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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 Jun 13. 2023

그러니까, 저 이제 진짜 간다니까요?

캐나다 워홀 출국 당일

여기 이 미련한 여자를 좀 보세요


당차게 집을 나선 지 3분도 안되어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양손엔 각각 20 킬로그램이 넘는 캐리어 두 개의 핸들을 꼭 쥐고, 등 뒤엔 돌덩이같이 무거운 배낭 가방을 멘 채 도르륵 도르륵 앞으로 힘겹게 나아간다. 잠시 '아 그냥 고집부리지 말고 도와달라고 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스쳤지만 뭐, 이제와 어쩔 도리가 있나, 그저 꿋꿋이 터질듯한 캐리어 두 개를 끌어댈 뿐이었다.


기꺼이 도와주겠다는 친구와 가족의 호의를 굳이 굳이 한사코 거절한 이 미련하고 고집 센 여자는, 물론 그만의 이유가 있긴 했다. 이 여정의 시작부터 끝까지 순전히 내 힘으로 해내야 의미가 있는 거라고 굳게 먹은 마음을 고작 이 40킬로그램 남짓한 캐리어에 꺾어볼 생각은 감히 고민해 볼 여지조차 없었다.


한 동안 보지 못할 공항버스 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쳐가는 서울의 익숙하고도 지겨운 풍경은 보는 둥 마는 둥 더 이상 아쉬울 것 없다는 듯 그대로 흘려보내버린다.


'가서 어떡하지? 뭘 어떡해, 어떻게든 또 잘하겠지. 아니, 또 못하면 어때? 그렇게 배우면 되지. 그러려고 가는 거잖아? 아니, 차라리 가서 개발자로 취업을 한다거나 영어를 공부하겠다거나 그런 뚜렷한 목표가 있다면 몰라도,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하기 꺼려졌던 새로운 것들을 다 해보자 라니. 그래서, 도착하면 뭐부터 할 건데? 가끔 보면 대책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용감하기만 해.'


요란스런 독백은 이쯤 하려고 게이트 앞 식당에서 맥주 하나를 시켜 목을 축인다.

그러고도 뭔가 허전한 지, 한 술 더 떠 괜히 인스타그램에 '저 오늘 갑니다~' 하고 동네방네 소문을 낸다.


친구의 깨발랄한 한 마디에 굳어있던 얼굴이 풀어지며 풉 하고 실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래, 까짓 거 막상 맞닥뜨리면 별것도 아닐 텐데 뭘.'


게이트가 닫히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들어가 앉아 이륙을 기다리고 있자니 겨우 잠잠해졌던 마음이 이내 큰 너울을 그리며 한껏 출렁인다.


도전일지 도피일지는 결국 1년 뒤 내 모습에 달렸다는 스스로 부여한 부담감이라던가, 시작해 보기도 전에 커져버린 마음을 이내 눌러내야 했던 사람과의 아직 설익은 추억이라던가, 그림자처럼 나를 오랫동안 괴롭게 했던 사람들을 향한 못다 흘려보낸 애증이라던가, 연고 하나 없는 곳에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듯한 설렘이라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불가피하게 뒤따라올 예고된 외로움에 대한 걱정이라던가. 그런 종잡을 수 없는 것들이 막을 새도 없이 몽글몽글 피어나 머릿속을 꽉 채우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그만두려 노력해보다 그래, 그냥 맘껏 휘젓도록 내버려 두기로 한다.


'여기까지만이야. 이 비행기에서 내리면 다 덮어두고 마치 없던 일인 듯 앞만 보는 거야.'






밴쿠버 공항 밖으로 나오자 진한 마리화나 향이 기습적으로 훅 하고 코를 찌른다.

'아, 나 캐나다 온 거 맞네.'


그래도 북미는 몇 번 와본 터라 익숙하게 우버를 불러 너덜너덜해진 몸을 욱여넣는다.

밴쿠버 다운타운에서 40분 정도 떨어진 서레이(Surrey)에 위치한 숙소에 다다라 문을 열자 방 안에 갇혀있던 열기가 제법 뜨겁다.


‘흠… 사진에서 본 것보단 별론데… 아, 그럼 뭐 어때.’


대충 짐을 던져놓은 채 침대에 누워 친구들의 편지를 다시 찬찬히 읽어본다.


마치 여행자가 된 것 마냥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주변 가득 새로운 향기와 풍경들을 천천히 받아들이며 여기 온 것만으로도 큰 일을 한 거라고, 이제 천천히 시작해 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따뜻하게 말해주라는 어느 다정한 조언을 따라보기로 한다.


'적어도 앞으로 몇 달 동안은 하루하루를 내 마음 가는 대로 채울 거야, 꼭.'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기, 그리고 두려웠거나 싫어서 안 해봤던 새로운 것들도 다 도전해 보기.'


다른 사람의 스쳐가는 말에, 스스로의 불안한 목소리에 흔들리지 말고, 꼭 그렇게 할 거라고 여러 번 되뇌이며 낯선 곳에서의 첫날밤,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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