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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17-

17화. 대한민국의 정점. 강남역에 도착했다

by 동노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17-

17화. 대한민국의 정점. 강남역에 도착했다



4부.


17.


똥궁빌라를 떠나, 강병1동의 숨겨진 가난의 골목을 빠져나와, 삐까뻔쩍한 신축 아파트를 지나, 지하철 노선 두 개가 지나는 사거리에 선다. 일단 아오 추워.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고 있다. 눈을 감는다. 이계성 할머니가 나에게 던지고 간 이야기를 따라가자. 그곳에 있다. 나를 위해서라도 그곳에 가야 한다. 물론 그 끝에서 내가 뭘 깨닫게 될지는 모른다. 그냥 바보 같은 짓을 했다며 후회할 수도 있고. 아무 느낌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다. 그래야 한다.


하찮으면서도 위대한 여정인 신사동 원정에 오르기 전,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편의점에 들러 군수품을 구입한다. 핫팩 5장, 뜨거운 캔커피 1+1 행사로 2캔, 행사가격 물티슈 1개, 술을 깨워줄 숙취해소 음료 1캔, 옥수수 수염차 1병, 점장인지 아르바이트 노동자인지는 모르겠지만 퉁명스럽게 앉아 있는 직원에게 향한다. 당당하게 통신사 할인까지. 완벽하다. 숙취해소 음료를 원샷 때린다. 그렇게 숙취로 빙빙 도는 세상에 초점을 다시 맞춘다. 휴대전화를 열어 내비게이션 어플로 이계성 할머니의 공책에 나온 주소인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XXX-XX. 102호'를 검색한다.


시간은 저녁 11시 40분. 진작에 지하철은 끊겼고 버스는 찾아보기 귀찮다. 술도 깰 겸. 그리고 그저 사람이 없는 길을 걸어보고 싶어 걷기로 한다. 위대한 원정길의 첫 고난은 추위였다. 술을 마셔도, 숙취 해소 음료를 마셔도, 걸어도, 뜨거운 캔 커피를 마셔도 춥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지구온난화가 심각하다는데 왜 오늘은 추울까. 그래도 불행인지 다행인지 추위에 시달리기 시작하니, 술이 빠르게 깬다. 그리고 현실 감각이 돌아온다. 춥고 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돌아갈까. 아니면 택시라도 탈까. 근데 또 걷기 시작한 게 아까워서 일단 그저 걷는다. 살다 보면 막연히 걸어야 할 때도 있으니까.


술기운보다 추위가 더 또렷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니 암사역이 보인다. 내 조상님 누군가는 암사동 선사 유적지에 살았겠지. 추위에 적응될 때쯤 천호역이 보인다. 예전에는 그냥 평범한 동네였는데 이제는 지하철역 입구가 아니라면 천호라는 걸 알 수 없을 만큼 고층 건물들이 많이 올라갔다. 그냥 택시를 탈까. 그래도 돈이 아까운데 싶어질 때쯤 강동구청역이 보인다. 뭐지? 이런 지하철역이 있었나. 또 구청은 왜 눈에 안 보이고 모든 곳이 다 아파트일까. 요새는 어딜 가도 이 기분이다. 근데 내가 살 집은 없겠구나 싶으니 몽촌토성역. 올림픽공원의 웅장함이 보인다. 몽촌토성을 지키던 백제의 야간 불침번도 이날을 예상했을까. 군시절 나의 불침번은 어땠을까 기억하려 애쓰다 보니 잠실역. 와. 끝도 안 보이는 고층 건물 가득한 풍경이 나를 압도한다. 압박감에 질려 걸음이 빨라진다. 이런 집에 살려면 대체 월급을 얼마나 받아야 할까. 이제는 로또에 당첨된다고 해도 잠실 아파트들을 살 수 없다. 여기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로또에 당첨된 상태로 태어나는 거겠지. 그런 걸 보면 로또도 별 게 아니다 싶어질 때쯤 잠실새내역. 어라. 여기 신천역이었는데? 안 봐도 뻔하기는 하다. 집값을 올리고 싶으면 지하철역 이름에 잠실이나 강남을 넣으면 된다. 집값 문제 해결을 위해 전국 지자체 이름을 모두 '강남아파트 n동'으로 일괄 기재해버리면 어떨까.


이런 멍청한 생각을 하면서 다리가 아파질 때쯤 되니 종합운동장역. 군대 전역하고 야구장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야구 경기가 끝나면 야구장 앞 노점에서 팔던 김밥이 한 팩에 500원이었다. 돈도 없던 시절이라 그 김밥 한 팩으로 하루를 버텨냈었다. 이제는 김밥도, 나의 한 끼 식사비용도 얼마나 올랐을까. 나라는 인간도 그만큼 격이 올라갔을까. 그렇게 삼성역. 으아 다 공사장이다! 여길 또 어떻게 개발할 수 있는 걸까. 내 집도 한 채만 빼주면 좋겠다 싶으니 선릉역.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언덕을 가득 채운 빌딩들이 보인다. 난 평생 여기 살 일이 없겠지. 자괴감을 잊으려 언덕을 어기어차 오르니 역삼역. 역삼역은 거꾸로 해도 역삼역. 키득키득 난 창의적이어야. 이후 밀려오는 자괴감. 그렇게 난 대한민국의 정점. 강남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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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각 새벽 2시 8분. 추워서, 혹은 엄습하는 감각들이 무서워 쫓기듯 반쯤은 뛰어오니 시간을 많이 아꼈다. 새벽의 강남역에는 사람이 많았다. 참 강남역스럽다. 달큰하게 취해서 일행에게 잘 가라는 사람. 세상이 팽팽 도는지 버스 승차장에 기대어 자기를 집에 데려다 줄 심야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이 와중에도 질서정연하게 일렬로 주욱 서 있는 클럽 대기 줄. 그리고 그곳엔 예전의, 그리고 지금의 나도 이곳에 있었다.


나도 예전에는 강남역에서 밤새 술을 마시며, 사랑을 속삭이고 꿈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참 멀리도 왔다. 꿈이나 사랑은 어디다고 회색인종이 되어버린 강동노만 세상 어귀에 황망히 살아가고 있다. 내가 강남역에 버리고 온 나라는 망령이 지금의 나를 만나 내 안에 들어온다. 예전의 감각들이 피어오른다. 의외로 불쾌하다. 과거의 강동노와 지금의 강동노 두 명이 만난 순간. 서로 전혀 다른 모습에 민망했고, 안 좋게 헤어졌던 연인을 다시 만났을 때처럼 새삼 어색하다. 문득 내가 생경하다. 손을 쥐었다 펴본다. 이름 모를 디저트 카페 창문에 손을 가져다 대본다. 차갑다. 차가워진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다. 아프다. 다행히 여전히 살아있기는 한 모양이다.


기억 속 어제들이 나를 공습한다. 첫 여자 친구와 처음으로 데이트를 하던 날 영화관 앞에서 어떻게 일어서 있어야 잘 생겨 보일까 고민하던 나. 토익학원 빌딩으로 숨을 고르며 들어가던 나. 어머니 환갑 선물을 위해 내 지갑 사정이 허락하는 가장 비싼 와인을 고르던 나. 여자 친구의 헤어지잔 말에 근방 초등학교 앞에서 울던 나. 행정고시를 포기하고 9급 공무원 시험 수험서를 사기 위해 밤을 새우며 읽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중고서점에 팔던 나. 그럼에도 희망을 가지고 햇살 아래를 즐거이 걷던 나. 그리고 지금.


무겁다. 많은 기억들이 나를 누르고 있구나. 오래 걸어서인지, 기억이 무거워서인지 몸이 극도로 피곤하다. 미처 기억 하지 못한 나의 기억들이 나를 퍽치기 하기 전에 어디로든 숨어 들어가 있어야 한다. 눈물이 흐른다. 딱히 눈물을 흘릴 이유는 없지만 그저 눈물을 흘린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가 없기에. 그때의 내가 너무 그리운데, 다시 그때의 내가 될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서워서 눈물이 난다. 도망쳐야 한다. 기억의 폭우에 침수되지 않도록 도망가야 한다. 여기서 무너지면 겨우 적응한 지금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 쏟아지는 기억이 차오르지 않는, 내가 모르는 공간으로 도망가자.


그렇게 사람도, 나도 없어 보이는 언덕을 올라간다. 힘든지도 모르고 한참을 올라간 언덕 끝에 강남 같지 않은 한 건물 입구에 걸터앉는다. 무겁다. 몸도 무겁고. 마음도 무겁다. 빨리 해가 떠서 침수된 나의 오늘들을 좀 말려주었으면 좋겠다. 몇 분이나 앉아 있었을까. 정신이 좀 드는지 앉아 있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건물 안팎에서 어떤 빛도 찾을 수 없는 신기한 건물이다. 건물 바닥이 더 차갑게 느껴진다. 그래도 별다른 수가 없다. 기억 속의 나들을 피해 있어야 한다. 다행히 조금씩 현실 감각이 돌아온다. 온갖 번민들에서 벗어나 시시콜콜한 현실적 문제들이 떠오른다. 내일의 출근과 나의 월급과, 뭉치다 못해 딱딱해진 내 종아리 같은 그런 현실들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잇. 씨앙!" 엉덩이가 유독 차갑다. 자세를 고쳐잡는데 뭔가 축축하다. 그렇다. 나는 누가 구토를 한 곳 위에 내가 앉아 있었던 거다. 무의식적으로 튀어 오르듯 일어난다. 그리고 '콰당!' 엉덩이뼈, 허리, 팔꿈치 전부 아프다. 거지 같은 인생. 앉는 김에 눕는다고 진짜 건물 입구에 대자로 눕는다.


토사물은 어쩌냐고? 모른다. 어차피 망한 거 토사물이 좀 더 묻는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다. 눈을 감는다. 괜히 여기까지 온 걸까. 여기까지 와서 후회를 하자니 좀 민망하다. 고양된 감정이 가라앉아서 이러는 걸까. 아니면 아까는 술에 취해서 바보 같은 판단을 했던 걸까.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깊이 빨아들인다. 어지러워서 눈을 감았다. 시야가 더 어두워진다. 후회로 채워지고 있는 나의 공간을 뚫고 말소리가 들린다.


"안녕하십니까. 지금 너무 힘드시죠?"


이 새벽에 전도하는 예수쟁이도 있다니. 역시 성실하고 볼 일이다. 아니면 최근 유행한다는 사이비 종교의 전도꾼일까. 아니면 내가 급사해서 하나님이 나를 데리러 온 걸까. 하나님은 신사동에 계셔야 하는데. 눈을 떠본다. 하나님은 아니었다. 그냥 적당한 외모의 중년 아저씨였다. 겁은 안 난다. 내가 더 무섭게 생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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