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나와 저들의 감정적 괴리감을 이해할 수 없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22화. '나와 저들의 감정적 괴리감을 이해할 수 없다.'
6부.
22.
한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새벽, 강도, 변태, 이계성, 아침밥. 어떤 연결도 없는 단어들이 연 하루였기에 누구도 할 말이 없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저기. 아주머니. 제가 추워서 그런데 따뜻한 물 한 잔만 부탁드릴게요."
3단봉 아줌마는 기가 차단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3단봉 아줌마는 딱히 거부할 명분은 없었는지,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주었다.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따뜻한 물 한 잔을 손에 쥐며 추위와 놀람을 달랬다. 그동안 말이 없었던 202호 할아버지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인사가 늦었네요. 난 여기 202호 사는 사람인데. 이계성 씨가... 소천하셨다는 거죠?"
"맞습니다."
"그렇게 됐나요. 거짓말을 하실 이유는 없으실 거고. 이거 참..."
101호 아저씨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면... 공무원 아저씨는... 여기 왜 온 거예요?"
"이계성 할머니가 마지막에 유언처럼 저한테 부탁하신 게 있어서요. 근데 음... 원래 이계성 할머니가 전달해 달라던 사람한테는 드리지 못하게 됐는데. 차선책으로 이 집 102호에는 전달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다짜고짜 계성 언니가 죽었다는 말 들은 것도 당황스러운데. 무슨 말을 그렇게 중언부언해. 당신 진짜 공무원 맞아?"
3단봉 아줌마가 목소리를 높였다. 의심하는 게 당연한 처사다. 지금 나의 행동거지는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까. 3단봉 아줌마가 말을 이었다.
"당신 계성 언니 돈 노리는 거야? 그런 거면 당신 진짜 공무원이어도 가만 안 둬. 우리 계성 언니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데!"
눈을 꾹 감고 있던 202호 할아버지가 몸을 돌려 내 양어깨를 잡았다.
"그러니까. 이계성 씨가 돌아가셨고. 자네는 담당 공무원인데, 이계성 씨가 유언을 지키고 싶어서 여기에 왔다. 이건가요?"
"맞습니다. 이게 어디까지 말씀을 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고민을 해본다. 개인정보 보호는 공무원의 의무다. 말을 자칫 잘못하면 나는 죄를 짓는 거다. 다만 지금 이 마당에 공무원의 의무까지 지키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이계성 할머니의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끝내고 싶은 이유도 이제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끝내고 싶다. 그래도 일이 더 커지면 안 되니, 이계성 할머니가 마지막에 무언가를 더 쓰려고 했다는 이야기만 빼고 말을 하자.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든다. 이계성 할머니에서 일기 부분을 펼쳐 202호 할아버지에게 건넨다.
"이계성 할머니는 자기 딸에게 이 공책을 전달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근데 공책 전달은 둘째 치고 이계성 할머니 따님이 이계성 할머니 장례 절차 인수조차 거부해서 이계성 할머니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 드릴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공책 내용에 이 집 주소가 있길래. 여기에라도 전달 해야겠다 싶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공무원분이 고생이 많으셨겠군요."
"아닙니다. 여기에라도 공책을 전달하는 게 이계성 할머니의 마지막 부탁을 이루어 드리는 게 아닐까 싶어서요. 그게 제가 이 집에 온 이유입니다."
202호 할아버지는 공책을 3단봉 아줌마에게 건넸다. 3단봉 아줌마는 101호 아저씨에게. 101호 아저씨는 102호 아주머니에게. 그렇게 이계성 할머니의 부고를 처음으로 알린다. 3단봉 아줌마는 거실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계성 언니! 우리 계성 언니 불쌍해서 어떻게 해. 우리 계성 언니! 언니 어떻게 해!"
3단봉 아줌마는 짐승처럼 주억거리며 울음을 토해냈다. 202호 할아버지와 101호 아저씨도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102호 아주머니는 딸을 꽉 끌어안고는 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어색하다. 나에게 이계성 할머니는 분노 그 자체인 인간이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나는 이계성 할머니의 죽음에 일종의 해방감까지 느꼈다. 그런데 이 집 사람들은 이계성 할머니의 죽음에 비통함을 느끼고 있다. 이계성은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닐 텐데. 나와 저들의 감정적 괴리감을 이해할 수 없다. 101호 아저씨가 내 팔을 붙잡았다. 투박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얼굴에는 눈물과 콧물이 가득했다.
"담당 공무원 선생님께서... 귀한 발걸음 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이계성 아주머니를 위해서 노력해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도 좀 마무리했으면 하는 일도 있어서요,"
"혹시 이계성... 할머니의 사인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저도 의사가 아니라서 정확하게 말씀은 못 드리는데. 집에 쓰러져 계시는 걸 저희가 발견해서 병원에 이송했는데, 이미 병환이 깊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암이셨다고."
"그렇군요... 그랬군요. 하아..."
"저희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태여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공무원 선생님이 이렇게 부고만 알려 주셔도... 저희가 감사하죠... 혹시 장례는 어디서 치르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가시는 길이라도 찾아뵈어야죠."
"이계성 할머니는 장례 인수자가 없어서 정식 장례를 치르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상황을 좀 봐야겠지만 장례를 치른다 해도 공영 장례식장에서 약식으로 치를 예정입니다."
202호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선다.
"아니. 그건 안 될 일이에요. 내가 장례를 인수할게요. 지금 바로 출발합시다. 이계성 씨를 이렇게 보낼 수 없어요. 공무원분이 앞장 서주세요."
"선생님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일단 제가 가족이 아닌 사람이 장례를 인수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할 것 같아요. 게다가 병원 쪽에서 어디까지 절차를 진행 시켰는지 알 수도 없고요. 일단 상황을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당장 움직이자는 말입니다. 돈이나 이런 거라면 내가 낼 수 있어요. 일손 부족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나설 수 있어요. 이계성 씨가 우리한테 얼마나 고마운 양반인데. 뭐든지 다 할 테니. 공무원분이 조금만 더 도와주세요. 제가 거마비라도 챙겨드릴 테니까. 꼭 좀 부탁드립니다."
신사동 사람들은 강병1동 최악의 갱스터 이계성 할머니에 대해 왜 이렇게 호의적일까. 이계성 할머니가 하던 짓들을 돌이켜 본다. 역시나 이 집 사람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아니다. 혹시 이 집 사람들이 이계성보다 더 한 악당들이지 않을까. 이계성 할머니가 유가족 없이 사망했고, 그렇다면 이계성 할머니 소유의 이 집의 소유권은..? 잡았다. 이 나쁜 놈들. 역시 사람은 믿는 게 아니다. 뇌를 다시 업무용으로 세팅한다. 정신을 차리자. 나는 여기서 빠져야 한다. 역시 이계성 할머니 일에 개입하는 게 잘못된 일이었을까.
"할아버님. 일단 진정하시고요. 할아버님이 장례 절차를 인수하시고자 하면, 우선 법적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는지를 알아보셔야 하잖아요. 제가 이계성 할머니 돌아가신 병원 전화번호를 드릴게요. 그리고 할아버님이 병원에 전화하셔서 장례를 인수하려면 법적 문제가 있는지, 어떻게 인수할 수 있는지를 병원 원무과에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스스로 감탄할 만큼 능숙하게 잘 잘라냈다. 대한민국에서 공무원 나부랭이로 산다는 건, 책임을 지지 않는 가장 젠틀한 방법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줄 안다는 걸 의미한다. 그래야 내가 다치지 않고 살 수 있다. 나의 마술과 같은 말솜씨 덕분인지 202호 할아버지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하아. 당최 무슨 말인지... 요새는 하도 말들을 길게 해서, 난 들어도 이해를 못 하겠어요. 모든 게 다 어려워져 가고만 있어서요. 제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미안합니다. 그러면 여기 사는 사람들이 이계성 씨 빈소에 조문이라도 하게 빈소만 알려주셔도 좋습니다."
조용히 딸을 안고 있던 102호 아주머니가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 계신 분들은 계성 이모한테 마지막 인사를 드릴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래요. 부탁드릴게요. 그냥 좀...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