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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지 Jan 24. 2022

자녀 위약금

결혼은 부자여야 할 수 있고 결혼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가난해야 하나?

두 달 만에 다시 찾은 놀이터에서의 딸은 이제 내가 담을 수 없는 그릇이 되어 있었다. "아빠 내일 출근해" 한 마디에 대성통곡하며 엄마에게 달려간다. 딸의 연기력에 탄복하며 5분 만에 잠이 들었다.


아빠 배역을 맡은 나는 딸을 안아주는 장면이 지나치게 많아 이 신을 짜낸 신에게 위약금 지불하고 영화 접겠다고 말했는데 관계자는 2억을 요구한다. 군말 없이 촬영에 임했다. 


2억은 아내가 신혼 초, 아직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은 시점에 이혼으로 요구한 금액이다. 나는 돈이 없어 결혼 생활을 지속했다. 어쩌면 2억은 평생 아내에게 지불해야 하는 금액이 아닐까 싶다. 결혼 준비로 2천만 원을 들고 와서 불과 2~3년 만에 10배로 시드를 불리는 그녀의 재테크 솜씨에 탄복했다.


위자료 대신 노역을 택한 나는 결혼을 통해 '가족'이 가지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 정신적 감옥을 소재로 시나리오를 준비 중이라면 나는 자신 있게 아내와의 롱테이크 다큐멘터리를 권하겠다.


대부분의 가지옥 사진은 촬영자의 심경을 대변, 뒤틀려 있다.


94년작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라는 영화에서 브레드 피트가 촬영이 너무 힘들어 촬영 중단 위약금을 물어보았다고 한다.


아내는 딸이 울면서 다가오자 왜 우는지 물었다.


"아빠 내일 출근한대"


라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엄마 귀엔 아ㅃㄴ ㅇㅣㄹ 츌그항더ㅡ 따위로 들린다. 엄마의 삶의 위로는 남편이 아닌  만 원짜리 로또여서 아내는 딸에게 로또 당첨되면 아빠 출근 안 해도 된다고 말한다.


'할 건데'


몇 억이 수중에 있어도 나는 출근하겠다. 사과나무처럼 꾸준히 내 삶을 살 것이다. 그 게 아내와 나의 차이다.


그 차이 중 동네에 코란도 차가 있는데 오래된 차여서 엔진이 30~40km만 달려도 지독히 큰 소리가 나 민폐라 한다는 아내의 말에 괜히 슬펐다. 우리 집도 마티즈를 13년 동안 타다가 폐차했고, 나 역시 중고 카니발을 타다가 매연저감장치도 달고 아침 출근길마다 엔진이 꺼지는 기이한 증상이 반복되어 스타렉스로 바꾸었는데 말이다.


나 역시 민폐로 차를 세우고 다시 출발하고를 반복했고 그 차주 역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 텐데 돈 한 푼 없으면서 차는 새 차를 사고 싶다는 아내의 말에 카푸어가 이런 마인드겠지 라는 생각을 했다.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에서 언급한 '수치의 문화' 탓이다. 타인의 시선이 중요해 예절을 중시하고 민폐가 될만한 모든 것에 강한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는 정신적 억압이 깔려있는 정서이다.


나는 아내와의 차이로 인해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온다. 아내는 늘 가난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가난을 특정 상태가 아닌 습관이라 여긴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습관들로 이루어진 한 때에 도달한 것이며, 사소한 습관과 중대한 실수의 총합이 가난에 이르게 한다는 결론 말이다.


아내는 자신의 친구들이 다 자신보다 많이 가지고 있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자존감은 낮은데 자존심은 하늘을 찌른다. 나는 자주 가시 돋친 말에 찔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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