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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충청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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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꽃지 Sep 12. 2023

 내 고향 서울, 양화대교

내 머릿속에 사진으로 박혀있는 공간이 있다.


'절두산 성지를 지나 한강고수부지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바라보는 양화대교 북단'


가출한 답시고 훌쩍거리며 혼자서 한강고수부지에 나갔던 게 국민학교 3학년쯤이었으니까, 8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양화대교 밑 풍경이 내 머릿속에서 한 컷, 한 컷, 디졸브 되며 '한강 갤러리'로 묶여있달까. 내가 국민학교 때 한강 고수부지는 모래밭이었다. 그 사이에 코스모스 군락이 있었고, 모래밭의 끝은 바로 강으로 이어졌다. 위험한 곳은 적당히 피해서 놀았던 시절이었다. 열몇 살이 됐을 때 고수부지에 콘크리트 제방이 순식간에 들어섰다. 아스팔트가 깔리고, 사람이 다니는 길과 자전거 길이 나뉘고, 그 덕에 어릴 적 흙 날리며 놀았던 넓은 공터는 사라졌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씨벌건 대낮에 학교를 땡땡이칠 때마다 절두산 성지로 달려갔다. 설마 기도하러 갔을까? 그건 아니고, 미사처 옆 한강이 쫙 내려다 보이는 잔디밭에 누워 CD플레이어를 귓구멍에 끼우고 사춘기의 위풍당당한 일탈을 만끽했더랬다. 20살이 넘어서는 '알코올과 함께하는 우정의 무대'로 한강은 다시 셋업 된다. 친구와 맥주 한 캔씩 들고 해가 뉘역뉘역 져가는 노을 진 하늘을 보며, '우리 졸업하면 뭐 하냐', '그놈이랑 헤어질까 말까', '인간관계 너무 힘들다' 등등 당시에는 세상이 곧 무너질 듯 한없이 무거웠던 고민들을 한강에 토해냈었다.  결혼을 하고 이촌동에 살 때는 한강이 숨통이었다. 일이 너무 안 풀려 답답하면 자전거를 타고 한강대교, 동작대교, 반포대교, 한남대교, 동호대교, 성수대교, 영동대교, 잠실대교,,,,다리 밑을 통과하며 갈 수 있을 만큼 끝까지 페달을 밟았다. 남편과 싸운 밤에는 집을 뛰쳐나와 주먹 꽉 쥐고 원효대교, 마포대교, 서강대교를 지나, 양화대교로 내달렸다. 헐떡거리며 양화대교 북단 다리 밑에 앉으면 내가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펼쳐지곤 했다. 한강에서 매일 걷기 운동을 하던 엄마의 뒷모습, 가족나들이로 공 들고 나와 한강 모래밭에서 축구를 하고 그 장면을 찍어 주던 아빠의 모습, 친구들과 취기 올라 내질렸던 고성방가, 급찐살을 빼겠다며 땀복 입고 뛰던 나, 그리고 첫 데이트의 장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한강에 엃힌 기억들이 '아직 널 잊지 않았어'라고 말을 건네 듯 위로가 되어줬다.


지금은 가고 싶어도 쉽게 내질러 달려갈 수 없다.

단지 기억으로, 내 지갑 안에 사진으로 있다.


이젠 내가 말해준다. '한강, 아직 널 잊지 않았어'라고, '너를 내 마음의 고향으로 불러줄게.'라고,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태어나 자란 곳을 떠나 낯선 곳에 자리 잡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낯선 곳에서, 그곳이 고향이 될 아이들을 키우며 삶의 더 긴 시간을 보내게 된다. 즉, 살던 곳,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 터  잡는 건 나에게만 일어난 특별한 일이 아니란 말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대전으로 이주한 건 나에게는 특별한 사건이었지만, 그 플롯은 너무나 흔해 빠진 생애 이야기 구조이다.


덕분에 나도 마음의 고향을 갖게 됐다. 라고 생각해본다. 그곳은 마음속에 접어두고 이젠 이곳에서 적응해 보려 한다.  탈서울은 타의적이었지만, 자발적으로 지방러가 되어 보자. 다시 서울로 올라 갈 가능성이 전혀 없어보이는 이 상황에서, 더 많고 더 긴 삶이 이곳에서 펼쳐질테니까.




난 떠났고, 이주했다.     

탈서울은 타의적이었지만, 어디 한번 자발적으로 주체성 있는 지방러가 되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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