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신사동의 사회학'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20화. '신사동의 사회학'
5부.
20.
편의점에서 쉰 덕분인지 추위가 좀 가셨다. 다만 지친 다리의 감각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다. 더 걷는 건 무리다. 강남역에서 신사동이면 어차피 택시로 기본요금일 테니 사거리로 나와 택시를 잡는다.
"기사님. 신사동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금방 모셔다 드릴게욧."
'욧'이라니. 나만 모르는 요새 유행이 있나? 아니면 이 택시 운전기사님의 자녀가 119 구급대원인 걸까.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웃어서 긴장이 풀린 건지, 온몸이 무너진다. 그리고 기절하듯 잠든다. 어차피 10분이면 도착하니. 잠깐 눈을 감는다.
"손님! 손님! 내리셔야 해욧!"
정신이 들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다. 몸에 한계가 오긴 온 모양이다. 그래도 요금은 올라가고 있을 터.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인다. 점점 몸의 감각이 돌아온다. 강남역에서 신사동이면 아주 잠깐 잠을 잔 걸 텐데 몸이 제법 가볍다. 매일매일 이렇게 택시에서 10분만 자볼까. 기사님께 카드를 건네고, 창밖을 본다. 내가 아는 신사동이 아니었다.
"기사님. 신사동 맞아요? 이상한데?"
"신사동 맞아욧. 은평구 신사동! 딱 손님 얼굴 보아하니. 강남구 신사동 느낌은 아니고. 그렇다고 관악구 신사동 스타일도 아니고. 손님은 딱 은평구 신사동 스타일이더라고욧. 근데 또 혹시 몰라서 내가 논현역 넘어갈 때 손님한테 가시는 곳이 은평구 신사동 맞냐고 내가 물어봤잖아욧. 그때 손님이 정확히 맞다면서욧."
인생사 안 되려면 모든 게 다 안 된다. 차분해졌던 기분이 다시 부정적 흐름을 타고 마이너스가 된다. 지난 몇 시간 동안 내가 느낀 약간의 충만함이 무너진다.
"아저씨. 강남역에서 신사동 가자면. 당연히 강남구 신사동이지. 은평구 신사동? 왜 여기로 사람을 데리고 와! 아저씨 미쳤어? 말투도 마음에 안 드는 거 참았더니만."
"지금 뭐라고 했어욧? 손님. 손님이 은평구 신사동 맞다면서욧. 그리고 반말을?"
"그리고 내가 무슨 은평구 신사동 스타일이야! 딱 봐도 강남구 신사동이지! 경찰 불러. 나 이거 돈 못 내. 완전 납치잖아."
"손님! 내가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택시 안에 블랙박스를 목소리 녹취까지 되게 만들어 놓았어욧. 경찰서 갈까욧? 업무방해죄로 신고 할까욧?"
아차. 블랙박스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면 기사님의 말이 사실일 거다. 게다가 난 공무원이다. 이런 구설수에 오르면 나한테 돌아오는 불이익이 너무 크다. 이럴 때는 내가 봐주는 척 빨리 도망가는 게 상책이다. 짐짓 내가 피해를 보았다는 듯한 표정을 한다.
"돼... 됐어요! 내 참 더러워서."
택시 기사님한테 카드를 엉거주춤 돌려받고 차에서 내린다. 욧 기사님이 떠나갔다. 기사님한테 미안하다. 나도 누군가의 하루를 망쳤구나. 그리고 민망하다. 내가 더 민망한 이유는 실제로 내가 은평구 신사동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지금의 은평구 신사동은 내 추억 속 골목들은 다 밀려 버리고, 이제 번듯한 아파트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는 강남구 신사동과 큰 차이도 없는 모습이다. 은평구 신사동 특유의 옛날 정취와 시간은 내 얼굴에만 남아있다. 내 얼굴도 강남구 신사동처럼 재개발을 해야 할까.
정신을 차리자.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시간을 확인한다. 현재 시간은 새벽 4시 17분. 시간이 애매하다. 지금이라도 이계성 할머니의 강남구 신사동 집에 가야 할까. 원론적인 고민이, 혹은 게으름이, 혹은 그저 외면하고 싶다는 내 안의 안일함이 나를 습격한다. 그래도 가야 한다. 오늘만큼은. 끝을 봐야 한다. 그래야 한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래야만 한다.
움직이자. 연신내역까지 걸어간다면 버스 첫차를 타고 강남역으로 갈 수 있다. 돈도 아낄 겸, 정신도 차릴 겸 걷기 시작한다. 다만 다리에 경련이라도 난 건지,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다리를 주먹으로 마구 내려친다. 다리가 욱신거린다. 아직 걸을 수 있다는 신호이겠거니 생각하고 발을 내딛는다. 다행히 다리가 움직여 주었다. 이런 몸 상태로 오늘 출근은 할 수 있으려나. 그날 이계성 할머니가 나한테 안 왔다면 내 일상은 안녕했을까.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아 다리를 질질 끌며 연신내역으로 향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아프고, 춥고, 피곤하고, 졸리다. 역시 몸이 힘들면 마음부터 흔들리는 걸까. 대체 난 지금 여기서 뭘 찾고 있는 걸까. 그건 됐고 난 잘살고 있는 걸까. 그동안 쌓여온 응어리가 용암처럼 솟아오르려 하니 응암역, 돌아왔다고 생각했던 다리 감각이 다시 없어지니 구산역, 몸도 마음도 지쳐 누가 나한테 시비를 건다면 연신 "네. 네."만 말할 것 같았을 때쯤, 연신내역. 그리고 도착. 버스 정류장 정보를 보니 741번 버스가 9분 뒤 도착이다.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는다. 온몸이 아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프다는 말이 물리학적으로 실재하는 현상이라는 걸, 내 몸이 증명하고 있다. 조금만 더 참자. 이제는 진짜 끝이 보이는 지점까지 온 거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수도 없다. 어차피 버스도 첫 차니까 자리도 널널할 거다. 그러면 버스 제일 뒷자리에 몸을 뉘어 좀 자야겠다. 그렇게 고대하던 강남행 버스 첫 차인 741번 버스가 도착했고. 몸을 질질 끌며 승차한다. 버스에 몸을 싣고 앉을 자리를 찾으려 버스 안의 전경을 살핀다.
첫 차니까 앉을 자리가 널널할 거라 예상했던 건 오산이었다. 강남행 버스 안 전경은 내 상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우선 버스는 이미 만차였다. 신기하게도 버스에 승차한 사람들은 대개 노년에 갓 접어든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은 의자가 아닌 버스 통로에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쿠션을 깔고 앉아 있었다. 일단 앉을 자리가 없었기에 손잡이를 잡고 서있는다. 앞에 앉아 있던 아저씨는 내 가방을 빼앗아 자기 품에 끌어안았다.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거부할 수도 없었다. 서 있는 사람 가방 들어주는 게 이제는 사라진 문화라고 생각했는데. 여기는 예외인가 보다.
강남행 버스가 연신내역에서 출발한 지 15분이나 지났을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탑승한 이들 모두가 잠들었다. 버스 안 조명도 어느새 꺼졌다. 아마 기사님의 배려였으리라. 그렇게 연신내발 강남행 버스 첫 차는 불광, 녹번, 홍제, 무악재, 독립문을 지났다. 그동안 또 누군가들이 버스에 승차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 중 누구도 버스의 풍경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버스 안내 음성이 다음 정류장이 광화문이라는 방송이 나왔고, 승객 중 3분의 1 정도의 사람들이 안내 방송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렇게 쪽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각자 무릎을, 허리를, 목을 부여잡으며 버스에서 하차했다.
버스가 광화문과 종로를 지나며 또 다른 많은 승객들이 하차했다. 이제 뭔지 알 것 같다. 강남행 버스 첫 차에 몸을 실은 사람들은, 세상이 숨기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기업, 최고급 상가, 공공기관의 아침을 여는 청소 노동자들은 출근 시간이 되기 전에 건물 청소를 마치고 사라져야 한다. 쓰레기를 버린 잘난 이들은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과 마주치기도 싫었을까. 그래서 만들어낸 방식이 이른 새벽 시간의 버스 첫 차 시간이 아닐까. 불쾌한 사실을 마주한다. 역시나 세상은 많은 걸 억지로 숨기고 있다. 그리고 세상은 제법 번듯하게 망가져 있다.
다음 정류장은 신사역이라는 안내 음성이 나온다. 나의 가방을 받아 들고 있던 아저씨는 깊은 잠에 빠져있다. 혹시나 아저씨의 단잠을 깨울까 가방을 조심스레 빼낸다. 하지만 아저씨는 깨어났고 멋쩍게 나를 보며 웃음 지었다. 아저씨에게 고객을 꾸벅 숙이고 버스에서 내린다. 나를 두고 떠나는 741번 버스 뒷모습을 멀뚱히 지켜본다.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논현역과 강남역에서 모두들 하차하시겠지. 그분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