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문턱에서 피는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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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미국에서의 하루는 언제나 장미 향으로 시작된다.
창문을 열면 붉고, 노랗고, 분홍빛으로 물든 장미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난다.
그 빛깔만큼이나 다채로운 향기가 바람에 실려 들어와, 나를 부드럽게 깨운다.
이 꽃들은 단지 아름다움을 뽐내는 존재가 아니다.
혹독한 추위와 뜨거운 햇살을 견뎌내고 다시 피어나는 장미의 모습에서
나는 생명력과 끈질긴 아름다움을 본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은가.
때론 붉은 열정으로, 때론 노란 기쁨으로, 또 분홍빛 사랑으로 피어나는 다양한 시간들.
장미는 아무 말 없이, 그 모든 삶의 순간을 응원하고 있는 듯하다.
장미는 미국의 상징이기도 하다.
1986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장미를 국화로 지정한 이후,
장미는 이 땅에서 사랑, 열정, 헌신, 다양성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전국 어디에서든 피어나는 장미는,
마치 이민자들의 삶처럼 각자의 색깔과 향기로 미국을 채워간다.
그 의미를 알고 나니, 내 창가에 피어난 장미들이
이국땅에서 다시 피어나는 내 삶을 환영해주는 듯 느껴졌다.
가을이 오면 이 동네는 사과나무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특히 제프네 집 앞마당에 서 있는 사과나무는 내게 특별하다.
여름 내 푸르던 잎들 사이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던 사과들은
가을 햇살 아래 연두색에서 옅은 갈색으로 익어간다.
작년에 처음 맛본 그 사과는 달고 물이 많았다.
우리나라의 나주배처럼 시원한 단맛을 품고 있었고,
익숙한 새콤한 사과맛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인상을 남겼다.
어제 제프를 마주쳤을 때, 나는 조심스레 그 이야기를 꺼냈다.
“작년에 사과 하나 따먹었는데 너무 맛있었어요.
현관문 두드려 더 따도 될까 고민했었죠.”
그 말에 제프는 웃으며 말했다.
“그 사과들은 다람쥐들 먹으라고 두는 거예요.
우리도 그걸로 잼도 만들고 사과주스도 만들죠.
올해도 열리면 꼭 따가요. 노크하고 오세요!”
그의 너그러운 말 한마디에,
이웃의 품이란 것이 얼마나 넉넉할 수 있는지를 다시 느꼈다.
그런데, 가을 햇살 아래 익어가는 사과를 바라볼 때면
나는 문득 고향 뒷마당의 감나무를 떠올린다.
빨갛게 익은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린 그 감나무 아래에서
우리는 가을을 맞이하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감을 따서 마당가 장독대 옆에 가져다 놓았다.
당시에는 냉장고나 냉동고가 귀했기에,
감은 장독 안에 짚을 깔고 저장해두었다.
겨울이 되면 그 안에서 말랑말랑하게 익은 홍시를 꺼내 먹었다.
잘 익은 홍시를 손바닥에 얹고 껍질을 살짝 벗긴 다음,
숟가락 대신 손가락으로 퍼먹던 그 맛—
달고 부드럽고,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 사라지던 그 감촉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시절 마당에는 감나무와 장독대,
그리고 햇살 아래 말라가던 고추와 콩, 들깨가 있었고
모든 풍경이 ‘가을’이라는 계절보다 더 선명하게 내 안에 새겨져 있다.
사과나무가 지금 나의 가을이라면,
감나무는 내 과거와 이어진 시간의 다른 이름이다.
스피노자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 말은 결국, 불확실한 내일에도 오늘을 살아가는 의지에 대한 시적 표현일 것이다.
사과나무든, 감나무든,
그 열매 하나하나가 우리가 내일을 살아내기 위해 오늘 심은 희망인지도 모른다.
문학 속에서도 사과와 장미는 특별한 상징이다.
<빨강머리 앤>에서 길버트가 앤에게 건넨 사과는
서툰 시작이었지만, 결국은 사랑으로 피어난 인연의 씨앗이었다.
앤이 그 사과를 던졌던 그 순간에도,
길버트의 마음속엔 조용히 싹튼 애정이 있었으리라.
장미 또한 많은 문학 작품 속에서 등장한다.
장미는 사랑이기도, 고통이기도 하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천국의 문턱에서 피는 장미는,
지상의 아픔을 이겨낸 자만이 바라볼 수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 피어난 이 장미는,
이민자로서 내가 견뎌낸 아픔 위에 핀 작은 천국인지도 모른다.
장미와 사과나무, 감나무.
이 세 식물은 지금 내 삶의 곁을 지나는 풍경이며, 기억이며, 희망이다.
봄이면 장미가 속삭인다.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추위 뒤엔 늘 꽃이 피어나.”
가을이면 사과와 감나무가 말한다.
“네가 살아낸 날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어. 이렇게 열매로 돌아왔으니.”
나는 이 자연이 들려주는 말 없는 위로 속에서 살아간다.
장미처럼 다시 피어나고,
사과나 감처럼 달고 깊은 시간을 준비하며,
나는 오늘도 나의 계절을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