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16화.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다.'
4부.
16.
주민센터를 나와 이계성 할머니 집으로 향한다. 역시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맞다. 이런저런 골목들을 지나 똥궁빌라에 도착. 정신은 맑아졌어도 여전히 이곳은 언짢다. 무슨 일인지 똥궁빌라 입구에 박 여사와 그의 배우자이자 말 많은 할아버지가 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부딪히자. 가끔은 일을 터뜨려야 일이 흘러가게 될 때가 있다. 사뿐사뿐 걸어가 박 여사에게 말을 걸었다.
"박 여사님. 안녕하세요!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어? 아. 501호구나. 어휴 술 냄새! 501호야말로 이 밤에 여긴 왜 왔어?"
"이계성 할머님 때문에요. 그... 이계성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일 처리하고 심란해서 한번 와봤습니다."
박 여사는 말이 없었다. 말 많은 할아버지가 대화를 이어갔다.
"안타깝게 됐어. 자네도 그래서 한 잔 했구만. 생긴 거랑 달리 여린 양반일세."
"네. 오늘 이계성 할머니 병원비 지원 관련 일 하러 병원에 들렀는데. 마침 딱 그때 그렇게 되시더라고요. 사람 일이라는 게 이렇게 갑자기...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마음이 너무 안 좋아서. 한 잔 마셨습니다. 죄송합니다."
박 여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일로 501호가 죄송할 게 어디 있어. 고생했어. 그래도 501호 그렇게 안 봤는데. 요새 사람들하고 달리 휴머니즘이 있네. 근데 병원에서 계성댁이 501호한테 뭐 별다른 말은 안 했어? 유언이라거나."
공책 이야기를 박 여사에게 말을 해도 될까. 일단은 하지 말자. 일이 여기서 더 커져서는 안 된다.
"저도 임종을 지킨 건 아닌데,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별말씀은 없으셨어요."
"그래... 그래도 사람이 갈 때 자기 마지막 한이라도 풀고 가야 할 텐데. 계성댁이면 더 그렇고..."
"네? 혹시 이계성 할머니가 보증금이나 월세 체납 문제가 있을까요?"
"501호. 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돈에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박 여사는 급작스럽게 나에게 고성을 질렀다. 말 많은 할아버지가 박 여사를 진정시켰다.
"여보. 그러지 맙시다."
"에휴... 미안해 501호. 내가 계성댁 때문에 마음이 안 좋아서 그래. 미안해."
"아닙니다. 그러실 수도 있죠. 만약 문제 생기시면 무료 변호사 상담 제도 이용하실 수 있어요. 상담 받으실 생각 있으시면 내일 주민센터로 오세요. 안내해 드릴게요."
"아니야. 됐어. 아무 일도 아니야. 계성댁이 그렇게 갔다니까. 그게 그러니까! 아니야. 에휴. 아니야. 됐어."
"그러시군요. 그리고 박 여사님. 이계성 할머니 집 짐 빼는 문제나 주소지 관련된 일은 구청 복지정책과랑 주민센터 행정팀에서 박 여사님한테 연락드릴 거예요. 집 청소비용은 박 여사님이 이계성 할머니 남은 보증금에서 지급을 해주셔야 할 텐데. 비용은 일반적인 청소업체보다 훨씬 저렴할 거예요."
박 여사는 어쩐 일인지 별다른 말 없이 우물쭈물 하기만 했다.
”알겠어.“
"제가 집 청소나 짐 빼는 것도 최대한 빨리 이행될 수 있게 처리할게요. 이계성 할머니 유가족분들이 이계성 할머니 장례 절차 인수를 아예 거부하셔서, 재산 문제나 법적인 문제는 아까 말씀드린 무료 법률상담 받으실 수 있으시니. 시간 될 때 주민센터 한번 오세요."
"501호."
"네?"
"계성댁이 왜 여기서 악착같이 살았는지 알아?"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질문 자체를 스스로에게 해본 적이 없었다. 이계성 할머니든, 누구든. 내 앞에 온다면 그저 빨리 컨베이어 벨트 넘어로 보내버려야 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아니요. 그 문제는 저도 고민한 적이 없네요."
"그게..! 아니야... 아니다. 됐어. 501호 지난번에 내가 말한 재계약 있지? 501호 영재 오피스텔 재계약. 그냥 지난번에 이야기한 대로 해줄게. 보증금도 똑같이 가고. 월세도 좀 내려 줄게. 그냥 그렇게 알고 있어."
"진짜요? 감사해요! 정말 정말 감사해요!"
"근데. 계성댁 집 정리하는 거. 급할 건 없으니까 너무 빨리 안 해도 괜찮아,"
"빨리 처리되는 게 여사님한테 좋지 않으실까요? 저한테 부담 안 가지셔도 괜찮아요. 저도 그냥 제 할 일 하는 거예요."
"아니야. 그냥 그렇게 알고 있어."
천하의 박 여사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무슨 일일까. 옆에 멀뚱히 서 있던 말 많은 할아버지가 대화에 끼어든다.
"이계성 할매. 예전에 여기 동궁빌라 처음 들어올 때, 내가 어쩌다 보니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이계성 할매 불쌍하게 산 사람이야. 그래서 우리 마누라가 재계약 때도 월세 거의 안 올리고, 집수리도 해주고, 우리가 이래저래 챙겨줬어. 음식도 종종 챙겨주고. 그러니까... 계성 할매가 소천한 거 들으니 좀 그래. 우리도 나이 먹다 보니까. 인정 같은 거에 좀 무너지는 일이 있어."
말 많은 할아버지는 박 여사의 손을 꼭 잡았다. 아무래도 박 여사 내외도 노인들이다 보니 죽음 앞에서는 예의를 지키려고 하는 것 같다. 박 여사나 말 많은 할아버지 내외도 저런 모습이 있다는 사실에 어색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인다.
"알겠습니다. 무슨 일 생기면 제가 박 여사님한테도 연락드릴게요."
"이봐 공무원 양반. 자네가 연락한 유가족이 딸이야?"
"그건 개인정보라 말씀드리기가 좀 어려워요."
"내가 사람 관찰하기를 참 좋아해서 하는 말인데. 자넨 참 신중해. 그리고 심란해."
이 와중에도 농담을 던질 수 있다는 건 좋은 어른이란 징표일까. 배워야겠다. 그래야 숨도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박 여사가 말을 이었다.
"501호. 계성댁 때문에 고생한 건 아는데. 계성댁도 악착같이 열심히 산 사람이야. 노인네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노후 준비를 못 해서 그렇지. 그렇게 망나니처럼 흥청망청 산 사람 아니야. 그러니 너무 미워는 하지 마."
"이 여편네가 갑자기 그러네. 공무원 양반한테 그러지 마. 이계성 할매 실려 갈 때도 이 양반이 얼마나 고생했는데! 내가 봤어!"
"알아요. 알아. 근데 계성댁이 불쌍해서 그래. 계성댁이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건 알았으면 좋겠어서 그래."
"알겠습니다. 저도 마음이 좋지 않아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아마 구청에서 이렇게 혼자 돌아가신 분들 장례식을 공영으로 작게나마 진행하는데. 공영 장례 관련해서 나오는 거 있으면 제가 연락드릴게요."
"알겠어. 그리고 고마워 501호. 재계약은 그대로 해줄 건데. 대신 이제 관리비는 더 내야 해."
세상에나. 박 여사가 달리 보였었는데. 이건 취소. 그렇게 재계약을 구두로 확정 짓고 박 여사와 말 많은 할아버지가 떠났다. 담배를 한 대 피운다. 이제는 이 망할 놈의 똥궁빌라 지하로 내려가서 마주해야 한다. 긴장된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릴까 싶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는 피할 수는 없다. 내려가자. 어둠을 비집고 똥궁빌라 계단을 내려가 이계성 할머니 집 문의 손잡이를 잡아본다. 차갑다. 이 너머에 이계성이 살았었다. 이계성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다.
손잡이를 더 세게 쥐어본다. 근데 이 끝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 나는 뭐가 되는 걸까. 그냥 이계성 할머니 집에 가져온 공책만 넣어두고 다시 망각하며 살까. 그 정도만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게 더 편한 길인 게 사실이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빠진다. 손잡이를 다시 세게 쥔다. 역시 내가 할 일은 하나다. 공책을 이계성 할머니 딸에게 전달하자. 이계성 할머니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자. 그렇게 이계성이라는 이야기를 완성해야 한다. 무슨 의미가 있는 행동이겠냐만.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난 이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내 심란함이 가라앉을 거다. 그리고 뭔가 닿을 것 같다.
결국 내가 가야 할 장소는 한 곳이다.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XXX-XX. 102호’ 이곳으로 가야 한다. 손잡이를 놓는다. 올라가자. 몸을 뒤로 돌렸고.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딛고 올라갔다. 술기운이 올라왔고. 추웠고. 배가 고팠다. 다만 정신은 오랜만에 말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