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게 봄맞이는 희망차다. 봄기운이 움찔거릴 무렵이면 흘러나오는 많은 노래들이 추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왔음에 설레여하고 텔레비전에는 얼었던 계곡물이 녹아 졸졸졸 흘러내리는 장면이 날씨 소식을 시작으로 비워두기 애매한 화면 이곳저곳을 채운다. 백화점과 크고 작은 상점들도 봄을 맞이하게 된 것을 축하하며 판촉에 열을 올린다. 세상 모두 불쑥 다가오는 봄에 무척 흥분한 것 같다.
스키 마니아에게 봄맞이는 탐탁지 않은 일이다. 그저 스키를 좀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봄이 왔구나 하고 다음 겨울을 기다리며 그동안 살아온 봄의 일상을 살아가겠지만 1년 내내 겨울만 기다리고 겨울만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소위 스키 환자들에게 봄은 얘기가 다르다. 우리나라처럼 겨울 기온이 혹독하지 않고 지형이 높지 않아 겨울이 채 가기도 전에 쌓인 눈부터 녹아버리는 곳에 사는 스키 환자들에게 매년 어김없이 짧은 겨울을 서둘러 밀어내는 봄은 끝없이 반복되는 고통을 감내해내야 하는 시지프스의 시련과도 같다. 보통은 겨우내 공들여 연습해도 잘 안되던 것들이 이제 좀 되려나 싶어질 즈음이면 어김없이 봄이 오면서 시즌이 끝나게 되니 안 그래도 반갑지 않은 봄기운이 얄궂기까지 하다. 이렇게 정복을 눈앞에 두고도 완성하지 못한 기술은 다음 시즌이 시작되면 가차 없이 처음부터 다시 연마해야 하기 마련이라 그야말로 시지프스의 시련이다.
아무튼 뭐가 급한지 서둘러 찾아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겨울을 이만 보내고 봄을 맞이하긴 해야 한다. 깔끔하게 받아들이고 정상적인 일상을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떠나는 겨울이 못내 아쉽다. 달갑지 않지만 지난겨울을 정리하며 마지막으로 질척거려본다.
질척거리며 봄을 맞이하는 첫 단계는 스키복을 세탁하는 일이다. 스키복은 대체로 가격이 비싸고 제조사의 주장에 의하면 섬유에 이런저런 기능들이 구현되어 있다. 과학의 힘이다. 하지만 정작 내 수준에서 필요한 기능은 따뜻하고 방수 잘 되는 옷이면 충분하다. 아마 제조사에서 자랑하듯 풀어놓는 이런저런 어려운 첨단 기능들에 대한 설명도 결국 이 옷은 따뜻하고 방수도 잘된다는 말을 과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믿는다. 스키복 세탁의 핵심은 이 첨단 기능들을 잘 보존하는 것이다. 요즘은 기능성 의류 세탁을 전문적으로 해주는 세탁 업체가 있어서 스키복 세탁도 깔끔하게 해 주고 방수 기능도 잘 살려주긴 하는데 가격이 많이 비싸다. 내 스키복과 아내의 스키복, 그리고 지난겨울에 몇 번 입지 않았지만 몇 개월 보관을 위해 세탁을 해야만 하는 여벌의 스키복까지 합해 몇 벌을 맡기면 비용이 만만치 않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다른 사람의 손에 스키복 세탁을 맡기는 것은 겨울을 보내며 최대한 질척거려야 하는 스키 환자에게 적절한 행동이 아니다.
어느 한가한 날을 잡아 스키복을 모두 싸들고 집 근처 코인빨래방으로 향한다. 코인 빨래방의 대용량 세탁기에 스키복을 모두 넣고 기능성 의류용 세제를 넣어 세탁기를 돌린 후 기다리는 동안 빨래방 옆의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 와서 빨래방 한켠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평일 오후의 빨래방은 은근히 집중이 잘되는 곳이다. 빨래가 다 되면 이제부터 스키복의 첨단 기능을 되살리는 아주 중요한 작업이 남는다. 기능성 의류용 발수처리제로 발수 처리를 하는 일이다. 사실 빨래방으로 스키복 세탁을 하러 가는 이유가 이것인데 발수 코팅을 위한 열처리를 집에 있는 세탁기로 하려면 한 번에 한두 벌씩 여러 차례 건조를 돌려야 하니 그보다는 물에 빠진 황소도 말릴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빨래방의 건조기를 사용해서 한 번에 열처리를 하려는 것이다. 발수처리제 병에 붙어 있는 라벨의 설명대로 발수처리제를 세탁기에 넣어 추가 헹굼을 돌려 스키복에 골고루 적신 후 대형 건조기에 넣는다. 한 시간 정도 중저온으로 건조기에서 돌고 나온 스키복은 깔끔하고 뽀송하다. 손에 물을 묻혀 스키복 표면에 뿌려보면 물방울이 또르르 예쁘게 굴러 내린다. 비싼 발수처리제의 효과에 만족스러워하며 스키복 세탁을 마친다. 이제 집에 돌아와 옷걸이에 걸고 비닐로 곱게 덮어서 다른 겨울옷들과 함께 고이 모신다. 겨울이 한걸음 멀어졌다.
두 번째 단계는 스키를 정비하는 일이다. 스키복 세탁은 결국 빨래방의 세탁기와 건조기가 수고하는 일이지만 스키 정비는 정비하는 사람의 손을 많이 타는 일이라 섬세한 기술로 소문난 전문가들이 몇 분 계시다. 이분들의 손에 맡기면 몇만 원의 비용에 새 스키처럼 멀끔해져서 돌아오긴 하는데 시즌이 끝나면 정비해야 할 스키가 여러 대라 비용이 만만치 않다. 정비를 직접 하는 것은 나 같은 초보가 하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니 힘이 들더라도 시간을 끌며 질척거리고 비용도 꽤 많이 아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일이다.
정비를 위해서는 스키를 작업 테이블에 고정할 바이스와 엣지 각도기, 여러 종류의 파일과 다이아몬드 숫돌, 스키 베이스에 입힐 왁스 그리고 왁스를 녹여서 바르기 위한 다리미 같은 몇 가지 장비가 필요하다. 대부분 장비는 그동안 야금야금 사모아서 이미 갖추고 사용해 왔는데 이번에는 낡은 다이아몬드 숫돌을 버리고 새 숫돌 세트를 중국의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주문했다. 물건을 받는데 2주 남짓 걸렸으니 이 핑계로 겨울과의 작별은 그만큼 늦춰진다. 배송을 기다리는 일이 지루하지 않은 몇 안 되는 경우일 것이다. 주문한 숫돌이 도착하면 이제 베란다에 작업용 테이블을 펴고 테이블에 바이스를 설치한다. 손바닥 면에 코팅이 되어 있는 작업용 장갑과 방수 방진 재질의 작업용 앞치마까지 두루면 드디어 준비가 끝난다. 작업용 테이블에 공구를 늘어놓고 장갑을 끼고 앞치마를 두른 채 테이블 옆에 서서 거울을 보면 제법 전문가 느낌이 나는데 실상은 스키 한대 정비에 반나절은 쏟아부어야 하고 정비의 결과물이 제대로 나온다는 보장 따위는 없는 초보 정비사일 뿐이다.
스키를 한 대씩 바이스에 고정하고 파일로 엣지를 한번 갈아내고 다이아몬드 숫돌로 곱게 다듬는다. 고수들이 정비하는 동영상을 보면 곱게 갈아낸 면이 거울처럼 매끄러워 사람의 얼굴이 비칠 정도인데 내가 하는 작업은 거친 숫돌에서 시작해서 고운 숫돌로 단계를 밟아가며 정성 들여 한참을 연마해도 좀처럼 고수들의 결과물처럼 고운 면이 나오지 않는다. 오기가 생겨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낡은 스키로 연습도 몇 차례 해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만의 영업비밀이라도 있는 것 같다. 그래도 한참 하다 보면 얼굴은 비치지 않을지라도 적당히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온다.
양쪽 스키의 엣지를 모두 날카롭게 갈아 곱게 다듬고 나면 이번엔 왁싱이다. 스키의 바닥이 하늘을 향하도록 뒤집어서 바이스 위에 올리고 다리미로 왁스를 녹여 스키 바닥에 골고루 발라 식힌다. 왁스를 바르고 문질러 매끌거리게 하는 작업은 어린 시절 나무로 된 학교 복도에 납작한 깡통에 들은 왁스를 발라 걸레로 문지르며 청소를 하던 것과 비슷하다. 왁스를 바른 후 두껍게 발라진 여분의 왁스를 벗겨내고 하염없이 문질러 바닥에 광이 나도록 매끌거리게 한다. 다만 이번에는 몇 개월간 보관을 해야 하니 벗겨내고 문지르는 일은 생략한다. 지루하고 힘도 많이 들고 벗겨낸 왁스가 바닥을 미끄럽게 만들어 한동안 베란다에 나갈 때마다 한 번씩 비틀거리게 만드는 과정인데 안 하게 되니 다행이다. 이렇게 해서 겨울이 또 한걸음 멀어졌다.
엣지 정비와 왁스를 모두 마치면 공업용 랩으로 스키를 둘둘 말아 감싼다. 공기가 안 통하게 해서 날에 녹이 스는 것을 막고 베이스의 산화를 막는 과정이라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의문이 있지만 겨울을 최대한 붙들고 있어야 하니 이 단계도 끼워 넣는다. 공업용 랩이 말려있는 롤은 원래 기계에 넣어 돌리면서 랩핑을 하도록 나온 것이라 집에서 스키와 같은 긴 물건을 손으로 랩핑 하기에는 많이 무겁고 크다. 그래서 이 과정이 의외로 힘도 들고 작업 후 결과물을 보면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싶게 엉망이다. 그래도 예전에 사둔 공업용 랩이 아직 십 년을 넘게 스키에 사용해도 남을 지경이라 열심히 사용해본다.
랩으로 포장까지 마치면 다음 겨울을 기다리기 위한 스키 보관 준비가 끝난다. 지난 시즌에 사용한 스키 모두 이 작업을 해서 햇빛이 직접 들지 않는 뒷베란다에 세워둔다. 랩에 휘감겨 가지런히 세워져 있는 스키들을 보면서 뿌듯한 성취감과 헛헛한 허점함을 잠시 동안 속절없이 받아낸다. 내 스키장비들과 아내의 장비들 모두 정비해서 세워두는데 4일이 걸렸다. 4일 내내 이것만 한 것은 아니니 이 정도면 신속한 작업이다. 몇 년째 해오니 이제 나도 많이 능숙해졌나 보다. 공구를 주문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별 의미 없지만 정비 일정을 잡고 스키복을 세탁하고 스키 장비를 정비하고 보관하기까지 스키장이 시즌 영업을 마감할 때 락카에서 장비를 빼내 온 뒤로 꼬박 한 달이 걸렸다. 겨울은 이제 갔다. 그래도 남들보다 한 달 더 겨울이었다며 위안 삼는다.
세상 모두 봄맞이에 들떠 있을 때 홀로 겨울을 보내주느라 구슬땀을 흘렸다. 이렇게 가버린 겨울이 몇 개월 후 다시 돌아오면 또 잔뜩 신이 나서 베란다에 잠재운 장비들의 비닐을 벗기고 겨울산으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조금 늦었지만 일단 이 봄을 격하게 환영해야겠다. 어서 와 봄. 그리고 어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