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수록 존경이 커지는 아이러니
모임에 나갈 때면 항상 '오늘은 말을 적게 하고 듣는 데 집중하자.'라고 다짐을 하고 나선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무거운 날은 언제나 이 결심을 지키지 못한 날이다.
술자리나 동창모임, 직장 회의에 가보면 말의 양과 질이 그 사람의 품격과 모임의 격조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말에는 그 사람의 인격, 가치관, 교양이 모두 배어 있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변이 화려한 것을 넘어 때와 장소, 그리고 상황에 맞는 말을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유형이 눈에 띈다.
A는 남들이 하는 얘기를 가만히 듣다가 상대방 말속의 단어를 끄집어내 유머를 던진다. 처음에는 다들 그의 위트에 배꼽을 잡는다. 그런데 대화 중에 이런 유머가 반복되니 자꾸 흐름이 끊기고 앞사람의 말이 희화화되면서 어느 순간 유머는 윤활유가 아닌 훼방꾼이 된다. 그를 자주 본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두고 '자꾸 웃어주니 계속한다'라며 불평 아닌 불평을 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B는 모임에 나오면 자랑을 많이 한다. 자신이 최근에 경험한 일들을 얘기하는 것이니 스스로는 자랑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듣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결국 자랑일 뿐인 말을 하고 있다. 다녀온 여행지며 근사한 식당, 그리고 만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털어놓는데 결국 돈과 인맥자랑인 셈이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다 같은 처지가 아님에도 그는 아직 자신이 자랑질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C는 모임의 시간을 대부분 자신의 말로 독차지하다시피 한다. 다른 사람들의 근황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자신의 생각을 설파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말을 끊기가 뭐해서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 질문도 던지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게 느껴진다.
D는 자신의 의견과 다르면 반드시 반론을 펼쳐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고야 만다. 어떤 경우는 사소한 것에까지 쌍심지를 켜고 덤비니, 사람들이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옳고 그름을 분별해야 하는 것은 알겠으나,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 땐 과하다 싶은 때가 많다.
이들의 공통점은 말이 앞선다는 것이다. 마음속에만 간직해도 좋을 것을 굳이 입으로 털어내다 남들의 눈총을 자초하고 만다. 본인은 분위기를 주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좌중의 피로감만 높일 뿐이니 엇박자도 이런 엇박자가 없다.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안전한 길은 말을 적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리더의 자리라면 더더욱 그렇다. 말을 너무 아끼면 무심하거나 화가 난 것으로 오해받기 쉽고, 한두 마디 거들다 보면 어느새 말을 독차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말수의 적정선을 지키는 게 필요한데, 만일 본인이 말이 많은 경우라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내 경우만 보더라도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하고 가도 술이 들어가거나 기분이 UP 되면 말이 많아지는 걸 막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 말들의 대부분은 후회가 따르는 내용인 경우가 많다. 위에서 말한 가벼운 언사, 자랑, 독점과 같은 것 말이다.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아무리 후회하고 미안하다고 해 본들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다. 특히 남의 마음에 상처를 준 말은 두고두고 그 사람의 머리와 가슴속에 깊은 자국을 남기기에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럴 때 말은 침묵만도 못 하다.
남들이 '언변이 좋다'고 칭찬한다고, 우쭐해서 말하기를 즐겨하다간 이런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자신이 그런 칭찬을 받을수록 자기가 하는 말의 내용과 품격을 따져보고 균형을 잡는 데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E는 만나고 오면 항상 마음이 편하다. 그는 리더이지만 말의 양을 조절할 줄 안다. 자신이 할 말도 적당히 하지만 남들에게 돌아가며 의견을 묻거나 관심사항을 건네는 식으로 좌중을 이끌어간다. 그가 주관하는 모임이 파하고 나면 누가 적고 많다할 것없이 모두들 적당하게 대화를 나눈 느낌을 받는다. 대화의 내용 또한 주변의 사소한 것부터 심각한 얘기까지 그리고 가끔 우스개 소리로 분위기를 가볍게도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만든다. 그를 만날 때마다 배우고 싶고 익히고 싶은 장점 중의 하나다.
조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말을 피해 갈 수 없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성공한 사람일수록 조리 있고 간결하며 상황에 맞는 말솜씨를 자랑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장황하거나 횡설수설하는 언변은 남을 매료시키는 데 한계가 있어서 아주 높은 자리까지 가는 데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조선시대에는 인재를 선발할 때 반드시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살폈다. 단순히 과거시험 성적만을 본 것이 아니라 용모, 말솜씨, 글재주, 판단력의 네 가지를 두루 갖춘 인물을 발굴하려 했다. 이중에 언변, 적절한 표현, 말의 논리와 조리성을 뜻하는 언(言)이 들어 있는 걸 보면 말솜씨가 출세를 결정하는 데도 중요한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세종대왕은 회의에서 말을 많이 하기보다 끝까지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마지막에 단 한두 마디로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대로 연산군은 긴 말과 잦은 지시, 심지어 사적인 말까지 쏟아내며 혼란을 키웠고, 결국 신하들의 신뢰를 잃은 왕으로 평가되어 있다. 말의 길이가 아니라 말의 무게가 리더십을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비록 출세와 연관되어 있지 않더라도 자신의 품위를 지키고 남들로부터 외면받지 않으려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되짚어 보기를 게을리해선 안된다.
말수는 적당한지, 경박하지는 않은지, 독선적이거나 위압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지는 않는지 등등 말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점검하며 그 무게를 깨달아야 한다.
말을 줄이면 역으로 많이 듣게 된다. 많이 듣는 사람은 더 깊이 이해하고, 더 지혜롭게 말한다. 비록 모두가 그렇지 못하다면 나부터라도 그렇게 해 보자.
편안한 귀갓길이 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