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그렇게 가난은 정밀하게 잘 숨겨져 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21화. '그렇게 가난은 정밀하게 잘 숨겨져 있다.'
6부.
21.
가방에서 이계성 할머니 명의 임대계약서 사본을 꺼내 펼친다. 지도 어플리케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안내를 따라 걷는다. 좀 앉아서 쉬었다 갈까 했지만. 한번 앉으면 이제는 걸을 수 없을 게 분명하다. 쉬지 않고 계속 걸어야 한다. 신기하게도 정신만큼은 멀쩡하다. 무너질 듯한 몸과 멀쩡한 정신 사이의 간극 속에서 묘함을 느낀다.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한다. 나의 위치를 보여주는 검은 점과, 지도 어플리케이션에 찍어둔 목적지 위치가 하나로 겹쳐 보인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본다. 드디어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XXX-XX.'이다. 이제 102호만 찾으면 된다.
아주 오래된 연립주택이다. 집의 정문은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높고도 두꺼운 철문이었다. 문을 열어본다. "끼익" 소리가 크게 난다. 이 정도 소리라면 초인종도 필요 없을 것 같다. 정문을 지나 야트막한 계단을 오른다. 현관 앞을 보니 201호로 팻말이 붙어있다. 높이를 보면 분명 1층이지만 당당하게 201호로 기재하다니. 게다가 내가 찾는 102호도 아니다. 201호 계단 오른편에는 또 하나의 계단이 있다. 조금 더 경사가 높아진 계단을 올라간다. 202호가 있다. 201호에서 한 층을 더 올라갔는데 어째서 202호일까. 더 올라갈 계단은 없다. 그렇다면 102호가 어디 있을지는 뻔하다. 우리처럼 숨겨진 가난을 추적해야 하는 일을 하는 노동자들만이 알고 있는 퍼즐이다.
뒤돌아 계단을 내려온다. 그리고 곧장 대문 밖으로 나온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일을 하다 보면 알게 되는 부동산의 비밀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101호와 102호 등등은 집의 정문이 아닌 쪽문을 통해야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게 그것이다. 아마도 집주인들이 땅에 붙어 사는 101호, 102호들의 궁상을 보고 싶지 않아서 이들을 집 뒤로 숨긴 게 아닐까. 원래 가진 사람들에게는 가난은 바퀴벌레처럼 세상에 존재하지만 내 눈앞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지 않을가. 그래서 집주인들은 101호, 102호들은 반지하임에도 호수 앞에 지하를 의미하는 'B'를 붙이지 않았고, 눈에 보이지 않도록 방들의 입구를 집 뒤로 내었을 거다. 그마저도 마주치기도 민망했는지 정문이 아닌 쪽문을 만들었으리라. 그렇게 가난은 정밀하게 잘 숨겨져 있다.
주택의 양 끝을 살펴본다. 역시 주택의 왼편 끝에 쪽문이 있다. 쪽문은 정문과 달리 높이는 허리춤에나 닿을 정도로 참 낮았고. 문은 가벼웠다. 쪽문을 열고 들어간다. 쪽문 앞에 놓인 길게 난 통로는 어두웠다. 새벽이 주는 빛은 이곳까지 닿지 못했다. 어둠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아예 앞이 보이지 않았다. 휴대전화로 손전등을 켠다. 어둠을 헤치고 직진하다가 우회전 한 번. 그리고 또 직진. 이제는 빛이라고는 아예 들어오지 않는 공간이다. 랜턴을 비추어 본다. 102호다. 여기 102호 문 너머에 이계성의 이야기가 있다.
문을 두드려 볼까. 이제야 아침 6시인데. 경찰에 신고당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깊게는 생각 말자. 고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행동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아진다. 우선 챙겨온 공무원증을 목에 건다. 심호흡을 한다. 문을 두드릴까. 역시 못하겠다. 생각 해보면 새벽이 문제가 아니다. 다시 시시하지만 묵직한 현실을 마주한다. 내가 102호 문을 연다고 해서 이계성 할머니의 이야기를 알아낼 수 있을까. 또 내가 이계성 할머니의 이야기를 안다고 해서 내 삶이 바뀌기라도 할까.
따지자면 나한테 이득 될 게 없는 상황인 게 사실이다. 게다가 새벽부터 남의 집 문을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두드린다? 심지어 그게 공무원이다? 그때부터 내가 상대해야 하는 건 이계성 할머니가 아니라 경찰과 감사과 직원들이다. 간만에 머리가 아프다. 지금이라도 다 잊고 국밥 한 그릇 먹고, 평범하게 출근할까. 102호 문에 손을 얹어본다. 당연하지만 차갑다. 다만 당연하지 않게도 똥궁빌라 이계성 할머니 집 문에 처음 손을 얹었을 때의 그 감각과 똑같다.
"미친 변태다!!!"
뒤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아줌마가 3단봉을 펼쳐 들고, 검도 자세를 취한 채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 뒤에는 한 할아버지가 당장에라도 신고하겠다는 듯이 휴대전화를 누르고 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내 설명을 듣기나 할까. 듣는다고 해도 지금 내 모습은 간첩보다도 수상할 텐데. 우선 사태를 진정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찰은 둘째 치고, 저 3단봉이 내 머리를 후려칠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 선생님 그게 아니라!"
"뭐가 아니야! 이 새벽에 남의 집 문에 손 문대고 있는데. 뭐가 변태가 아니야!"
"일단 저는 변태는 아니고요."
"시끄러! 이 새벽에, 대문 쪽에서 소리가 나길래 창문으로 보니까. 201호랑 202호 스윽 살피고는 네가 바퀴벌레 마냥 쪽문으로 들어가는 거 다 봤어!"
"선생님 그게 아니라. 주소를 먼저 확인..."
"치밀도 하지. 윗집들 자는지 먼저 확인까지 한 거야? 이거 완전히 전문 변태구만! 무슨 변태 짓을 하려고 여기로 기어들어와? 이 미친 변태. 102호에 손 문대면서 뭔 짓 하려고 한 거야!"
감상에 젖어 손을 얹은 건데, 왜 굳이 손을 문댄다고 표현할까. 역시 내 생김새가 문제려나. 빠르게 머리를 굴려본다. 다만 아무리 생각 해도 방법이 없다. 내가 봐도 내가 이상한데 뭘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너 이 새끼 딱 서 있어! 경찰 부를 거니까. 도망 못 가! 이제 곧 여기 사는 사람들 다 튀어나올 테니까 도망갈 수도 없어. 그대로 꼼짝 말고 있어!"
뒤에 있던 할아버지도 말을 거들었다.
"거기 자네. 거기 그대로 있는 게 좋을 겁니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바로 신고할 거요."
완전히 조졌다. 내가 찾아온 102호보다 더 안쪽에 있는 101호에서도 사람이 나왔다. 101호에서 나온 사람은 50대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였다. 101호 아저씨는 집에서 주춤주춤 걸어 나왔다. 다리를 절며 나오는 모습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아유... 이 새벽부터... 무슨 일이에요..."
"101호! 얼른 경찰에 신고해. 인마 이거 완전 변태 새끼야! 202호 할아버지! 얼른 경찰에 신고해요!"
"알겠어요..."
"알았네."
101호 아저씨는 놀란 건지, 나를 놀리는 건지, 아니면 3단봉 아줌마 화를 돋우려는 건지 말끝을 계속 늘였다. 아니다. 지금 말투가 문제가 아니다. 이제 내 신세는 어디까지 망가질까. 아니 근데 절도범이나 노상 방뇨도 있는데 왜 처음부터 변태로 몰리는 걸까. 아. 잘생겨지고 싶다. 그건 그렇고. 진짜 내가 변태면 이렇게 공무원증을 차겠는... 아! 난 공무원증을 가지고 있다. 대한독립 만세. 참자. 어금니를 꽉 깨문다. 잇몸 전체에 통증이 퍼진다. 이제는 어금니가 마모되어 없어지지 않았을까. 임플란트 박을 돈은 대한민국 공무원에게 없다. 하지만 공무원증인 있지.
"아주머니!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공무원증 있어요! 저 동구청 강병1동 주민센터 직원이에요. 공무원증 보여드릴게요!"
공무원증을 목에서 빼내어 대치 중인 3단봉 아줌마에게 제시한다. 3단봉 아줌마는 주춤했다. 역시 관공서의 힘은 강하다. 3단봉 아줌마는 내 공무원증을 요리조리 돌려보았다.
"동구청? 이 새끼 이거 위조를 해? 야 인마 여기가 강남구인데 동구청 공무원이 여길 왜 와? 공무원 사칭까지? 너 인마 잘 걸렸다. 내가 인마 배운 건 없어도 눈치가 127단인 사람이야!"
하긴 새벽 6시에 강남구청 직원이 여기 있는 것도 이상한데. 다른 구청 직원이 여기 있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건 내가 봐도 범죄다. 그냥 포기할까. 어쩌면 변태가 되어 몽둥이로 몇 대 맞고 끝내는 게 나한테 이익일 수도 있다. 지금 이 상태면 공무원에서 잘릴 수도 있다. 순간 이계성 할머니가 나한테 공무원 그만두라고 했던 사자후를 떠올린다. 이계성 할머니. 할머니 뜻대로 되었습니다. 만족하십니까.
"다들 무슨 일이세요?"
102호의 문이 열렸다.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와. 하필 또 여기 여자가 살다니. 지금은 누가 봐도 난 변태다. 망했다. 망했다는 말이 아까울 만큼 망했다.
"엄마. 뭐야? 201호 아줌마랑 101호 아저씨는 왜 왔어? 오늘은 아침부터 다 같이 고기 구워 먹는 날이야? 어? 아저씨는 누구세요?"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눈을 비비며 102호 아주머니 뒤에서 나왔다. 와... 아이까지 나오네? 내 인생은 조졌다. 다만 아이는 나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진정됐다. 요지경 세상 속에서 변태로 추정되는 아저씨에게 웃음을 보여주는 건 아이밖에 없을 거다. 아직 세상에 배신당하지 않은 저 미소가 안심됐다. 이제 방법이 없다. 정면 돌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이계성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저는 이계성 할머니 담당 공무원인데 할머니 부탁을 들어드리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목적 외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습니다."
다들 흠칫 놀라 행동을 멈춘다. 역시 가끔은 정직하게 본론부터 말해야 한다.
"이계성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전 그 일 때문에 왔어요. 이계성 할머니가 생전에 저한테 부탁하신 게 있는데. 그걸 전달 하러 온 겁니다."
다들 주춤하는 눈치다. 3단봉 아줌마가 3단봉을 드디어 내렸다. 살았다.
"이계성? 계성 언니? 계성 언니가 죽었다고?"
3단봉 아줌마는 눈물을 흘렸다. 말을 잇지 못하는 3단봉 아줌마 대신 101호 아저씨가 나에게 다가온다.
"그럼... 당신 공무원은... 맞는 거죠..?"
"맞아요. 저 공무원이에요. 동구청에 전화하셔서 확인하셔도 좋고요. 제가 동구청 강병1동 주민센터 소속인데, 강병1동 홈페이지 들어가셔서 제 이름 확인하실 수도 있어요."
101호 아저씨는 차분히 스마트폰으로 동구청과 강병1동 홈페이지를 검색했다. 101호 아저씨가 말은 어눌해도, 침착하고 두뇌회전이 빠른 모양이었다. 101호 아저씨는 3단봉 아줌마가 쥐고 있던 내 공무원증을 받아서 공무원증을 한 번 보고, 내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러고는 3단봉 아줌마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3단봉 아줌마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3단봉을 집어넣었다.
"이 새벽에 놀랐잖아요. 처음부터 말을 하지. 계성 언니 일이라고 먼저 말을 했으면 이런 일도 없지!"
아줌마가 처음부터 3단봉을 들지 말지.
"이계성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좀 급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경황이 없어서."
"계성 언니 이야기면 우리도 좀 들어야겠어. 이 집 사람들도 같은 마음일 테니. 다들 따라 와. 우리 집으로 올라가서 이야기 하자."
엉거주춤 3단봉 아줌마를 따라 쪽문을 지나, 거대한 정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가 201호로 들어간다. 101호 아저씨, 102호 아주머니와 딸. 그리고 3단봉 아줌마 뒤에 있어서 잘 안 보였던, 뭐 202호 살겠지 싶은 할아버지까지 모두 201호 거실에 모여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