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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19-

19화. '이 박사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by 동노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19화. '이 박사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5부.


19.


목구멍 끝에서 입술 사이에 많은 말들이 맺힌다. 하지만 입술 밖으로 말을 뱉을 수 없다. 이 박사는 내가 아는 사람인가? 이 박사의 얼굴을 다시 본다. 분명히 모르는 얼굴이다. 그리고 이 박사의 얼굴이 어색하다. 청각도 시각도 무뎌지기 시작한다. 이 박사라는 존재가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기묘하다.


"자네는 지금 여기에 어떻게 와있나?"

"그... 그게..."


입술은 움직여졌지만 목소리가 입술 너머로 잘 뱉어지지 않는다.


"평범한 부모를 만나고, 몸 안 불편하고, 체구가 작은 것도 아니야. 게다가 공부도 그럭저럭 잘 했을 거고, 서울에서 남자로 자랐겠지. 대학도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나왔을 거고, 직장도 공무원이면 괜찮고."

"이 박사 당신, 나를 알아?"

"알면서도 모르고. 모르면서도 알지."


말을 할 수 있었다. 다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도 내가 감을 수 있는 상태인지 인식이 안 된다. 스트레스 때문에 드디어 몸이 박살이 난 걸까. 아니면 뇌가 박살이 난 걸까. 난 살아는 있는 걸까. 아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저 이 박사라는 인간이 나를 어떻게 아느냐의 문제다.


"자네가 답을 한다면. 나도 답을 하겠네. 질문은 먼저 한 사람이 대답도 먼저 듣는 게 맞으니까. 자네는 지금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당신이 욕하는 그 사람들과 달리 살아왔다고 자부하는가?"

"난 열심히 살았어! 공부도 내가 한 거고, 건강관리도 내가 했어. 빌어먹을 너네처럼 거지 같은 인간들한테 친절 하려고 하는 것도 내 노력이야. 난 내가 해내며 살았다고!"

"아니야. 너도 그 사람들처럼 살아왔고, 살아갈 거야."

"시끄러. 내가 대답했으니까. 이제 너도 답을 해. 나를 어떻게 아는 거야?"

"뻔하잖아. 대충 때려 맞힌 거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거짓말이야! 솔직히 대답해. 내 스토커야?"

"스토커라니. 과대망상이 있네. 아! 그렇네. 자네 과대망상이 있네. 자네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그런 사람들과, 나와, 모두와 같은 사람일 뿐이야."

"개똥 같은 철학 읊지 마. 훈수 두고 싶으면 네가 좋아하는 그런 사람들한테 가서 말해."

"보아하니 자네라면 곧 알게 될 거야. 나이 들다 보면 아는 게 하나 있어. 해보면 아는 거야. 자네는 곧 할 거고. 그리고 알게 될 거야."


이 박사는 나를 보며 온화하게 웃는다. 그리고 뒤돌아 편의점 문을 향해 걸어간다.


"야!"

"또 반말을 하네? 반말 함부로 하지 마라. 너보다 못난 사람 없다."


이 박사는 나한테 한 방 먹였다는 듯 통쾌하게 웃었다.


"자네 하나는 알아둬. 자네나 그 사람들이나,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야. 오늘 일은 비밀로 해둬. 살다 보면 가끔 자기만 아는 미스터리가 있으면 사는 게 풍요로워지거든. 나 먼저 간다."


그렇게 이 박사는 따뜻한 편의점을 나갔다. 자기 지갑을 편의점 책상 위에 그대로 둔 채 말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휘적휘적 걸어 와 나의 동태를 살핀다. 눈을 땡그랗게 뜨고 있는 게 부질없이 청량한 눈이다. 재수 없는 놈. 책상 위에 있던 이 박사의 지갑을 펼쳐본다. 이 박사의 가족사진이 있었고. 현금을 꽂는 부분에는 자신이 관리하는 수급자의 명단이 있었다. 쭈욱 살펴보다가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이대윤, 58년 개띠, 010-XXXX-XXXX, OO연립 B102, 마누라 바람남, 술 안 먹으면 착함, 소보루빵 좋아함, 자기가 먹던 순대를 자꾸 주려고 함. 집에 세탁기가 고장 나서 2주에 한 번씩 세탁방 데리고 가야 함. 사람 좋음.'


이 박사는 무엇일까. 그리고 나를 어떻게 아는 걸까. 다리도 아팠기에 편의점 책상에 조금 더 앉아 고민을 해보기로 한다. 모르겠다. 이건 두고두고 모를 일이지 않을까. 현실감각이 조금씩 돌아온다. 내 가방 안에 들어있는 지갑을 열어본다. 현금 7만 원이 있다. 7만 원 전부를 꺼내 이 박사가 두고 간 지급에 넣는다. 그리고 이 박사의 메모장 속 이대윤 아저씨 메모에 내 메모를 추가로 써넣었다. '순대 담아 먹을 도시락통 하나 구매 예정.' 그리고 메모지에 또 한 줄 더해 넣었다 '아마, 곧 또 보게 될 것 같네요. 연락처 남깁니다. 010-XXXX-XXXX' 이 박사의 지갑을 편의점 직원에게 맡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 박사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그리고 곧 만날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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