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의 비’에 새겨진 글귀이다. 아니 글귀라고 한다. 꼭 한번은 가서 보고 싶었지만 시간을 핑계로 아직 가보지 못했다. 정신의학을 공부하고 환자를 진료하면서 삶의 모습이 다양하고 사람은 모두 다르다는 것을 배운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있다. 섣부른 일반화와 판단은 대개 신중하지 못하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을 마주할수록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인간은 슬픈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은 약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프고 슬프다. 이것은 나의 인간관이 되었다.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며 내가 생각했던 것은 마술처럼 좋아져서 돌아가는 환자들의 모습이었다. 전공으로 정신건강의학과를 선택하면서는 막연하게 사람들의 행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내과, 외과에 약이나 수술을 통해서도 치료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정신과에도 난치성 질병은 많았다. 상담으로도 약으로도 좋아지지 않는 사람들의 수는 늘어만 간다. 그렇지만 정신과 의사로서 나를 무엇보다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짊어진 사람들이다.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사정이 조금 나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문제가 정신의학적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고, 진료비를 지불할 여력도 어느 정도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병원에 속해 있지 않을 때 마주한 사람들, 사례들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나이 스물셋에 세 아이의 아빠가 된 환자가 있었다. 부인은 어느 날 종적을 감췄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했지만 돈은 벌리지 않았고 아이들을 돌볼 사람은 없었다. 결국 아이들은 보육원에 맡겨졌고 아빠는 죄책감으로 매일 술을 마셔 알코올 의존 상태가 되었다. 술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해 병원에 실려갔지만 의식을 회복하고 꺼낸 첫 번째 이야기는 치료비가 없으니 자신을 집에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서른 살의 남자 환자는 노숙인 쉼터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중학교 이후로 연락이 끊겼고 어머니는 어릴 적에 사망했다. 가정 형편은 몹시 좋지 못했다. 정규 교육은 당연히 끝마치지 못했다. 구할 수 있는 단순한 일거리로 생계를 유지하며 찜질방, PC방을 전전했다. 친구는 물론이거니와 연락이 닿는 사람도 없다. 두 차례 자살 시도에서 실패했고 그 후유증으로 한쪽 손의 사용이 부자연스럽다. 술 없이는 잠을 잘 수 없다. 기분은 종일 우울하고 아무런 의욕이 없다.
마흔 한 살의 여자 환자는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이다. 혼자서 겨우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인지기능을 가지고 있다. 충동 조절에 문제가 있어 이따금씩 폭력성을 보이곤 한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뒤로는 미혼의 오빠가 환자를 돌보고 있다. 이 가정은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로, 오빠는 대개 일을 하러 나가 있거나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기 때문에 환자는 종일 집에 혼자 있다. 환자가 낮에 혼자서 나갔다가 길을 잃어 난리가 났던 이후로 환자의 오빠는 외출을 할 때면 문을 잠가둔다. 좁고 환기가 잘 되지 않는 반지하 방이 환자가 경험하는 세상의 전부이다.
이런 상황의 정신과적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 나는 말문이 막힌다. 충동 조절에 문제가 있다면 치료를 할 수 있다. 술의 문제도 약물치료를 통해 도울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족쇄처럼 채워진 삶의 무게를 덜어내지 않고서는 나아지기 어렵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런 상황에서 자살 시도에 실패한 사람을 마주할 때 뭐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앞으로 더 밝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고,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이러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거나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고 있는 세상을 야속하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다. 어떻게든 무엇인가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어쩌면 구원 환상일지도 모른다. 구원 환상을 가진 사람은 마음 깊은 곳에서 스스로를 실제보다 과도하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거나, 다른 사람을 구원함으로써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하고 싶어하는 상태라고들 한다. 그럴 가능성 역시 있다. 그러나 나는 의사이기 때문에, 의사의 역할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까지라고 생각하며 돌아서기에는 인간은 이다지도 슬프다.
학생시절 강의 시간에 듣고 아직까지 기억하는 부분이 있다. 소의(小醫), 중의(中醫), 대의(大醫)라는 말이 있다. 소의는 병을 고치는 의사, 중의는 사람을 고치는 의사를 말한다. 그리고 대의는 사회를 고치는 의사를 말한다. 병을 고치는 법을 배웠다. 이것은 내가 슬픔을 줄이기 위해, 사람과 사회를 고치는 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