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힘을 빼라
너무 바쁜 하루를 보냈다.
잠깐 집에 들렀더니 집 사람이 "백수가 과로사한다더니 당신이 그러게 생겼네." 한다.
저녁 약속 장소로 향하는 택시 안, 바쁜 걸음 탓에 숨이 가쁜 나를 돌아보며 의문이 든다.
'왜 이렇게 바쁜 거지?'
박사학위를 받고 나니 주변에서 덕담을 건넨다. "이제 강의를 해야 하는 것 아니야?".
강의란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저 "그러고 싶지요.."하고 말끝을 흐리는 게 요즘 모습이다.
이런 와중에 적극적인 후배가 한 교육기관의 담당자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미팅을 마치고 나오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얘기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후배가 성의껏 마련해 준 자리인데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담담하게 말하고 나온 게 아닌가 해서다. 하지만 이내 "그게 맞지"라고 되뇌며 발길을 옮긴다. 발걸음이 왠지 가볍다.
사회계약론을 주장한 홉스(Thomas Hobbes)는 자연상태에서 이기적 본성을 지닌 개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한없이 추구하며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전개한다고 주장한다. 생존을 위해 인간은 끝없이 경쟁하고 싸운다는 것이다.
은퇴자들이 한 번쯤 경험하는 심리가 있다. 한동안은 조직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난 것이 '자유’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 '자유’를 지속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오히려 얼마 못 가 뭔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이런 모습은 평생을 바쁘게 살았던 습관에서 연유한다기 보다, 현대의 삶이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이 그렇고 사회의 변화가 그렇다. 마라톤의 선두그룹에서 밀려나면 홀로 고독하게 달려야 하는 것처럼, 흐름에 올라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이 경쟁 대열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아 선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씩 옅어져 가는 느낌이 드는 것도 있다. '남과 비교하는 것'이다. 돈이 많고 명예가 높았어도 삶의 후반전에는 다시 처음의 고만고만했던 모습으로 수렴한다. 애써서 남을 이기려 할 일도, 이겨봐야 별 것 없다는 생각도 많아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우리는 '비교'라는 굴레에서 조금씩 발을 뺄 수 있게 되어 간다. 타고난 경쟁심리도 비교 본능도 때가 지나며 자연스레 수그러 드는 것이다.
이처럼 은퇴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은 홉스(Thomas Hobbes)의 주장을 무색케 하는 면도 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저녁 자리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이 판이하게 다른 4명이 둘러앉아 있다.
A는 은퇴를 했지만 '죽을 때까지 뭔가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주의다. 지금도 그는 두 가지 일을 하며 현역 때보다도 바쁘게 움직인다. 모임 날짜를 A의 일정에 맞춰야 할 정도다.
B는 '자유'를 더 강조한다. 이른 나이에 은퇴를 했지만 서두르지 않고 작은 벌이에 만족하며 가족을 챙기는데 진심이다. 15년 이상을 같은 패턴으로 살아왔는데 그동안 그의 생각이 흔들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C는 지난 연말까지 회사의 대표를 지내며 오랜 기간 현직으로 일해왔다. 말로는 "이제 좀 쉬겠다"라고 하는 데, 과연 어떤 삶을 선택해서 살아가게 될지 아직은 오리무중이다.
나는 이들의 정 중앙쯤에 자리한 느낌이다. '적당히 쉬고 싶고, 적당히 뭔가를 하고 싶고'. 은퇴한 지는 좀 되었으나 아직도 이제 막 은퇴한 C와 같은 상태.
이들은 각자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정답은 없다. 누가 옳고 그른 게 아니라, 각자에게 맞는 속도와 방향이 있을 뿐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이런 말이 있다.
"회오리바람은 아침 내내 불지 못하고, 소나기는 하루 종일 내리지 못한다. 천지도 이렇게 오래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는가"
한 여름 소나기는 느닷없이 힘차게 퍼붓고는 이내 스스로 힘이 빠져 사그라져 버린다. 하지만 보통의 비는 그저 비가 순하게 내릴 뿐이다. 자연도 억지로 힘을 주면 오래갈 수 없는 것이다.
건강하고 행복하길 원하면 '억지힘'을 빼야 한다.
어깨에 들어갔던 힘도, 말에 묻어있던 힘도, 세상과 사람을 보는 눈에 섞여있던 힘도 모두 빼고 유연해져야 한다.
이제는 서두르고 힘을 주기보다 힘을 빼고 물처럼 흐르는 무위의 삶을 부러워하고 따를 때다.
미팅에서의 모습이 다시 떠 오른다.
그리고 다시 되뇐다.
"그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