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은 어디쯤 와 있는가

이민자의 시선으로 마주한 미국의 기억의 날, Juneteenth와

by 운조

Strange Fruit




해방은 선언으로 끝나지 않는다. 삶에 닿아야 비로소 그 의미를 온전히 꽃피운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마주한 미국의 준틴스. 올해 여름, 나는 이 낯선 땅에서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묻는다.


미국에서의 첫 여름, 6월의 달력은 그저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의 강줄기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올해, 나는 문득 *"준틴스(Juneteenth)"*라는 단어와 마주했다. 그 낯선 이름 앞에서 나는 깨달았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나는 아직 이 나라의 깊이를 온전히 헤아리지 못했음을. 가슴 한켠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익숙한 미국의 공휴일들, 메모리얼 데이, 독립기념일, 노동절, 추수감사절. 이민자인 나에게 그것들은 그저 달력 위에 붉게 새겨진 축제의 이름일 뿐이었다. 깊은 의미를 들여다볼 겨를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던 기계적인 일상.


그러다 6월 19일, 달력 위에 선명하게 박힌 준틴스. 처음에는 또 하나의 평범한 미국식 휴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내 알게 되었다. 이 날은 미국이 가장 뒤늦게 건넨, 가장 오래된 *"미안합니다"*라는 고백임을.


준틴스는 '6월(June)'과 '19일(Nineteenth)'을 합친 말이다. 그 시작은 미국의 가장 아픈 과거, 노예제도의 그림자와 맞닿아 있다. 1863년 1월 1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역사적인 *노예 해방 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발표했다. 그러나 남부의 많은 주에서는 이 선언이 무시되었고, 특히 연방군의 통제가 미치지 않던 텍사스 같은 지역에서는 노예제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시간은 흘러 전쟁은 끝났지만, 자유는 아직 모든 이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1865년 6월 19일, 연방군 고든 그레인저 소장이 텍사스 갤버스턴에 도착하여 *‘제3호 일반 명령’*을 낭독했다. 그제야 텍사스의 약 25만 명의 노예들은 자신들이 이미 2년 반 전부터 자유로운 존재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 날이야말로 자유가 비로소 도달한 순간, 진정한 해방의 서막이었다.


이듬해인 1866년부터 텍사스의 해방 노예들과 그 후손들은 6월 19일을 '자유의 날', '희년의 날'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그 전통은 흑인 공동체의 기억 속에 깊게 뿌리내렸고, 1960년대 민권운동 시기에는 다시금 저항과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21년 6월 17일. 조 바이든 대통령은 준틴스를 연방 공휴일로 공식 지정했다. 미국은 매년 6월, 그 아픈 기억을 기어이 달력 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진정한 기억을 다짐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왜 그동안 나는 이 날을 몰랐을까. 이 땅에 살면서도, 이 나라의 깊은 상처에 이토록 무심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저려왔다. 준틴스는 단지 흑인의 날이 아니었다. 그 날은 한 나라가 얼마나 더디게 사과하며, 그 사과를 어떻게든 잊지 않으려 애쓰는지 보여주는 고백의 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처럼 아픈 역사를 숨기지 않고 기억하려는 나라의 용기에 감탄했다.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직면하고, 공휴일로까지 지정해 모두가 함께 기억하도록 만든다는 것. 그 자세 하나만으로도 나는 다시금 미국이라는 나라를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 고백은 나를 향해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너는 지금 어디쯤 와 있니? 너의 자유는 진정으로 네게 닿았니?"


미국에 온 수십 년이 흘렀지만, 나는 이 날을 올해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쩌면 너무 늦지 않았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속삭이고 싶다. 왜냐하면, 나 역시 이 낯선 땅에서 또 다른 방식의 해방을 기다려온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문득, 몇 해 전 미국 사회와 문화를 공부하던 중 교재에서 처음 접했던 한 노래를 떠올렸다. "Strange Fruit".

"Southern trees bear a strange fruit / Blood on the leaves and blood at the root..."

남부의 나무에 열리는 기이한 과일, 잎사귀와 뿌리에까지 스민 피. 그것은 과일이 아니라, 린치당한 흑인의 참혹한 몸이었다.



그 노래를 처음 읽었을 땐, 그저 충격적인 역사적 사실로만 느꼈다. 하지만 준틴스를 알고 난 지금, 그 노래는 단지 흑인의 아픔이 아니라, 이 땅의 해방이 얼마나 더디게, 얼마나 어렵게 도달했는지를 웅변하는 증언처럼 들렸다.


세상 모든 이에게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자유가 있다. 어떤 이는 언어의 장벽 때문에, 어떤 이는 피부색이나 신분 때문에, 혹은 마음속 깊은 상처 때문에. 자유는 선언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삶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비로소 진정한 해방이 된다.


나는 이제, 이 여름의 초입에서 내 삶에 도달한 작고도 깊은 자유의 순간들을, 한 글자 한 글자 나만의 준틴스로 써 내려가고 있다. 당신의 자유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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