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 누구는 서슴없이 주고 누구는 가볍게 받는다
A는 만날 때마다 뭔가를 주지 못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자기 것을 푸는 데 거리낌이 없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자기 주머니의 돈이 나가야 하는 일이어서 머뭇거릴 일도 그는 서슴이 없다. 그런 그를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과 손이 작아지는 느낌을 받을 정도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받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주는 데는 인색한 경우가 많다. 이는 손실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의 본능적인 반응이어서 무조건 비난만 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가끔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 이들은 남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커서 손해 보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면 그렇다 치더라도 매번 반복된다면 그건 그 사람의 인성이요 몸에 밴 태도라고 봐야 한다.
주는 사람이 있으면 당연히 반대쪽에 받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받는 쪽의 태도다.
어떤 이는 받을 때 고마움을 표현하고, 언젠가는 갚으려는 마음을 갖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받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긴다. 마치 주는 사람이 남아서 주는 것처럼,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생각한다. 심지어 받으면서 시기나 질투를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관계는 결국 균열을 낳는다. 아무리 베푸는 사람이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상대의 무심함이 반복되면 지칠 수밖에 없다. 주는 사람이 원하는 건 대단한 보상이 아니라 최소한의 인정과 감사다.
조직에서도 상사와 부하 간, 그리고 동료 간에 이런 일들이 발생한다. 상사가 부하를 키우고 이끌어주지만, 부하가 성장한 뒤 그 은혜를 잊는 경우가 있다.
B는 C의 상사로 있으면서 모든 사람의 눈에 띌 정도로 C를 아끼고 키웠다. 주변 사람들 입장에선 편애라고 느낄 정도로 힘을 실어주었고 그 덕에 C는 동료들보다 빠른 승진과 좋은 보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을 아는 사람들은 둘의 관계가 평생을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B는 은퇴를 했고 C는 아직 잘 나가던 시절, 주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B와 C의 관계가 멀어져서 지금은 B가 주관하는 후배들 모임에 C는 가지도 않는다는 게 아닌가.
둘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B의 은퇴 후 C가 B를 찾지 않는 일이 오래되면서 서운함이 극에 달해 갈라서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비슷한 사유로 사달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사람 관계에서 서운함과 실망, 배신감으로 인해 균열이 오는 경우가 많은 걸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듯싶다.
어쩌면 준 사람은 많은 걸 주었다고 생각하고, 받은 사람은 별로 받은 게 없다고 여겨서 그렇게 소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의 마음을 준 사람보다 적게 생각하는 건 조심해야 할 일이다. 실수를 줄이기 위해선 상대가 준 것보다 크게 넓게 여겨야 내가 보답할 때 부족하지 않을 수 있다.
조선시대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해 규장각을 만들고 젊고 똑똑한 관료들을 뽑아 육성한다. 이때 키운 정조 라인 중 한 명이 정약용이다. 정약용에게 있어 정조는 스승이자 멘토였으며 정조 또한 정약용을 누구보다 총애한다.
이런 둘의 관계가 빛을 발하여 정약용은 많은 공을 세우고, 정조와는 군신의 관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마음을 나눈다. 하지만 정약용의 집안이 당시 금기시되던 천주교를 믿는 게 드러나면서 탄핵 상소에 직면하는데, 왕은 빗발치는 상소를 외면할 경우 오히려 정약용에게 더 큰 화가 미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한다. 상황이 진정되면 다시 부르겠다는 약속과 함께.
정약용은 그의 말을 듣고 관직에서 물러나 왕이 다시 자기를 불러 줄 날만 기다리며 산다. 이제나 저제나 정조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보름 뒤에 부를 테니 준비하고 있으라는 전갈을 받지만 하필 정조가 약속한 날을 하루 앞두고 세상을 떠난다. 정조는 죽음을 앞두고서 자신이 돌려주어야 할 것을 되돌리기 위한 안간힘을 쓴 게 아닐까 추측을 해 본다.
그 이후로 정약용은 관직에 다시 돌아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귀양살이까지 하다가 결국 세상을 뜨고 만다. 하지만 누구도 그가 정조를 미워했으리라고 상상하지 않는다. 정조는 약속대로 그를 부르고 죽었으니 운명이 둘을 못 만나게 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신뢰관계는 해피엔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주고받는 것이 별거 아니고 쉬운 일이라 여길 수 있지만 여간 조심할 일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관계에 있다면 돌려줄 방법을 항상 머릿속에 계산해 두고 있을 일이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말이 매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게 사람의 심사인 걸 감안하며 사는 게 안전한 길이다.
사람 관계의 균형은 주고받음의 태도에서 결정된다. 주는 사람은 계산하지 않고, 받은 사람은 잊지 않는 관계. 이 단순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원칙이 오래가는 관계의 비밀이다. 특히 작은 것이라도 은혜나 신세를 진 일이 있으면 보답의 기회를 만드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옛말에도 '베푼 것은 결코 생각하지 말며, 받은 것은 결코 잊지 말라'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