 잡아달라고 싹싹 빌었어. 나중에 사촌 언니 년을 잡기는 잡았는데 돈이 없대. 그냥 감옥 가겠다네. 그래도 돈도 못 돌려받았어. 당한 사람이 병신이라고."

"폰지 사기면 돈 돌려 받기도 어려우실 텐데."

"맞아. 스폰지인지 봉지 사기인지 그거. 내 전 재산을 다 날렸어. 거기에 내가 빌린 돈 갚으라고 은행이랑 지인들한테 연락 오고, 나 감옥소 보낸다, 만다 하니까 내가 겁이 나가지고. 하나 가지고 있던 집도 남편 몰래 팔았어. 이젠 남편이나 자식 볼 면목도 없고, 내가 왜 사나 싶더라고. 그냥 죽으려고 했어. 나 되게 열심히 살았는데. 그렇게 아등바등 살고, 남들처럼만 지내고 싶었는데."


강하게만 보였던 3단봉 아줌마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먼저 간 우리 엄마 하늘나라에서 만나는 날에는, 나 이렇게 잘 지냈다고 말하고 싶었어. 근데 다 망가졌지. 그래서 엄마 무덤 가서 죽으려고 농약 사서 엄마 무덤에 갔는데. 계성 언니 생각이 딱 나는 거야. 막연히 보고 싶었어. 엄마 생각도 나고. 나 제일 힘들 때 도와준 게 언니니까.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싶었지. 그래서 예전에 적어둔 전화번호로 전화했지."

"전화를 받자마자 욕을 하시던가요?"

"야! 지금 그렇게 말 할 분위기야?"


3단봉 아줌마는 언제 챙겼는지 3단봉을 다시 손에 쥐었다. 3단봉은 안 무서웠지만, 스스로의 모습이 무섭다. 최근에 느낀 건데 나는 심각함을 참을 수 없게 됐다. 이렇게라도 고통의 이야기를 중간에라도 끊지 않고 계속 듣는다면, 내가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서 억지로 주접을 부리고 살고 있다. 아마 정신병이겠지. 이계성 할머니 일이 끝나면 정신과부터 가야겠다. 아니다. 산업재해 처리를 위해 노동부에 가야 할까. 어금니를 다시 깨문다. 정신 차리자. 망상에서 깨어나자.


"죄송합니다. 저에게 이계성 할머니는 그런 분이라."

"계성 언니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 하여튼 계성 언니가 전화 받고 이야기 듣자마자. 어떤 집 주소를 불러주더니 오래. 그리고 여기서 그냥 살라고 하더라고. 그게 이 집이야. 언니가 그때 나한테 한 말이 뭔지 알아?"

"어떤 말씀을 하셨나요."

"자기가 집을 하나 샀는데. 나한테 그 집에서 그냥 같이 오순도순 살재. 계성 언니가 너는 남편이랑 아들도 같이 살아야 하니, 너가 201호 살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이계성 할머니는 반지하인 102호에 사시고. 아주머니는 201호에 사시라고 하신 거예요?"

"맞아. 살아도 내가 지하방 살겠다고 하는데. 계성 언니가 곧 죽어도 자기가 102호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말하더라고. 이유는 끝내 말 안 해줬는데. 너무 강하게 말 하니까. 어쩔 수가 없더라고. 내 형편도 그렇고. 그리고 계성 언니가 너나 나나 살다 보면 뭐 그럴 수도 있다고. 계성 언니가 너무 덤덤하게 그 말을 하고... 그리고 계성 언니가 나한테 죽지 말라고. 너 돌아가신 엄마가 너 죽으면 얼마나 슬퍼하시겠냐고. 그때 정신이 퍼뜩 들더라고."


3단봉 아줌마는 3단봉을 다시 소파 위에 내려놓고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때부터 계성 언니랑 건설현장 함바집에서 일하고, 시간 되는 대로 파출부도 나갔어. 돈도 돈인데. 제정신으로 살려면 일을 해야겠더라. 언니한테 은혜도 빨리 갚고 싶었고. 그렇게 살아냈어. 나 지금 살아있는 것도 다 계성 언니 덕분이야. 나중에 모은 돈 박박 긁어서 계성 언니한테 가지고 갔어. 은혜는 갚아야 하니까. 근데 계성 언니가 돈을 안 받겠다고 화를 엄청 내는 거야. 자기는 필요 없다고. 그러더니 계성 언니가 돈 대신에 부탁이 있다고 하면서 내 손을 꼭 잡았어. 그리고 이 집 사람들 좀 모아달라고 하더라고."

"여기 계신 분들 전부요?"

"그때 102호는 없었고. 202호 할아버지, 101호 아저씨, 그리고 나. 이렇게 이 집에 살고 있었어. 그러고는 계성 언니가 자기가 이제 어디로 떠날 텐데. 자기를 찾지 말래.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한테 월세 안 받을 텐데, 대신에 다들 이 집 관리 잘 하면서, 자기 대신 102호에 들어올 사람 챙겨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고. 그리고 자기 죽으면 102호 한테 집을 넘길 계획인데 이유나 그런 거 묻지 말라고. 그냥 그렇게들 알고 있고. 무슨 문제가 생겨도 자기 뜻대로 하라고 딱 잘라 말하더라."

"이계성 할머니가 정말 아무런 이유도 말을 안 해주셨나요?"

"응. 내가 뭘 더 물어보려고 하니까. 막 호랑이 눈을 뜨고 물어보지 말라고 하더라고. 난 언니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지 처음 알았어. 그리고 계성 언니가 내 질문 딱 자르더니, 언니가 마지막으로 이 집 사는 사람들이랑 절대 싸우지 말고 서로 잘 지내래. 지금처럼 사이좋게 반쯤은 가족처럼 지내래. 딱 지금처럼. 그게 자기 마지막 명령이고, 부탁이래. 그 약속 안 지키면 다 내쫓을 거고, 안 받았던 월세도 전부 다 받아낼 거라고 엄포를 놓더라고. 그리고 더 이상 토 달지 말라고 하고는 며칠 뒤에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어."

"그게 마지막이었나요?"

"맞아. 그게 내가 계성 언니를 본 마지막 날이야. 이렇게 착하고, 똑 부러진 사람이 계성 언니야. 근데 이렇게 돌아오면 어떻게 해... 우리 계성 언니 불쌍해서 어떻게 해."

"그럼. 지금 이 집은 이계성 할머니가 지은 집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202호 할아버지가 한참 뜸을 들였다.


"이 집은 40년 정도 전에 내가 지었어요. 이계성 씨는 이 집에 세입자로 들어왔어요. 이계성 씨가 처음부터 좀 이상하기는 했어요. 이계성 씨가 이 집 들어올 때 한겨울이었는데 그냥 보따리 두 개 정도만 들고 와서는 당장 오늘부터 살겠다고 하더이다. 옷도 겨울옷도 아니었어요. 그리고 이계성 씨가 이상했던 게. 정오쯤 되면 2시간인가 어디 나가는데, 그 시간에 나갔다 오는 거 빼고는 집 밖을 아예 나오지 않았어요. 이상하다 싶기는 했지요."

"점심에는 일을 가셨던 거예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요. 이계성 씨는 동네 사람들이랑 말도 안 섞고, 월세도 말일 새벽에 우리 집 문 앞에 봉투로만 놓아두고 갔지요. 정신병이 있나 싶어서 걱정이었어요. 나도 집 짓고 이제 집주인 노릇하고 싶은데 세입자가 큰 문제 일으키면 내 입장도 곤란해지잖소. 그래서 이야기라도 해볼까 싶어서 이계성 씨 방인 102호에 가봤어요. 근데 집안 꼴도 말이 아니고 사람도 아주 폐인이 다 되어 있었어요."

"이계성 할머니가요?"

"그래요. 정말 엉망이었어요. 이건 안 되겠다 싶어서, 이계성 씨 살리려고 우리 안사람이랑 이계성 씨를 좀 챙겨줬지요. 이렇게 보여도 나나 마누라나 다 기독교인이거든. 안쓰러운 마음에 이계성 씨한테 먹을 것도 해주고. 옷도 구해도 주고, 날 춥고 하면 가서 새벽에 몰래 연탄도 넣어줬지요. 근데 어느 날인가. 이계성 씨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계속 웃고 다니더라고요."

"정신질환이 발현이 된 건가요?"


그 점잖던 202호 할아버지가 나를 노려보았다. 혼날까 봐 농담이었다는 듯이 헤식헤식 웃고 고개를 숙였다.


"이계성 씨가 그때부터 일을 열심히 다녔어요. 그것도 주일도 없이, 밤낮도 없이 계속 일만 하더이다."

"이계성 할머니가 왜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셨나요?"

"이유는 역시 모르겠지만, 이계성 씨는 새벽에 나갔다가. 점심 때 잠깐 집 들어와서 쉬고, 저녁에 어딜 또 나갔지요. 주말도 없이 그저 일만 계속 계속 한다는 걸 빼면 내가 아는 게 없었어요. 심지어 이계성 씨가 얼마나 늦게 오는지, 퇴근하는 건 내가 보지도 못했어요. 사람이 저러다 죽겠구나 싶기도 했지요."

"맞아! 계성 언니는 돈이 뭐가 그리 좋은지 오직 일만 했던 사람이야. 게다가 계성 언니는 자기한테 단돈 십 원도 안 써. 밥도 그냥 대충 때우기만 했어. 먹는 것도 함바집에서 반찬 남은 걸로만 먹으면서 돈을 아꼈다니까. 그렇게나 고생한 사람이 계성 언니야."

"그러면 아주머니나 할아버님은 이계성 할머니가 그렇게나 열심히 일을 했던 이유를 모르시는 거죠?"

"잘 모르겠어요. 다만 이계성 씨가 정말 거짓말처럼 하루아침에 사람이 아예 달라져서 일 했던 것만 기억해요. 나야 뭐 사람 행복해 하니까 기분도 좋고.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고, 그냥 두었지요. 이계성 씨는 월세도 안 밀리고 집도 깨끗이 쓰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이계성 씨 열심히 사는 모습 보니 정이 더 가더라고요. 열심히 사는 사람 보면 괜히 더 도와주고 싶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이계성 씨한테 이제 돈도 좀 모았을 텐데, 여기 반지하 살지 말고 좋은 곳 살면 좋겠다 싶었지요. 그래서 제가 주변 복덕방 뒤져서 좋은 조건의 집도 소개해 줬어요. 근데 이계성 씨가 무조건 여기 살고 싶다고 하길래. 뭐 달리 강요하는 것도 이상해서 알았다 했어요."

"이계성 할머니가 문제를 일으키신 적은 없나요? 싸움을 걸었다던가. 소리를 지른다던가. 공무원을 폭행했다던가."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이계성 씨한테 여자 혼자 사는 게 영 의뭉스럽다고 없는 말 지어내서 험담하고 다니는 동네 사람들은 있었지요. 근데 내가 이계성 씨 열심히 사는 걸 뻔히 아는데. 그걸 어떻게 그냥 두나. 나랑 안사람이랑 그런 시정잡배 같은 놈들한테 헛소문 내고 다니지 말라고 시비를 건 적은 많지요. 나나 우리 안사람이나 이계성 씨랑 대화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같은 집 산다는 게 그런 거잖아요. 넓게 보면 가족이니까요. 그래서 나랑 우리 안사람이 이계성 씨 지키려고 동네 싸움꾼이 됐었지요."


202호 할아버지는 행복한 회상을 음미하듯 인자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202호 할아버님이랑 배우자분도 좋은 분이시네요. 집주인이면 동네에서 해코지 당할까 싸우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허허허. 좋게 봐주니 고맙네요. 저보다는 제 안사람이 참 바른사람이었어요. 근데 주님이 무슨 생각이셨는데, 그렇게 착한 안사람이 나보다 먼저 갔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못 해준 게 너무 많아서 미안해요. 나 때문에 안사람도 고생을 많이 했지요. 나도 작게 건축 일 하며 돈 좀 만졌는데, IMF 때 쫄딱 망했거든요. 그때 안사람도 한푼이라도 벌겠다고 새벽부터 일 나가고 그랬는데. 새벽에 차 사고를 당했어요. 병원에 오래 누워있었어요. 뭐 급하다고 그렇게 빨리 갔나... 결국 병원비랑 사업 부도 막는 것 때문에 재산을 다 처분해야 했지요. 그래서 이 집도 팔려고 결심했어요. 그래도 세입자들한테 집주인 바뀔 거라고 미리 설명은 해줘야 하니, 이계성 씨한테 사정을 말해주었지요. 근데 이계성 씨가 그 말 듣고 며칠 안 지나서 자기가 이 집 사겠다고 복덕방을 같이 가자고 하더라고요."

"이계성 할머니가 이 집을 사겠다고요?"

"맞아요. 자기가 이 집을 사면, 그 돈으로 나 사업이나 우리 안사람 병원비 급한 대로 해결하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그때 이계성 씨가 현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집 가격이나 병원비도 솔직하게 말해줬어요. 그리고 이계성 씨한테 마음만으로도 고맙다고 말했는데. 이계성 씨가 자기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러더니 이계성 씨가 이 집을 시세보다도 훨씬 더 비싸게 가격을 쳐줬어요. 염치는 없지만 나도 사정이 급해서 이계성 씨한테 집을 팔았어요. 그래서 그 돈으로 사업에 급한 돈 막고, 안사람도 잘 보낼 수 있었지. 그렇게 사업도 정리하고 이계성 씨한테 내가 고향 내려가 일 하면서 여기 살게 해준 값도 갚겠다 말했지요. 근데 이계성 씨가 나한테 그냥 여기에 계속 사시라고 하더이다. 다 같이 그냥 살던 대로 살고 싶다고. 서울 사시면서 천천히 갚으시라고. 근데 또 나중에 돈 갚으려고 하니 나한테도 성질 버럭버럭 내면서 안 받더라고요. 내 사정 봐준 거겠지. 참 고마워. 참..."

"그래서 할아버님이 지금까지 여기에 사시게 되신 거예요?"

"맞아요. 이계성 씨가 나한테 월세도 안 받을 테니까. 그냥 사시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고마워서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했지요. 안 그래도 우리 안사람이랑 추억이 많은 집이라서 이 집 나가는 게 내심 너무 슬펐거든요."

"그렇죠. 공간에는 기억이 담겨 있으니까요."

"근데 나도 염치는 있으니까. 이계성 씨한테 내가 102호 살 테니, 이계성 씨는 202호 살라고 했어요. 그게 도리에 맞다고. 근데 이계성 씨가 단박에 거절하더라고요. 자기는 102호에 살아야만 한다고. 이유는 묻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정말 단호했어. 그래서 몇 번이고 다시 말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이계성 씨한테 102호 말고, 202호 살라고 했지요. 나도 그게 마음이 편하다고. 근데 어느날은 이계성 씨가 나한테 한 번만 더 그런 말 하면, 날 내쫓는다고 하더라고요. 제발 그만하시라고. 그때는 너무 불같이 화를 내서 더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내가 아는 이계성 할머니와 너무 다른 이야기들이다. 혼란스럽다. 내가 무슨 착란증세가 있는 걸까. 202호 할아버지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201호랑 똑같아요. 통보를 받았지요. 이계성 씨가 사라지고 개인적으로 몇 번 찾아보려 했는데, 이계성 씨를 도저히 못 찾았어요. 어쩔 수 없으니.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고 지냈지요. 근데 이계성 씨가... 참..."


101호 아저씨가 불안해 보였다. 다들 한 마디씩 하니 101호 아저씨가 이번에 자기 사연을 말할 차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101호 선생님은 이계성 할머니와 어떤 관계였나요?"

"마... 말하고 싶지... 않아요..."


101호 아저씨는 땀을 많이 흘렸다. 분명히 무슨 사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


"다들 말씀을 하셨잖아요. 101호 아저씨 사연도 듣고 싶어요."

"그냥... 비슷해요..."


자기한테 불리한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 걸까. 조금 더 추궁 해야겠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계성 할..."

"공무원분. 그만하시는 게 어떠실까요? 101호가 말을 하기 벅찰 수도 있으니까요. 또 101호가 사람이 아주 좋아요. 눈 오면 제일 먼저 나가서 눈 쓸고. 쓰레기 무단 투기된 거 있으면 항상 101호가 치웁니다. 의심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101호도 다 말 하지 못할 사연이 있을 거고요."


202호 할아버지가 101호 아저씨를 보호했다.


"그래. 사람이 다 사연이 있지. 101호가 죄를 지을 사람도 아니고. 아무렴 어때. 지금 우리랑 이렇게 잘살고 있는데. 그치 101호?"

"네... 말주변이 없...어서요. 이계성 아주머니한테... 제가... 잘못한 건 없지만. 잘... 해드린 것도 없어서... 죄송해서요..."


102호 아주머니는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101호 아저씨한테 뭘 더 물어보고 싶지 않다. 다 이유가 있겠지. 서로 저렇게 위하고 사는데. 저 사람들이 그렇다면. 내가 굳이 저 모습을 깨고 싶지 않다. 사람들에게는 알 필요도 없고, 굳이 알면 안 좋은 이야기들도 있다. 가끔은 그걸 넘어가는 게 행복일 때도 있다. 지금이 그런 상황일 테지.


"알겠습니다. 다 이유가 있겠죠."


나도 한번 싱긋 웃는다.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계성 할머니는 딱딱한 사람이었으나 생각이 깊었고, 사람을 도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계성 할머니는 누가 봐도 성실히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이계성 할머니는 여기 있는 사람들과 인연이 있었고, 월세를 받지 않았다. 더 나아가 이계성 할머니는 이 집 사람들에게 앞으로도 월세를 받지 않을 테니 이 집에 사는 사람들끼리 잘 지내라는 천사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사라졌다가. 나와의 하루를 스쳐 가 영원히 떠났다.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계성 할머니의 이야기가 끊긴 지점은 102호다. 이계성 할머니는 102호 아주머니를 챙겨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고 102호 아주머니와 이계성의 이야기는 3단봉 아줌마와 202호 할아버지도 모르는 눈치다. 게다가 이계성 할머니가 임대계약서를 작성한 집은 오직 102호뿐이었다. 자신이 도왔던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부탁이 102호에 살게 될 사람을 챙겨달라던 이계성 할머니인데, 102호만 월세를 받았다는 것도 이상하다. 무언가 이야기가 있다. 결국 이계성 할머니 이야기의 끝은 102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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