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장배 탁구 대회' 개인전이 끝났다. 점심시간 이후부터는 단체전이다. 오전에 치러진 개인전으로 말하자면, 예선전에서 조 2위로 본선에 진출했다. 하지만, 본선 첫 경기에서 바로 아웃 됐다. 5세트 듀스까지 가는 접전이었지만 패했다. 상대가 잘 치는 회원이라 긴장도 됐고, ‘내가 이길 수 있다.’라는 믿음이 약했다. 실력 못지않게 중요한 게 ’ 자신감‘인데 아직 그 아이는 내 주변만 서성이고 있다.
이제 단체전이다. 단체전은 3명이 3 단식으로 진행된다. 라켓을 탁구대에 동시에 올려놓아 팀별 1, 2, 3 순서를 정한다. 가방에서 라켓을 꺼냈다. 어라! 분명히 내 가방인데 라켓은 내 것이 아니다. 가장자리를 두른 테이프가 예쁘다. 내 라켓에는 없는 것인데. 손잡이 밑에 이니셜이 적혀있다. ‘누구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오전에 치른 개인전 예선 상대 이름이다. 주위를 살피니 저만치에 그녀와 같은 동호회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혹시 이 라켓 은주 언니 라켓일까요?” “맞네. 맞아요. 이번에 러버도 바꿨고, 이니셜도 맞아요.” “제가 지금 단체전 경기를 해야 해서요. 언니 어디 있나요?” “어떡하죠, 오전에 개인전 끝나고 제주시 넘어갔어요”
시간이 없다. 그냥 게임을 하는 수밖에. 내 라켓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괜히 공도 잘 안 들어가는 거 같다. 오전에 치른 경기보다 훨씬 쉽게 풀어갈 수 있는 경기를 어리바리하게 망설이다 졌다. 우리 팀 회원도 졌다. 단체전 3개 팀 중 3위로 예선 탈락이다. 오늘 경기는 여기서 끝이 났다.
며칠 후 탁구장에 가자, 고수인 백두부 회원이 말했다. “누가 라켓 가져왔던데요. 탁구라켓 바꿨다면서요?” “네, 지난 주말 서귀포 대회에서요. 오전 개인 예선전 마지막 경기에서 바꿨나 봐요. 오후에 단체전 순서 정할 때에야 알았어요. 그러고 보니 본선 첫 경기 5세트를 남의 라켓으로 했네요.” “아니, 5세트나 하면서 라켓 바뀐 것도 몰랐다고요? 라켓 잡는 느낌으로도 알 텐데. 러버가 다르니 공치는 느낌도 다를 테고.” 백두부 회원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그런데 몰랐어요” “역시, 오름부네. 최고!” 나도 따라 웃었다. 어쨌든 라켓이 다시 내 품으로 돌아왔으니 다행이었다.
다음 날, 핸드폰에 모르는 번호가 찍혔다. “여보세요!” “나, 이은주예요.” “아!, 언니!, 라켓 잘 받았어요. 감사해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라켓을 잘못 가져온 거 같아요” 라켓이 언제 어떻게 바꿨는지는 모르지만, 대회 때마다 정신이 들락날락하는 나를 볼 때 분명 내 실수가 더 클 터였다. “아니야!, 예선전이라 3세트만 했잖아. 생각해 보니까 2세트 끝나고 잠깐 쉴 때, 서로 탁구대 자리 바꾸면서 그 자리에 있던 상대 라켓 잡고 친 거 같아. 경기 끝나서는 바로 인사하고 나갔으니까 바뀔 일이 없어.”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지막 세트를 남의 라켓으로 했다는 말이다. 우린 진정 초보 오름부가 맞았다.
지난 주말 탁구장에 갔을 때다. 고수들이 막 게임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랠리가 시작되자 누군가 말했다. “잠깐! 공 소리가 다른데요. 중국식 점착러버 같아요” 이건 또 무슨 말인지. 그들의 말을 들어보았다. 탁구라켓 앞뒤에 붙이는 고무가 ‘러버’인데 중국식 점착러버는 마찰력이 높아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러버와 좀 다르다는 거다. 라켓에 공 맞는 소리만 들어도 러버의 종류를 알 수 있다니. 그들이 자기 라켓이 아니라는 것을 모른 채 5세트까지 게임할 일은 결코 없겠지.
탁구를 두 번째 사랑이라 여기는 내가 어찌 라켓 바뀐 것을 몰랐을까? 내 사랑의 허술함이 놀랍다. 전장에 나가는 군인에게 총이 있다면, 탁구인에게는 탁구라켓이 있다. 내 손에 꼭 맞는 나만의 라켓. 얼마만큼의 긴장감이 내 눈을 멀게 해 라켓도 못 알아보게 했을까? 대회 때마다 긴장 속에 뻣뻣이 서 있다가 두 발을 제대로 떼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나다. 이번 예선전도 1 대 1 상황에서 마지막 3세트를 지면 예선 탈락이었다. 어떤 정신이었는지 3세트 경기 내용은 기억에 없지만, 가까스로 이겼다. 연이어 본선 첫 경기가 진행됐다. 상대는 이미 알고 있던 잘 치는 선수였다. 나도 잘 치고 싶었다. 상대 서브가 낯설었다. 서브에서 점수를 내줄 순 없었다. 경기 내내 머릿속은 무조건 공을 넘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덕분에 5세트 듀스까지 가는 동안 내 사랑 라켓은 다른 사람 품에 있었다.
라켓아! 미안하다, 사랑한다
내가 눈 뜨고도 내 라켓도 못 알아보는 진정 초보라는 걸 알게 됐지만, 그래도 나의 바람을 너에게 전하고 싶다. 내 손에 폭 감기는 너의 실루엣을 손끝으로 느끼기를. 너의 완벽한 무게의 편안함을 기억하기를. 아무리 긴장했어도 너만큼은 제대로 품고 가기를.
다시 돌아온 라켓을 위해 빨강, 검정 새 러버를 준비했다. 이번엔 느낌 있게 쳐보자. 라켓에 공이 맞는 소리에 귀를 열고, 공이 날아가는 궤적에 눈을 뜨고, 임팩트 순간 오른손의 세밀한 감각을 알아채자. 네가 내 라켓이라는 것을 잊을 수 없게 온몸으로 느껴보자. 언제나 그렇듯 신나게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