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그 지경이라... 자네, 어쩌다 그렇게 됐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18-
18화. "그 지경이라... 자네, 어쩌다 그렇게 됐나."
5부.
18.
왜소한 체구의 남성이다. 게다가 남성은 자신의 체구보다 훨씬 큰 사이즈의 양복을 입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또 남성은 어울리지 않게 쇄골까지 늘어진 금목걸이까지 끼고 있다. 이 시간에 유행 지난 삼류 깡패가 돌아다닌다니. 강남은 강남인 모양이다. 남성이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갑자기 나를 향해 빵끗 웃는다. 영업용 미소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을 정도의 인위적인 웃음이다.
"세상 살기 힘드시죠? 저는 이 박사입니다. 제가 당신을 구원하겠습니다."
"이 박사요?"
"네 그렇습니다. 더 아실 건 없고. 그냥 이 박사라고 불러주세요."
이 박사?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다. 깊은 기억 속 어딘가에서 분명히 신호가 온다. 게다가 간질간질한 느낌인 걸 보니 최근에 들은 이름이다.
"생활이 잘 안 풀리셨나 봅니다. 이 추위에 술에 취해 골목에 누워 계신다니."
"아닙니다. 사정이 있어서."
"그 사정을 제가 좀 덜어드리려 합니다. 그게 저의 일입니다."
"좋은 일 하시네요. 근데 저는 또 할 일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기초생활수급자라고 아시지요? 제가 당신을 기초생활수급자로 만들어 드릴게요. 지금 선생님 행색을 보아하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이 박사라는 이 사람은 사회복지 브로커인 게 분명 하다. 사회복지 브로커들은 고시원을 돌며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한테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대신 해주고,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면 자기가 돈 관리를 해준다고 꼬드겨 기초생활수급자에게 지급되는 생계급여 일부를 빼가는 사람들이다. 최근 이런 인간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솔직히 진짜 있는 사람들인지는 몰랐다. 이걸 내가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더 열받는 건, 이 박사라는 사람이 나를 기초생활수급을 신청할 만큼 불행한 인간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못생겼다는 건 여러모로 참 불쾌한 일을 동반한다.
"그러지 말고 같이 따뜻한 곳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저는 필요 없..."
이 박사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나를 부축했다. 설마 이 박사라는 사림이 기초생활수급 브로커가 아니라 소매치기범이거나 장기 매매 조직원이라면? 아차 싶다. 몸이 떨린다. 항상 어딘가 무너진 사람들만 상대하다 보니 내가 겁을 상실했던 걸까. 이런 범죄에 내가 당하다니. 도망칠 궁리를 한다. 그러나 추위 속에서 너무 오래 걸었고, 넘어졌을 때 관절에 충격이 간 건지 뿌리치고 도망칠 힘이 나지 않는다. 게다가 왜소해 보이는 이 박사라는 사람의 힘이 장사였다. 나를 부축해서 들어 올리는데, 내 힘으로는 뿌리칠 수 없었다. 그렇게 이 박사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어서오세요. CU편의점입니다."
따뜻하고 현대적이며, 신기하리라 만큼 아늑한 편의점이었다. 밝은 장소에서 본 이 박사의 인상은 순하디 순했다. 이 박사는 나를 부축하느라 힘들었는지 이 추위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나도 긴장이 풀린다. 편의점 의자에 몸을 기댄다.
"많이 춥죠? 아까 하던 이야기 계속하기 전에, 우선 몸 좀 녹입시다."
이 박사는 핫팩을 사와 내 손에 쥐어주었다. 따뜻하다 관절까지 녹는 기분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아저씨 지금 돈 없죠?"
난 이미 기세에 눌려 핫팩까지 받았기에 솔직히 답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돈이 진짜 없기도 하다. 일단 시간을 끌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네. 어쩌다 보니."
"괜찮아요. 그러니까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 통장에 모아둔 돈은 있어요?"
"아니요. 보증금 빼고는 없어서."
거짓말은 아니다. 나는 진짜 보증금 빼고는 모은 돈이 없다.
"다들 그렇죠. 본인 명의 자동차 가지고 있어요?"
"자동차라뇨. 엄두도 못 내죠."
이것도 진짜다. 언감생심 마이카라니. 차를 사는 순간 고정 지출이 급상승한다. 주차는 또 어떻고.
"그럼 혹시. 부모님과 사이는 좋아요? 부모님과 경제적으로 관계는 어떻고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부모님과 연락은 거의 안 해요. 용돈을 드릴 처지도 아니고, 받을 처지도 아니고요. 그냥 별 소식 없으면 살아 계시는구나 하는 거죠."
"완벽합니다! 그럼. 저랑 같이 기초생활수급자 신청합시다. 부모님이랑 관계는 끊어졌다고 말하고. 부모님께는 대충 둘러대세요. 부모님도 당신 같은 사람 도와줄 수 있는 연세도 지나셨을 테니까."
"이제 그럴 나이시긴 하죠."
"내 말 듣고. 우선 내가 소개하는 집으로 전입신고를 하세요. 자기 주소지에서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해야 하는데. 제가 잘 아는 곳이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제가 마침 사는 집 계약도 끝나가기는 해서."
"대신에!"
이 박사는 벌떡 일어나 온장고에 있는 따뜻한 두유를 사 온다. 병뚜껑까지 손수 따서 나에게 건넨다. 기세에 밀려 받은 두유를 홀짝 마신다. 설탕이 가미 되어 있지 않은 종류의 두유다. 건강을 많이 챙기는 사람이려나. 이 박사가 나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대신에! 나에게 일부 금액을 주셔야 합니다."
역시 이 박사는 사회복지 브로커가 맞았다. 짜증이 밀려온다.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다면, 먼저 이 박사 같은 사회복지 브로커들은 순박한 사람들한테 자신들 덕분에 수급자가 될 수 있었다고 사기를 친다. 그럼 순박한 사람들은 그저 고마운 마음에 사회복지 브로커들한테 자기 돈을 바친다. 문제는 해당 시점부터 사회복지 브로커들은 수급자들을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사회복지 브로커들은 매달 기초생활수급자로부터 상납 받기만 하는 거다. 게다가 수급자들이 사회복지 브로커들한테 문제를 제기하면, 이들은 관공서에 당신을 불법 수급자라고 신고하겠다고 협박까지 한다. 한 마디로 이 새끼들은 쓰레기들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구조 때문에 사회복지 브로커 이야기를 들었어도 안 믿었었는데, 이게 진짜라니. 이 인간한테 망신을 줘야겠다.
"아니. 이 박사 씨. 기초생활수급자한테 돈을 받겠다는 게 말이..."
"그 금액은 바로! 매달 나한테 2만 원만 주시면 됩니다."
"2만...원이요?"
"네. 2만 원이요. 더는 양보할 수 없습니다. 2만 원만 저한테 주시면 제가 동사무소에서 뭐 신청하라거나, 받아 가라는 문자도 확인해 드리고. 병원 갈 일 있으면 동행 서비스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이 박사는 다시 벌떡 일어나 컵라면 두 개를 사 온다. 손수 컵라면에 뜨거운 물까지 받고, 내 앞에 컵라면을 스윽 밀어 넣어 준다. 본인도 추웠는지 컵라면을 두 손으로 꼬옥 쥐고 있다. 이 박사의 손은 이런저런 상처와 굳은살로 가득 한, 고생을 많이 한 손이었다.
이해가 안 된다. 고작 2만 원밖에 안 받는 이유가 뭐지. 이 박사가 요구한 금액인 2만 원에 이 박사가 제시한 서비스 정도면, 국가가 기초생활수급자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보다도 훨씬 우수한 서비스다. 심부름센터를 이용한다고 해도 2만원 주고는 이 박사가 제시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 왜 이런 저렴한 가격을 요구하는 걸까.
"아니. 이 박사님 근데 2만 원이면..."
"2만 원이면 아주 싼 거예요! 그리고 제가 이사 가자고 한 집도 아는 누님이 가지고 있는 집인데. 반지하지만 최근에 리모델링 해서 엄청 깨끗해요. 저기 암사동 넘어가는 길에 강병동 들어봤으려나 모르겠네. 보증금 300에 월세는 25! 적당하죠?"
"강병동이요?"
"그래요! 거기 천호 지나서 있는 동네요. 그리고 2만 원만 내면 제가 2~3일에 한 번 오며 가며 생활도 봐 드리고. 집도 고장나면 집수리도 무료로 연결해 드릴게요. 근처에 제가 아는 형님이 철물점도 운영하시는데, 실력이 아주 일품이세요. 믿을 수 있으실 겁니다."
맞다. 이제야 기억난다. 이대윤 아저씨가 말했던 그 '이 박사'라는 사람이 이 사람이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강병1동이든 2동이든 보증금 300에 월세 25면 조건이 엄청나게 좋은 거다. 이제는 정말 순수하게 궁금하다. 이 박사는 사회복지 브로커가 아니라 자원봉사자이지 않을까. 이 박사는 왜 이러는 걸까.
"당장 답을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추울 텐데. 얼른 컵라면 한입 해요. 아저씨 술도 마신 것 같아서 일부러 칼칼한 놈으로 사 왔으니까."
"저기 이 박사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 제가 그... 사회복지 공무원입니다."
이 박사는 사레가 들렸는지 후루룩 마시던 라면을 뱉어냈다. 이 박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노려본다.
"아저씨 거짓말 하지 마세요. 나를 아직 못 믿으시는 것 같은데. 공무원분들은 아저씨처럼 안 생겼어요."
"아닙니다. 제가 몰골이 이래서 그렇지. 진짜 공무원입니다."
가방에 챙겨두었던 공무원증을 이 박사에게 보여주었다. 이 박사는 편의점 의자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며 나를 쏘아붙였다.
"이봐. 지금 나랑 장난해? 그럼 진작 말했어야지. 왜 남의 영업을 방해하는 거야."
신기하게도 이 박사는 가난해 보이는 몰골일 때는 존댓말을 했지만, 내가 공무원 신분을 밝히니 반말을 한다. 주로 반대인 게 상식인데.
"죄송하지만. 제가 아까 이 박사님이 말씀하셨던 그 강병동에서 일하는 공무원입니다. 근데 동네 수급자한테 이 박사라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었는데, 혹시 짧게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싫어 인마! 이거 웃기는 놈이네. 공무원이 왜 내가 사 온 두유랑 라면은 낼름 받아먹어? 이거 뇌물 받아먹는 부패 공무원이네!"
"선생님 그러지 마시고. 저한테 사주신 거는 당연히 제가 돈으로 드릴게요. 그리고 제가 드릴 질문은 아니지만. 왜 2만 원밖에 안 받으세요? 진짜 순수하게 궁금해서요."
이 박사는 기가 차다는 듯이 라면을 짚었던 젓가락을 탁자 위로 던진다.
"참나. 이 사람 이거 어이가 없네. 야 인마. 나는 나쁜 짓 좀 하면 안 되나?"
"나쁜 짓이요?"
"나는 사람 등 처먹으면 안 돼? 이런 각박한 세상에 속는 놈들이 등신인 거지. 이게 내 잘못이야?"
"이 박사님. 근데 2만 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박사님이 해주신다는 일에 비하면 너무 작은 돈이잖아요. 굳이 왜 이런 일을 하시는 거예요? 다른 이유가 없으면 2만 원은 이해가 도저히 안 가는 금액이라."
"너 지금 나 놀리냐? 야. 꺼져. 시간만 날렸네. 내가 왜 이 일을 하냐고? 돈 좀 벌어 보려고 그랬다. 왜 꼽냐? 너는 공무원이라서 정의의 편이다 이거냐?"
"이 박사님. 그게 아니라. 매월 2만 원씩 받아서 집 구해주고, 연락 오는 거 관리 해주고, 안부 확인까지 해주는 거면. 그 정도면 주민센터 직원들이 월급 받고 하는 일인데. 그걸 다 해주시면 이 박사님한테 적자 아니에요?"
"이 친구가 멍청한 소리를 하네. 수급자 놈들이 영원히 나한테 돈을 줄 수 있게 티 안 나는 만큼만 받아야 하는 거야."
"그래도. 이 박사님이 이런 추운 날 새벽에 영업활동까지 하시면 건강도 챙기셔야 할 텐데 그 정도 돈으로 수많은 일들을 다 봐주시면."
"남의 돈 훔쳐 먹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인마. 그리고 그까짓 거 안부 확인이야 동네 돌아다니면서 잘 지내냐고 물어만 봐도 되는 거잖아. 그렇게 해주면 다들 그저 고맙다고 나한테 의존을 하기 시작해. 자기들이 받은 쌀이며 김치며 가져가라고 바리바리 싸주고 말이야. 하여튼 기초생활수급자 놈들은 멍청한 놈들이니까."
이 박사는 진심인 게 분명하다. 이 박사는 진심으로 2만 원이 자신이 제공하는 토털 케어 서비스에 비해 비싼 가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 장사 조졌네. 너 인마 어디 가서 나 신고하거나 그러지 마. 신고하는 즉시 나도 오늘 네가 나한테 얻어먹은 거. 그거 다 뇌물이라고 신고할 줄 알아! 재수 없는 놈. 내 귀한 시간 빼앗기나 하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짜식. 겁먹기는. 나같이 나쁜 새끼 처음 만나서 쫄았나 보네. 안 잡아먹어 인마."
기분이 살짝 뒤틀리기 시작한다. 내가 왜 이런 급이 떨어지는 인간한테 혼이나 나고 있어야 할까. 주변을 둘러본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직원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야."
"야?"
"그래. 야."
"이 새끼가 맛이 갔나. 왜 반말이야? 팍 씨!"
이 박사가 위협을 했지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잘 됐다 싶다. 날씨는 춥고, 되는 일은 없고, 여러모로 한심한 모든 것에 짜증이 치민다. 이 박사의 멱살을 쥐었다. 힘을 많이 준 것도 아닌데, 얄쌍하다 못해 가녀린 이 박사의 몸 전체가 들렸다. 아까의 힘은 어디갔는지 이 박사는 반항도 하지 못했다. 이런 인간한테 하대당한 게 더 화난다.
"야 이 쓰레기야. 불쌍한 사람들한테 그 같잖은 돈 받는 게 좋냐?"
"이거 놓고 말씀하세요."
"이제야 존댓말이 나오네. 이 박사 너도 한심한데, 너한테 속는 인간들이 더 한심하다. 그렇게 멍청하고 알아보려는 마음도 없으니 인생 그 지경이 됐지. 안 그래?"
"..."
이 박사는 말이 없었다. 다만 이 박사가 무거워졌다. 팔이 아파 이 박사를 놓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 박사의 무게는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무거움이었다. 이 박사가 나를 응시했다. 이 박사가, 거대해져 있었다.
"그 지경이라... 자네, 어쩌다 그렇게 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