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

무식하면 용감할 수 없다.

by 구쓰범프

"또 모른다고 하네^^"

아내의 장난 섞인 반응에 순간 '아차' 싶었다. 언제부턴가 내 말속에 "몰라"하는 단어가 많아졌다고 아내의 피드백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곰곰이 돌아보니 은퇴 이후부터 무의식적으로 많이 사용하게 된 것 같다.


원인을 생각해 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직장에서는 협력을 통해 하는 일이 많아서, 내가 몰라도 남의 도움을 받으면 일이 해결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일을 내가 직접 해결해야 한다. 유일한 지원군은 아내뿐이다. 그러니 누가 물어오면 "몰라" 하거나 "할 수가 없겠는데.." 하며 물러서는 일이 잦아졌다.


이런 모습을 본 아내가 안타까웠던지 "몰라"라고 하기 전에 시도를 해 보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라 한다. 나 스스로도 그런 말을 자주 하다 보니 자신감이 갈수록 떨어지는 느낌이다. 뭔가 전환점을 찾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건 그래서이다.


심지어 젊어서도 이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꼭 그랬던 건 아닌 것 같다. 먼저 나서거나 드러내기를 좋아하지는 않았어도, 뒤로 물러서는 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내의 피드백은 여기에 한 술 더 뜬다. "몰라"를 자주 하는 게 겸손의 다른 표현이라면, 그건 겸손이 아니라 지나친 자기 검열이라는 거다.


게다가 지금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눈치 보는 시대가 아니라서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한다. 설령 모르는 게 있으면 배워서 하면 되지 뭐가 겁난다고 하냐고 일갈할 땐 유구무언이 된다.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물어만 보면 대답을 해 주는 것이 널려 있는 세상에서 뭘 자꾸 "모른다"고 하고 다녔나 싶기도 하다.


어찌 보면 알아보기를 거부하기 위한 게으름이 "몰라"로 방어막을 친 게 아닐까. 사실 직접 겪어 보면 그다지 대단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일도 아닌데, 미리 귀찮음을 차단하기 위한 선제공격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 나서서 대신해주고, 나는 슬쩍 무임승차하려는 게으름과 나태가 근원이 아니었나 싶은 반성이 되기도 한다.


심리학에 ‘요나 콤플렉스(Jonah Complex)’라는 게 있다. 구약의 요나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도 자신의 역할이 두려워 도망친 것처럼, 우리는 종종 실패가 아니라 ‘성장의 부담’을 두려워한다. 새로운 가능성 앞에서 “내가 과연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망설이다가, 차라리 시도하지 않기로 마음을 돌린다는 것이다. 나의 “몰라”도 어쩌면 그 두려움의 또 다른 말투였을지 모른다.


A는 나보다 연배가 한참 위인데 지금도 의욕적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는 갤럽 강점진단에서 '배움'이 첫번째 강점으로 나온 것을 확인한 후로는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 거침이 없어졌다 한다. "모르면 배워서 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으니 두려울 게 없다"면서.


후배 B는 하는 일을 여러 차례 바꾼 사람이다. 지금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강의 실력이 뛰어난 걸로 알려져 있다. 그 비결이 궁금해 물으니 "저는 최근엔 두려운 게 별로 없어요. 어려울 때마다 도망가지 않고 직접 부딪혀왔고, 그때마다 돌파구가 생기는 것을 경험했어요.", "그래서 어떤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일단 시도를 하고 봅니다.", "그러다 보면 몰랐던 것도 알게 되고,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라며 여유롭게 대답한다.


그러고 보니 그가 나에게 많이 하는 말이 있다. "누구는 처음부터 잘하나요?", "다 똑같아요.", "처음엔 다 초보예요."


주변의 말을 들어보면 겁먹고 꽁무니를 빼지만 않으면, 노력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도 같다. 하긴 아무도 대신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줄행랑을 치면 이루어지는 일이 있을 리 만무하다. 광야에 홀로 남겨졌다는 두려움을 가지기보다 '혼자서라도 걸어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 될 것이다.


이솝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이 처음 낙타를 보았을 때는 그 큰 몸집에 공포심을 느껴 겁을 먹고 도망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낙타가 온순하다는 걸 알고는 두려움이 사라져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는 이 동물이 무슨 짓을 해도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낙타를 우습게 보게 된 사람들은 굴레를 씌운 후에 아이들에게 주어 몰고 다니게 했다.


아무리 겁나고 두려운 일도 자꾸 하다 보면 겁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다.


우리 삶은 결코 완성된 채로 주어지지 않는다. 경험을 통해 조금씩 다듬어지고, 작은 시도가 쌓여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간다. 그 과정에 자신감을 가진다는 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더 나은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가려는 용기다.


아침에 글을 하나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평소 같았으면 "제가 능력이 없어요..." 하고 거절했을 텐데, 오늘은 웬 바람이 불었는지 일단 수락을 했다. '한번 시도해 보고 노력을 하면 할 수도 있겠지'라는 막연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버렸다. 오랜만의 변화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다. '부딪혀보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게 되지 않을까.'


아직 완벽하게 두려움을 떨쳐버리진 못했지만, 적어도 이제 "몰라"에 머물기보다 “모르면 배워서 하면 되지”의 태도로 바꿔보자는 마음은 분명해졌다.


덕분에 처졌던 어깨가 다시 스윽 올라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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