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와 현실, 중간에서 길을 찾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과거와 다른 풍경들이 하나둘씩 펼쳐지는 걸 보게 된다.
예전에는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면 일을 내려놓고,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요즘은 은퇴와 동시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이른바 '인생 1.5막'을 펼쳐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은퇴를 더 이상 쉼표가 아닌 새로운 출발점으로 보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 건강상태가 예전보다 좋아졌고, 사회생활을 계속하며 활력도 얻고 경제적 도움까지 받을 수 있으니, 도전할 기회가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실제로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해 가면서 '인생 1.5막'을 멋지게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은퇴자들에게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다만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은 정년을 마친 사람이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이제 앞으로 뭘 할 건데?”라는 질문을 받게 될 때다. 그동안의 노고를 축하해 주는 시간은 잠시뿐이고, 이내 새로운 숙제가 주어지면서 이제 좀 쉬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사람들조차 갈등에 빠지게 된다.
이때부터 선택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각기 다른 '인생 1.5 막극'을 보게 된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은퇴 후 새로운 명함을 건네며 활기차게 재도약한다. 하지만 간혹 맨땅에 헤딩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그동안 쌓아온 경력과 관계를 활용하는 무리수를 두다가 오히려 과거의 명예를 퇴색시키는 이들도 있다.
A는 최근에 사업을 시작했다. 새로운 출발을 하면서 꽤 신나 해 하는 모습이 은퇴 이후 답답해하던 것과 달라서 잘 되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후배들 사이에서 “A가 예전 후배들을 찾아다니며 일감을 부탁한다”는 이야기가 돈다. 네트워크를 활용해 상부상조하자는 의도 자체는 나쁠 게 없지만, '예전의 권위와는 사뭇 다른 모습에 일부에서 당황스러워한다'는 뒷 말은 그의 체면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끼게 한다.
세상은 돌고 도니 서로 돕고 산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도움을 청하는 사람 중 상당수는 현직에 있을 때 선배들의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하던 사람들이라는 데서 불편함이 생긴다. 자기는 손해를 보려 하지 않았으면서 필요할 때는 도움을 기대하는 태도가 문제의 씨앗인 셈이다.
예전 세대는 은퇴 후에도 후배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힘들어도 홀로 버티는 삶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00세 시대에 접어들며 많은 이들이 새로운 일감을 찾아 나서고 본의 아니게 후배들에게 부탁을 하는 경우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명예보다는 실리를 좇게 되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과거 선배들이 했던 고민은 어느 사이 퇴색해져 버린 지 오래다.
명분보다 실리를 조금 더 중시하는 사회가 되었고, 경제적 안정을 모든 가치의 앞쪽에 두다 보니 존경할 사람들도 적어진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대략 난감이다.
B는 은퇴하자마자 다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B는 A와 달리 과거 인연에 기댈 생각을 하기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만들고, 스스로 시장을 개척하며 사업을 키워 나갔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어느덧 안정을 찾은 모습인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가 후배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막 은퇴한 후배들을 불러 새로운 출발을 하는 데 필요한 실질적인 경험과 팁을 전달하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B에 대한 좋은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애초부터 후배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시도에는 벽을 치고 임하겠다'던 그의 처음이 기억난다. 그는 현실을 접하면서도 끝까지 명예와 명분을 잃지 않은 것이다.
조선 세종 때의 문인 매월당 김시습은 타고난 천재였다. 미디어도 없던 당시, 불과 다섯 살 때 신동으로 전국에 이름이 자자했다 하니 얼마나 뛰어난 인재였는지를 알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김시습이 나중에 높은 벼슬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세상 사람들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김시습은 자신을 가르친 스승 이계전이 단종을 지키는 길이 아니라,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 길에 동조한 것에 실망하여 벼슬길을 거부한다. 그리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지내다가 충청도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한다.
김시습은 모두가 인정한 천재였지만 잘못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불우한 천재의 길을 갔다. 명분을 지킨 대가로 경제적 어려움과 외로움에 맞닥뜨렸지만 그는 끝내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명예와 명분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떠올리게 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명예를 존중하는 것만이 절대선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또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도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다.
최선의 길은 실리를 추구하되 명분을 잃지 않는 데 있다. 명분과 실리, 그 중간 어디쯤에서 멋지게 균형을 잡는 삶이어야 '인생 1.5막'을 행복하게 장식할 수 있다.
명예도 지키고 현실도 끌어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