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동호회는 각자 개인 탁구동호회가 있는 사람들이 직장부 탁구대회를 나가기 위해 만들어졌다. 평소에는 자신의 동호회로 대회에 출전해 서로 경쟁팀으로 만나지만, 직장부 탁구대회가 열리게 되면 직장 이름으로 한 팀이 되어 출전한다. 직장동호회는 가입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었다.
직장동호회는 주말 오전, 개인 탁구장을 빌려서 운영된다. 난 한 달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업무가 많을 때는 바빠서 못 갔고, 시간이 될 때는 집 근처 걸어가는 탁구장을 두고 차를 타고 직장 탁구장에 선뜻 가지지 않아서다. 아직 기초연습 시간이 필요한 나에게 대부분 복식 친선 게임을 하는 그곳은 ‘글쎄~’였다.
그래서 탈퇴를 결심했건만, 탈퇴는커녕 스스로 2년 임기의 임원까지 맡았다. 직장동호회는 30여 명 회원 중 퇴직자가 10명 남짓 된다. 회장, 부회장, 총무, 고문, 감사, 경기이사, 홍보이사, 재무이사 등 기존 임원진이 또 10명이다. 이제 10명 조금 넘게 남은 사람 중에 신규 임원을 찾아야 했다. 직장 탁구장에 뜸한 동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성가실 게 뻔한 봉사직을 수락하고 마지막 남은 임원 자리 하나를 두고 고심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건 아니야! 너 탈퇴할 거잖아’라고 했지만, 이미 “그럼 내가 할게”라고 말해버렸다.
4월 6일 토요일, 올해 제주도 내 직장부 첫 대회가 열렸다. 최하위 실력에 9부라 살짝 망설였지만, 신청했다. 대회 날은 직장 탁구장에서 몸을 풀고 함께 대회장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대회 날 아침, 서둘러 직장 탁구장에 도착했지만 서먹한 회원들만 하나둘 등장했다.
10여 년 전 부서 내 다른 팀에서 근무했던 동갑내기 회원이 말을 했다. 그와는 몇 년 전 탁구장에서의 불쾌한 사건으로 최근까지도 대화가 별로 없던 사이였다. “오늘 대회는 참가하려고 안 했는데 어쩌다 하게 됐네. 우승은 어렵고 그냥 해야겠다. 탁구는 아무리 해도 한계가 있는 거 같아. 안 늘어.” 남자는 초보가 8부부터 시작인데 그는 몇 년째 8부다. 좀처럼 말을 섞지 않는 내가 지난 기억을 잊은 것인지 그의 말에 대꾸했다. 어쩌면, 나의 침묵이 그의 말에 ‘동의’라는 인상을 줄까 봐 입을 열었는지 모른다.
“한계야 있을 수 있지. 내가 지금 아무리 열심히 연습한다고 관장처럼 되기는 어렵겠지. 불가능일 수도 있고. 그래도 노력하면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 그게 어디야. 조금씩 발전하는 거잖아. 나한테도 우리 동호회 사람들이 말하거든. 처음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잠시, 나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네가 많이 나아졌다고? 그게? 그러니까, 너는 그게 끝이야!”
생각지도 못한 그의 말에 가슴이 꽉 막혀 숨이 멎을 거 같았다. ‘뭐라고 내가 여기까지라고. 내 한계가 여기까지라고.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해. 관장님도 잘하고 있다고 하는데. 네가 뭔데!’ 이내 발끝에서 불꽃이 치밀어 머리로 뿜어져 나갔다. 불길에 휩싸인 듯 정신이 아득했다. 내가 그보다 힘이 세지 않아서, 내리찍을 돌멩이가 내 옆에 없어서, 아직 내 이성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게 하는 거냐’, ‘너 때문에 안됐네’ 그의 일상 속 사소한 말속에 ‘존중’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막상 내가 당하고 보니 어찌할 바 몰랐다. 불과 몇 년 전, 바로 여기서 내게 했던 예의 없는 행동과 우월과 강압으로 조롱하던 쓰레기 같은 말들이 떠올랐다. 온몸이 떨려왔다. 다짜고짜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게 바로 내가 너를 싫어하는 이유야!”
직설적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아직 이른 시간, 그곳에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탁구를 배우겠다고 낯선 탁구장을 혼자 다니며, 오랜 기간 버틴 강단 있는 사람도 거기에 없었다. 나약하고 외로운 사람만이 그곳에 있었다. 오름부 언니, 동생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울지 않았다.
무거운 마음을 꽁꽁 감추고, 하나둘씩 속속 오는 회원들과 연습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자 마음이 놓였다. 사람들과 함께 대회장으로 갔고, 오후 내내 대회를 치렀고, 저녁 식사까지 무사히 버텼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웃으려고 긴장한 하루였다. 침대에 누웠다. 몸은 지쳤지만, 정신은 또렷하게 몇 년 전 불쾌한 사건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절실히 사람과 탁구 치고 싶은 그때, ‘마음 사기’의 기억까지도 소환해 왔다.
자기가 총무로 있는 탁구동아리에 들어오려면 자기소개서가 있어야 한다기에 고민하며 쓰던 밤. 다음날 사무실 직원에게 조심스럽게 보여주며 한 번 읽어봐 달라고 부탁했던 일. 나도 이제 같이 탁구 칠 사람이 생길 거라며 설레던 기억. 동아리에서 운동할 때 사람들은 무슨 옷을 입냐고 물어봤던 기억, 약속된 자기소개서에도 불구하고 회장과 협의해 봐야 한다는 계속된 핑계, 그런 동아리 안 들어가겠다고 말하고 서러워서 펑펑 울었던 밤.
그리고 나중에 알게된 선배의 뜻밖의 말.
“자기소개서라니 무슨 소리야. 그런 거 들어본 적도 없고. 그런 규정도 없어. 자기 돈 내는 것도 아니고 문화원 사업으로 하는 거라서, 그냥 참여만 해달라고 하는 건데. 그래서 나도 가입한 거고. 회장이랑 총무가 장난친 거 아니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진작 알았으면 말해줬을 텐데, 내가 더 미안하다.”
이제는 무시해도 될 법한 쓸모없는 기억들. 다른 팀이지만 같이 근무했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도와줄 거라 기대했던 어리석음. 조롱 섞인 그의 말이 자꾸 귀에서 맴도는 듯했다.
다시 생각해 본다. 내가 진짜 탈퇴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탈퇴를 결심했던 내가 임원까지 맡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마음에 응어리진 무언가, 그가 있는 불편한 환경이 역겨웠나 보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 탈퇴가 아쉬웠나 보다. 일상에 존중이 스며있는 따뜻한 사람들이 좋았나 보다. 사람을 미워한다는 게 불편해서 내 안의 어둠을 몰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이제 애쓰지 말자. 싫은 사람을 싫어하는데 죄책감은 갖지 말자. 대신 감사한 사람들에 집중하자. 선택과 집중. 내가 선택한 사람들과 내가 선택한 탁구생활에 온 마음을 다하자. 마지막까지 나의 오늘을 지켜낸 강인함을 칭찬하자. 오늘도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