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떠난 뒤에서야 보게 되는가
새벽 네 시.
도시의 숨결이 가장 얇아지는 시간이었다.
평소보다 더 이른 알람이 울렸지만, 나는 쉽게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어둠은 사그라들고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전날 밤부터 한 사람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무 말 없이 사라져 버린 사람.
어제까지 내 옆에서 일상의 작은 조각들을 나누던 사람이
흔적도 없이 도시에서 지워져 버렸다.
몇 해 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민자 H는
언제나 조용한 사람이었다.
어디에 놓아도 큰 소리 내지 않을 것 같은 사람.
그러나 그 조용함 속에 어떤 금이, 어떤 흔들림이 있었는지
우리는 누구도 몰랐다.
그가 떠난 뒤 남겨진 방은
너무 단정해서 오히려 쓸쓸할 정도였다.
옷장에는 닳고 오래된 작업복이 몇 벌 걸려 있었고,
편의점에서 산 듯한 얇은 이불이 정성스레 개어져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작은 종이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거기에는 단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감사했습니다.”
그 말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이민자의 삶을 오래 들여다보면
끝내 말할 수 있는 문장이
이 짧은 인사뿐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고맙고, 미안하고, 말하지 못했고,
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에 걸리다가
결국 남는 건 ‘감사했습니다’라는 짧은 문장 하나뿐이다.
그 안에 고단함도, 두려움도, 외로움도,
말하지 못한 수많은 사정들도 함께 들어 있다.
H는 늘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침묵에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아침에는 청소 일을 하고,
낮에는 홀 서빙을,
밤에는 공장에서 일을 이어갔다.
하루에 두세 가지 일을 하면서도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살아남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말은 영주권 없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단속에 대한 두려움,
일자리를 잃을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현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 심장이 먼저 멎어버리는 공포.
숨 쉬는 일조차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는 많다.
H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말하지 않았다.
투명한 사람들은 대개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침묵을 우리는 종종 오해한다.
괜찮아서 조용한 줄 알고,
도움이 필요 없어서 말하지 않는 줄 알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그들은 너무 바쁘고, 너무 고되고, 너무 외로워서
말할 틈이 없는 사람들이다.
H가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았다.
그가 사용하던 머그컵,
작업복의 해진 무릎,
그가 앉던 의자,
그가 떠난 공간에 남아 있는 미세한 온기.
그 모든 것이 너무 또렷해져
오히려 마음이 아렸다.
사람은 떠나고 나서야 보인다.
존재는 사라진 자리에서 더 선명해진다.
투명하다고 느껴졌던 사람들이
그제야 하나의 인생으로,
하나의 삶으로,
하나의 무게로 다가온다.
우리는 왜 사람을 떠난 뒤에서야 보게 되는가.
왜 그의 고단함을 미리 알아보지 못했는가.
왜 그의 어깨 위에서 흔들리던 외로움을
그가 있을 때는 보지 못했을까.
도시는 늘 바쁘게 돌아간다.
그러나 그 활기 아래에는
늘 이름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날, 조용히 짐을 싸고 떠나는 사람들.
소리 없이 사라지고,
그 사라짐마저 누구에게도 말해지지 않는 사람들.
작별은 어떤 이들에게는 사치다.
그들은 떠나면서 ‘잘 지내라’는 말조차 남기지 못한다.
그저 문을 닫고,
그 문턱을 넘는 순간
삶의 또 다른 가장자리로 스스로를 옮긴다.
나는 H의 마지막 흔적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남긴 단 세 글자가
도시의 새벽보다 더 깊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이 도시에는 H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
보이지 않는 일을 하고,
보이지 않는 상처를 품고,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가 보지 않아서 투명한 것이다.
그들이 투명해서 투명한 게 아니다.
한 번 마음의 초점을 맞추면
그들은 더 이상 투명하지 않다.
그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한 사람이고,
어떤 날에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
작은 가방 하나 들고
사라질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H가 떠난 뒤에도
도시의 아침은 어김없이 밝아 온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 도시의 또 다른 어딘가에서
오늘도 누군가 작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이유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으로,
다시 시작해야 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이야기는 언젠가 또
이 연재 속으로 흘러올 것이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보이게 되는 것,
그것이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한 것으로, 특정 인물이나 사실을 단정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