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관종(관심 종자)
소설 RED BUTTON
‘55, 56, 57, 58, 59… 여섯 시, 땡!’
빼꼼하게 파티션을 넘어 주위를 둘러보지만 퇴근하려고 채비하는 사람들은, 역시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면 그렇지, 에휴, 대충 눈치나 보다가 10분에 일어나야겠다.’
할 수 없이 애꿎은 마우스만 초조하게 딸깍거린다.
‘지겹다, 정말….’
마지막까지 엿가락처럼 늘어뜨리던 견적서 검토는 이미 다섯 시 전에 끝나버린 상태다. 여섯 시 퇴근 전까지 시간을 때울 목적으로 흐물흐물해진 그 견적서를 승인하고 바로 발주 진행해도 되지만, 그랬다가는 발주서를 수신한 협력업체에서는 오늘은 꼭 발주 확약을 마무리 짓겠다는 신념으로 퇴근 시간을 넘겨버리든 말든 열과 성의를 다해서 이게 맞냐 저게 맞냐며 나를 잡아 놓을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업체가 발주서를 확인하기 전에 내가 먼저 퇴근했다손 치더라도, 사무실 전화가 연결되지 않는다면 한창 퇴근하고 있을 나의 핸드폰을 지겹도록 울려댈 것도 뻔한 사실이었다.
급하지도 않은데 뭐하러 아등바등 뼈를 갈아 넣냐 생각하며 내일로 발주를 살포시 미뤄버렸다. 여섯 시로 느릿느릿 향하는 시곗바늘을 바라보며 누가 먼저 퇴근 테이프를 끊어줄까 큰 기대 없이 바랬지만,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역시 회사에 목숨 건 대한민국 과장, 차장, 부장들은 퇴근시간이 넘었는데도 미동조차 없다. 견적서 검토를 끝내고 남는 시간에 이전부터 눈여겨 오던 몽블랑 향수를 여기저기 비교해보고 장바구니에 담아놨는데, 뼈를 갈아 넣고 있는 그들 덕분에 고맙게도 구매 버튼을 클릭할 시간까지 벌게 됐다.
‘진, 행, 하, 시, 려, 면, 버튼, 을, 클, 릭, 하, 세, 요.’
눈치의 시간이 조금 더 옅어지도록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읽어가며 몇 초의 시간이라도 더 쥐어 짜내서 마우스의 왼쪽을 클릭한다.
“딸깍”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
자리까지 가서 퇴근 인사를 했지만, 신영자 팀장은 대답이 없다.
‘꼰대년….’
신영자 팀장은 아랫사람이 먼저 퇴근하는 것이 그리 아니꼬운지 일부러 인사를 받지 않는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쪽 귀에만 이어폰을 꽂고 있다가 내가 다가오는 소리에 급히 화면 내리는 걸 보면, 영화나 처 보고 있을 것이 분명하면서 말이다. 할 일이 없으면 여기서 아랫사람들 눈치나 주지 말고 집에나 들어가서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제발 반찬 하나라도 더 만들어 놓지. 그 진심 어린 조언이 목 구녕 끝까지 올라오지만, 그 소리 없는 아우성은 입 밖을 나서지 못한 채 의식 속에서만 뱅뱅 아쉬운 맴돌이만을 하고 있다. 하긴, 맨날 술자리에서 취기만 오르면 안주 삼아 씹어대는 그 남편 얼굴이 보고 싶을까 하는 측은한 의문부호가 생기기는 한다.
인사를 받든 말든 상관은 없다. 이미 내성이 생겼기 때문에 그런 꼰대적 행동에 내가 안절부절못할 리가 없다. 일부러 정리하고 있지 않던 책상 위에 프린트물이며 필기도구를 정리하는 척 대충 탁탁 부스럭거리다가 어제 새로 산 페라가모 구두에 쌓이지도 않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신는다.
“내일 뵙겠습니다!”
울리는 목소리는 고개 숙여 인사했지만, 속으로는 '열정적인 충신들이여 뼈 빠져라' 외치고 출입문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까부터 울려대는 단톡방 진동이 허벅지에 전달되며 마음을 두근두근 설레게 한다. 요즘에 같이 몰려다니는 친구들인 규석, 한울, 라익인데, 아마 이 녀석들이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며 진동을 발동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칫, 한심한 새끼들….’
취합되지 않을 설전들 그만하고 제발 아홉 시 약속 시간에 늦지 않길 바랄 뿐이다.
“이석정 대리님!, 잠깐만요”
출퇴근 기록기에 목걸이 카드를 찍는데 박정구 대리가 허겁지겁 달려와 나를 복도로 이끈다. 그가 나를 불러 이끈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출입문을 빠르게 지나쳐 참호에 급히 몸을 숨기듯 외부 복도 벽에 몸을 찰싹 붙였다. 잘못하면 나의 칼퇴근이 돋보일 뻔했다.
“박 대리, 뭐야? 나 지금 퇴근하잖아”
“대리님, 미안, 미안, 이것 좀 봐봐요. 나 오늘 큰맘 먹고 요거 하나 질렀거든요, 어때 괜찮아요?”
헐레벌떡 뛰어나온 박정구 대리 손에 쥐어진 핸드폰에 쇼핑몰 주문 화면이 떠 있다. 어디서 또 얄궂은 가방 하나 골라서 질렀나 보다. 있는 눈치 없는 눈치 봐가며 칼퇴근하는데, 잡아끈 이유가 겨우 이것인지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다.
박정구 대리는 경북 영양 출신이다. 요즘같이 부산에서 방귀를 뀌면 서울에서 성낼 정도로 극도의 고도화된 정보화 시대에서 도시 출신이냐 시골 출신이냐 따질 것도 없는 일이지만, 박정구 대리는 시골 출신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인지, 아니면 그 출신성분을 숨기고 싶은 것인지, 나를 따라 곧잘 명품을 산다. 단돈 몇천 원짜리 티를 입어도 그 특유의 태로 명품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멋쟁이지만, 명품 로고가 덕지덕지 산만하게 붙어 있는 박 대리는 과연 멋쟁이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까 그가 투자한 비용 대비 효율을 따져가며 가끔 멍한 상태로 헤아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멍 때림의 결과는 늘 결론 없이 흐릿하기만 했다.
박정구 대리는 잡무가 많아서 업무시간 내내 바쁜 편이지만, 그 와중에 짬짬이 틈을 내서 여기저기 뒤적거린 흔적이 보이는 나름의 이름 있는 명품 가방을 나에게 수줍게 내미는 것이다. 아니, 설레는 마음으로 들이미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마도 그건 도시에 정착하고 발전하는 자신의 안목을 나에게 검열받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간절한 기대에 부응하며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고 다짐했지만, 참 경북 영양 출신답게 명품도 어찌 저리 촌스러운 걸 골랐냐는 말이 입가에 근질근질하게 머문다. 그래도 회사 동료 중에 제일 친한 박정구 대리니까 친절하게 화답해 준다.
“아이고, 박 대리님, 역시 그 고상하신 안목으로 이렇게 심플하고 세련된 서류 가방을 하나 고르셨네요, 굿!”
화답은 해주지만 평을 해주기에는 귀찮다, 대충 맞장구쳐준다. 그런데 고개를 숙이고 눈동자만 위로 올려다보던 박정구 대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다.
“세련?, 그쵸, 그쵸? 오늘 바빠 죽겠는데, 겨우 여기저기 비교해보고 골랐다니까요. 그래도 뭘 볼 줄 아는 정석 대리님이 컴펌해 주시니 마음 놓이네요. 퇴근 잘하고요!”
당장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기세로 그가 빠르게 사무실 출입문을 향해 돌아선다.
“박 대리는 퇴근 안 해?”
“아, 나 조금 남았어요, 금방 갈 거예요. 먼저 가세요.”
“그려요, 수고하고, 빠이”
참 열심이다. 그래, 박정구 대리의 촌스러운 열정을 시크하게 응원해준다.
그렇게 쓴웃음으로 인사하고 엘리베이터를 쳐다보니, 그 문이 막 닫히려고 한다. 지금 놓친다면 그 몇 분 차이로 인해서 나처럼 눈치를 보다가 급하게 퇴근하는 인파에 엘리베이터를 몇 번씩이나 그냥 보내야 할 것이다. 만 원 엘리베이터는 내 앞에서 그 문을 힘차게 열고는 하지만, 지금 사람들이 이렇게 꽉 찼는데 왜 불러서 세우냐는 따가운 눈초리로 노려보며 다시 급하게 문을 닫아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나는 잘못도 없는데 괜히 고개 숙여가며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퇴근하시라는 속마음과 함께 그 문이 곱게 닫히도록 몇 번을 조용히 고개 숙여야 할 것이었다.
칼퇴근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지금, 문 닫히고 있는 저 엘리베이터를 잡아야 한다. 전력을 다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에 손을 던져 넣는다. 다행히도 어서 오시라는 인사처럼 덜컹거리며 문이 다시 열린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슬쩍 곁눈질해 보는데, 저 남루한 스웨터를 걸친 부장급 돼 보이는 양반이 닫힘 버튼을 누르고 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나도 가끔 열림을 닫힘으로 착각하곤 하니까. 닫힘 버튼 양반에게서 아니, 며칠은 빨지 않은 것 같은 저 스웨터에서 찐 담배 냄새가 풍겨온다. 행색을 보아하니 담배 한 대 빨러 가는 것이 분명하다. 이 양반아, 그 담배 피울 시간에 얼른얼른 업무들 끝내고 빨리 퇴근들을 하시지, 참 오늘 왜 이렇게 눈에 밟히는 인간들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4, 5, 6, 8, *’
집 현관문의 비밀번호도 시크하게 간단하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훔쳐 갈 살림이 얼마나 있겠느냐마는, 있는 것마저도 도둑이 들고 튀어봐야 그렇게 서글퍼할 값어치 있는 물건들도 아니다. 복잡한 비밀번호는 오히려 나에게 사치인 것이다.
“띠리릭, 착, 쿵, 띠딕, 착”
경쾌하게 열렸다 닫히는 현관문을 뒤로하고 선반 위에 아무 의미 없이 들고 다니는 회사 가방을 대충 툭 던져 놓는다. 가방 안에는 기껏해야 핸드폰 보조 배터리나 지갑 정도 들어있을 뿐이다. 혹시 회사 놀러 다닌다고 할까 봐, 출퇴근할 때 펄럭거리는 팔이 심심할까 봐, 그저 폼으로 들고 다닐 뿐이다.
공잘러는(공부 잘하는 사람) 책을 학교에 놓고 다니고, 일잘러는(일 잘하는 사람) 일을 이렇게 회사에 놓고 다니는 거다. 참, 그러고 보니 인력관리팀 그 고지식한 신주영 과장은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 들고 다니는지, 지난번에 회식 끝나고 식당을 나서면서 그녀의 가방을 챙겨 준다고 한번 들어봤는데 어찌나 무겁던지, 꼭 공부 못하는 연놈들이 가방이 무겁기는 오지게 무겁다. 그리고 그 여자는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나머지 공부를 하는 것인지, 맨날 야근에다가, 24시간 밤낮 주말 없이 거의 즉각적인 업무 메일 답장을 하질 않나, 또 안산에서 여기 역삼까지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긴 시간을 땅바닥에 버리면서 출퇴근을 하는 건지, 어찌 보면 충신이고 어찌 보면 노비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신주영 과장이다. 그 괴물 같고 무식한 체력에 혀가 내둘린다.
그런 신주영 과장에게는 미안하지만,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전생에 쌓은 덕인지라 다행히 나는 사업으로 솔찬히 돈벌이가 좋은 아버지가 있다. 덕분에 이 원룸도 아버지가 마련해주셨고, 출퇴근은 튼튼한 두 다리를 이용해 이렇게 걸어 다니고 있다. 비록 이 오피스텔은 업무지구 뒤편에 대한민국 최중심의 유흥업소들이 즐비한 곳에 있어서, 내 호실 양옆, 아래위, 복도 여기저기 또깍또깍 거리는 업소녀들이 득실대며 오피스텔의 호가를 떨어뜨리지만, 지나칠 때마다 향긋한 분내를 풍기는 그녀들은 가끔 벌름벌름하게 눈요기는 돼준다. 그 흘러내리는 몸매들을 머릿속에서 휘휘 저으며 시스템 에어컨의 환기 버튼을 눌러 쌓였던 꿉꿉한 공기를 희석시킨다. 그 환기 바람에 의해 나불거리는 원룸 통창 커튼을 그대로 촤악 쳐 내니 회색 건물로 가득 찬 화려한 뷰가 눈앞에 쏟아진다. 그 잿빛 도시를 더 찐득하게 느끼기 위해 애교스러운 환기창도 열어젖힌다. 환기창은 활짝 열리진 않지만, 그 찝찝한 틈새로 도시 냄새가 끈적하고, 씁쓸하게, 텁텁히 밀려 들어온다. 방안 가득 퍼진 그 비릿한 냄새를 눈감고 두 팔 벌려 음미해본다.
나는 이 도시 냄새가 좋다. 이 무채색의 화려함이 나와 어울리는 느낌이다. 가늘게 다시 뜬 눈꺼풀 사이로 아스라이 스미는 건물에 비친 노을을 그냥 보낼 수는 없을 것 같다. 핸드폰 카메라의 앵글을 미세 조정해서 노을빛이 핸드폰 화면에 부서지게 만들고, 희뿌연 회색 도시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는다. 그리고 나의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다.
‘#퇴근 #노을’
“링링링, 링링링”
‘아, 꼭 샤워하는데 울리고 지랄이야, 기다려라, 금방 나간다.’
눈가로 흘러내리는 거품을 쓸어내리며 맵싸한 곁눈질로 화장실 밖을 쳐다본다. 받지도 않을 거지만 핸드폰도 끈질기게 징징거린다. 그래도 한참을 울리더니 꺼진다.
“링링링, 링링링”
‘에이, 씨!’
샴푸를 한 움큼 짜서 이제 막 머리에 낸 거품인데 할 수 없이 물로 대충 씻어낸다. 수건으로 대충 물만 떨어지지 않게 닦아낸 후 식탁에 던져놨던 그 고집 센 핸드폰을 집어 든다. 화장실부터 걸어 나온 흔적이 바닥에 물기로 남으며 짜증을 유발한다. 평소에 샤워할 때는 핸드폰을 화장실에 가지고 들어가는 편이지만, 그때는 조용하다가 꼭 이렇게 가지고 들오지 않았을 때 울려대는 것은 이놈의 핸드폰이 나를 엿 먹이고 싶은 것이 분명하다.
“여보세요?”
“야, 이따 로데오 역 맞아?”
조금 있다 9시 약속에 만날 녀석 중에 라익이가 전화를 한 것이다. 다짜고짜 자기 할 말부터 지르고 있다.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튀겨 확 성질을 돋운다.
“야이, X발, 샤워하고 있는데!”
“맞냐고?!”
한번은 그 제멋대로인 성질에 서로 주먹을 나눠가며 비 오는 날 먼지 날리듯 대판 싸운 적이 있다. 주위 친구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눈깔 돌아가게 한 성깔 하는 나와 살점까지 물어 뜯어낼 정도로 끝장을 보는 성깔의 그 녀석 둘 중의 하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그때가 고등학교 2학년 때니 오래도 됐다.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어떤 연필로 써도, 어떤 샤프펜슬로 써도 쓱쓱 잘 지워지기에 내가 애지중지 아끼는 지우개가 있었는데 그 녀석이 빌려 가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칼로 잘라 온 것이다. “좀 잘라간다”라며 시크하게 반 잘린 지우개를 들고 깔짝깔짝 손놀림 하길래 그건 내가 무지하게 아끼는 지우개라고 정색을 했더니 그게 먼 대수냐는 반문만이 돌아왔다. 그대로 주먹이 그 녀석 얼굴로 날아간 건 나에게 있어서는 인지상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크게 싸운 이후로 우리는 단 한 번도 주먹싸움을 하지 않았다. 서로의 지랄 같은 성깔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각자가 정해놓은 보이지 않는 선 근처에 도달했다 싶으면 어느 한쪽은 무조건 꼬리를 내리며 관계를 유지시켜왔다. 그러고 보면 나도 배려심 있는 성격은 아니다. 그러니 라익이와 나는 잘 맞는 것일 거다. 끼리끼리 유유상종인 셈이다.
“하…. 맞고요, 이따 봅시다. 9시니까 시간 잘 지키시고요”
“오케이”
“야야, 그리고 오늘은 좀 깔끔하게 좀 입고 나와. 저번처럼 후줄근하게 입고 와서 분위기 개판 치지 말고”
“그게 나 때문에 개판된 거냐? 그리고 내 패션이 어때서? 닌 아직 패션에 대해서 뭐가 뭔지를 모르나 보네. 꾸민 듯 안 꾸민 듯. 꾸안꾸 몰라? 맘껏 치장하고 다니는 게 진짜 촌스러운 거지”
역시 자기 멋대로인 이 녀석은 자신의 스타일마저 제멋대로 패션피플로 자처하고 있다.
“야이, 거지 같은 게 무슨 꾸안꾸냐? 그것도 어느 정도지. 됐고, 하여튼 잘 입고와”
어차피 말이 통할 리가 없으므로 서로의 보이지 않는 선까지 접근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체념하듯 전화를 끊어버렸다. 라익이 녀석을 위해서 꾸미고 오라고 한 것은 아니다. 너가 그렇게 입고 오면 홈런을 칠 가능성이 작아진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래도 녀석은 와꾸와 말발이 좀 되는 편이라 여자들 앞에서 분위기는 잘 띄우는 편이기는 하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스타일을 지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깨에 걸친 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려 질질 끌며 급하게 뛰어나온 흔적을 지운다. 액땜했으니 오늘은 왠지 홈런을 칠 것 같은 좋은 기분이 든다.
오늘 술을 마실 거지만 차는 필수다. 이런 약속이 있는 날이면 차가 꼭 필요하다. 차는 낯선 이들에게 나를 대변해주는 하나의 명함 같은 것이다. 특히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경계심을 풀어주는 데는 이만한 것도 없고, 실제로도 잘 통한다. 넓은 주차장, 좁디좁은 칸칸에서 나의 애마를 어디에 세워놨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키를 눌러 경음기와 방향지시등을 확인한다. 애타게 찾는 나의 외침에 화답하듯 저쪽에서 양 눈을 반짝거리며 경음기를 울리는 녀석이 있다. 그 녀석의 BMW 마크는 언제나 나를 흥분하게 한다.
아버지에게 졸라 겨우 얻어낸 녀석이다. 아버지는 큰 재력가는 아니지만 내가 어렸을 때부터 무역업을 하며 사업을 번창시키셨고, 덕분에 나도 제벌 2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돈 걱정,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이 유복하게 성장했다. 아버지는 돈이 있다고 해서 흥청망청 쓰시지도 않으셨지만, 돈을 아낀다고 해서 자린고비처럼 아등바등 아끼시지도 않으셨다.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과소비는 안 되지만 써야 할 것에도 안 쓰면 아끼는 똥이 된다.” 그 말은 나를 세뇌시켜 아주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는 사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는 고민 없이 사는 편이다. 회사도 걸어 다니면서 차가 무슨 필요냐 하지만, 남 들 다 가지고 있는 거, 남의 눈에 좋게 보이는 거,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 특히 때깔 나는 외제 차,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꼭 필요한 녀석인 것이다.
아버지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숨기고 싶은 과거가 생기기도 했다. 무역업을 하시는 아버지 때문에 외국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학교도 많이 옮겨 다녔는데, 말레이시아에서 외국인 학교에 다닐 때 화교들에게 따돌림당한 것이었다.
그 학교에 한국 친구들도 몇 명이 있었지만, 화교들에 비하면 극히 적은 머릿수라 쪽수로 밀어붙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고, 그렇다고 해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느라 정을 붙이는 데 익숙하지 못했던 나는 한국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무리에서 떨어져 있는 나는 화교들에게 정글에 홀로 떨어진 짐승의 새끼 같은 존재였고, 그들은 엄격한 선생님들에게 걸리지 않게 은밀하고도 치밀하고 악독하게 괴롭힘을 자행했다.
처음에는 아무 이유 없이 툭툭 건드리다가 반발하면 여럿이 몰려와서 나를 둘러싸고는 했다. 특히 여학생들이 있는 앞에서 발로 걷어차인다거나, 뒤통수를 맞는다거나, 내 중요한 부분에 막대기를 들이대는 괴롭힘을 당할 때는 죽기보다 싫었다. 초반에는 대들기로 맞서 봤지만, 혼자의 힘으로 여럿을 감당하기는 버거운 일이었고, 그렇다고 학교 내에서 도움의 손길을 찾아보기에는 이제 막 다른 나라에서 전학해 온 중학생이 담당 선생님을 찾아 잘 통하지 않는 언어로 그 미묘한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거기에다가 부모님께 말씀드린다고 해서 이사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보니 해결보다는 걱정만 가중시킬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결국 끼리끼리 뭉쳐있는 그들의 강한 힘 앞에서 굴복이라는 치욕으로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괴롭힘은 학교가 공포의 대상으로 바뀌는 결과를 가져왔고, 말레이시아에서의 학교생활은 내 기억 속에 지우고 싶은 과거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괴롭힘이 트라우마가 됐는지, 중국 사람들이 트라우마가 됐는지 모르겠지만 다 큰 성인이 되어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 칭다오 맥주를 시키는 친구들에게 ‘짱깨 새끼’라고 욕하는 버릇이 생긴 것은 참 서글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나의 과거사를 안다면 '짱깨 새끼'라는 비하적 발언은 그다지 욕먹을 일은 아니라고 뻔뻔한 생각을 하곤 한다.
“여기, 여기”
호프집으로 들어서는데 규석이가 손을 들고 나를 불러 테이블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한다. 역시 규석이가 제일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해있다.
규석이는 네 명의 치들 중에서 그나마 바른 사나이다. 라익이와 한울이는 일어난 자리가 항상 지저분하지만, 규석이는 어느 식당을 가던 꼭 먹던 그릇을 정리하고 쓰레기는 따로 모아 놓고 방석을 안쪽에 밀어 넣고 일어나는 스타일이다. 테이블 의자를 꺼내 녀석의 앞에 앉으며 메뉴판을 반듯하게 각 잡고 있는 녀석을 보니, 깔끔한 안경테와 얇은 렌즈 뒤로 매섭게 똑 부러지는 눈매를 가지고 있다. 나름 다림질한 각 잡힌 와이셔츠. 돌체엔 가바나 벨트 뒤로 반듯하게 와이셔츠와 바지가 구김 없이 이어진다.
“일찍 왔네?”
“아냐, 좀 전에 왔어”
“나머지 둘은?”
“요 앞 이래, 아주 오랜만에 놀 거라고 다들 신났다.”
규석이가 대답을 하며 방긋 웃는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 매서운 눈매는 음흉이 흘러내린다. 바른 사나이라고 언급했지만, 사실 숨겨진 음흉함이 밝혀진 건 얼마 전에 일이었다.
우리 네 명은 오늘처럼 술자리를 했었고, 그 취기에 당연한 듯 클럽에 갔었다. 음악에 취해 술에 취해 부비부비에 취해,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흔들어대는 여성들 사이에서 기웃기웃하다가 각자의 파트너를 만들어 클럽 문을 같이 나서는 대형 홈런을 친 적이 있다. 그 네 명의 여성 중 둘은 친구였고 나머지 둘은 서로 따로 온 여성들이었지만, 광란의 젊음은 우리 여덟 명이 이미 그전부터 친구였던 마냥 클럽 앞의 해장국 집에서 꺌꺌 거리며 서로의 취기를 공유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시끌시끌한 해장국집에서 나온 이후 각자의 파트너를 데리고 모텔 방으로 향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질펀한 하룻밤을 보내기 위한 분위기가 무르익어감에 따라 비틀비틀거리던 취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지금은 얼굴도 잘 생각나지 않는 내 파트너의 젖무덤에 한참 얼굴을 파묻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의 핸드폰이 울려댔다.
“그냥 받지 마, 누군데?”
“잠시만, 나현인데?”
“나현이?”
“아까 횡설수설했던 애. 너네들이 안경 쓴 니 취한 친구랑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옆방에 둘이 들어가게 했잖아”
“아 규석이랑? 그랬지…. 그래, 받아봐”
한참을 이야기하더니 나가봐야 할 것 같다며 분위기를 깨며 내 파트너가 옷을 주워 입었다. 나도 급하게 옷을 따라 입었다. 그리고 따라나선 모텔 복도에서 만난 나현이라는 이름의 규석의 파트너가 한 말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XX 새끼, 똥꾸먹을 막 쑤시잖아”
‘오늘은 또 어떤 이중잣대를 음흉하게 실행할 것인가?’
숟가락, 젓가락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는 규석을 보고 있자니, 문 닫힌 뒤편에서 참 여러 사람의 모습이 있을 거라 푸념하며 의문의 부호를 던져본다.
그때, 라익이와 한울이가 같이 도착한다.
“야이, 시간 좀 맞춰라. 규석이 봐라, 얼마나 칼 같냐?”
“야, 시켜놨어?”
나의 어설픈 훈계는 회답 없이 사뿐히 즈려밟힌다. 역시 라익이 이 자식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안중에 없다.
“아니, 다 같이 오면 시키려고 했지. 골라봐”
칼 같은 규석이가 늦게 도착한 둘 앞에 메뉴판을 정갈하게 펼쳐주며 다정하게 메뉴 선정을 맡긴다.
“야야, 어차피 술 푸러 온 거 아니잖아, 대충 알딸딸하게 먹고 가자”
한울이가 관심 없다는 듯 재촉한다. 솔직히 한울이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지는 않다. 라익이를 통해 안 친구일 뿐,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학교 출신과 원나잇을 좋아하는 것을 아는 정도?
“야이, 새끼야, 좋은 안주를 먹어야 좋은 여자를 먹지”
라익이 답게 상스러운 말투로 여성을 비하하며 오늘의 스페셜 메뉴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한울이가 킥킥거리며 메뉴 선정에 동조한다.
라익이와 한울이는 초등학교 친구라고 한다. 서로 사는 동네는 틀렸지만, 전입신고를 통해 같은 학군에서 같은 학교, 같은 학원에 다녔다. 그 둘의 엄마들은 서로 친구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 경우지만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성격도 닮아 간 듯하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이 주문한 안주를 들고 온다. 안주보다 먼저 나온 술에 겨우겨우 한 잔 두 잔 쓰게 넘기고 있었는데 눈앞에 서빙된 푸짐한 안주를 보니 쓰렸던 속이 뜨끈해지는 느낌이다. 쇠고기 편육이 치맛자락처럼 둥글게 펼쳐져 있는 어복쟁반이 가운데 놓이고, 거기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육수가 드라이아이스처럼 김을 모락모락 내며 테이블이라는 무대를 신비하게 장식해준다. 퓨전 호프집답게 사이드 메뉴로 배치된 케이준 샐러드가 어복쟁반의 전통적 구수함을 서양적 산뜻함으로 테이블에 다양한 색감을 입혀준다.
“오, 역시 메뉴 선정이 좋았어.”
라익이가 먹기 시작하자는 언급도 없이 젓가락부터 뻗치고 있다.
“야!, 손 치워. 인증샷 좀 찍게”
핸드폰 카메라 앱을 실행시키며 라익이의 손을 '탁' 쳐 버렸다.
“아야! 하, 이 관종 새끼! 또 인스타에 올리게?”
대꾸는 하지 않는다. 중독이라면 중독이 맞다. 나의 인생은 찬란해야 한다. 중국, 그 화교 새끼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지금 잘 살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여러 사람 앞에 공개해야 한다. 그 화교 새끼들이 언젠가 나의 인스타그램을 본다면 잘살고 있는 나를 보며 자격지심도 느끼고 자신들의 인생의 비참함을 느끼길 바래본다.
“그만 좀 찍어, 좀 먹자”
“저 새끼는 병이야, 병. 놔둬, 좋다는데”
라익이와 한울이가 투덜이다. 그러든지 말든지 화려한 안주 테이블의 사진을 바로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다.
“야, 우선 마시자”
성격 급한 라익이와 한울이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나를 빼고 규석에게 손짓하며 술잔을 부딪친다.
“야야, 다 찍었어. 같이 마셔! 쨘!”
‘#오늘 같은 밤이면 #런투유’
비트가 울릴 때마다 가지각색의 픽셀이 눈에 띈다. 100만 픽셀, 10만 픽셀, 300만 픽셀, 1,000만 픽셀. 50만 픽셀. 광란의 젊은이들이 수초 단위로 변화되는 리듬 맞춰,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몸짓으로 열기를 올리고, 태우고, 흩뿌린다. 웅웅웅 몽롱하다가도, 또렷한 딕션으로 귓가를 때린다. 라익, 규석, 한울이는 그 틈에 섞여 이미 몰아 일체다. 심장박동보다 크게 울려 퍼지는 이런 비트가 좋다. 이미 나의 정신은 비트에 동화되어있다. 머리를 흔든다. 점프를 뛴다. 박자에 약간의 딜레이를 준다. 이것이 모던함이다. 젊음이 좋다.
저 멀리 군중들 사이로 볼륨이 도드라지는 하얀 스웨터, 한 뼘의 미니스커트, 하얗고 매끈한 다리를 숨기고 있는 듯한 얇은 검은색 스타킹을 신고, 하이힐 끝으로 흘러내리는 열정을 플로어에 찍고 있는 여자가 눈에 띈다. 올백으로 가지런히 머리를 올려 묶어 떠다니는 음악에 몸을 맡기고 있는 한 마리의 백학과 같아 보이는 여자….
그녀에게 파묻힌다면 알싸한 향내가 날 것 같다. 불필요해 보이는 그녀의 껍질을 벗긴다면 탐스러운 복숭앗빛 엉덩이가 드러날까? 모든 것을 잉태시킬 듯한 그 복스러운 굴곡…. 순간 아찔한 상상을 해본다.
의식한 듯, 안 한 듯 몰래 다가가 본다. 역시 날파리들이 여러 마리가 꼬인다. 밀쳐낸다. 치워낸다. 자신 없는 벌레들 몇을 털어내고 나니 결국 그녀의 하얀 스웨터의 솜털은 반소매 차림의 나의 팔꿈치에 살짝살짝 닿기 시작한다. 조금씩, 조금씩, 밀착한다. 그녀의 뒤에 서서 손을 살짝 그녀의 허리춤으로 가져가 본다. 거부는 없다. 그녀의 배를 당겨 내 쪽으로 밀착시켜본다. 은은한 그녀의 샤넬 향수가 음률의 떨림에 일어난 흩뿌연 먼지를 제치고 나의 코를 흥분시킨다. 그녀의 둔덕을 가리고 있는 미니스커트의 질감은 그녀와 나의 살이 닿는 짜릿함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다. 바지의 지퍼도 내 남성의 굳건함을 절실히 막아내고 있다. 이제는 주체할 수가 없다. 나는 그녀의 볼륨을 이미 느끼고 있다. 그녀도 내 손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가 오른손을 뒤로 손을 뻗어 내 허리를 잡는다. 그리고 왼손으로 그녀에 배에 얹힌 나의 손을 잡는다. 우리는 그렇게 음악과 한 몸이 되었다.
조수석에 앉은 그녀 옆에서 나는 연신 BMW의 동그란 마크를 만지고 있다.
“술 마셨는데 운전해도 돼요?”
그녀가 정적을 깨려는 듯 입을 연다.
광란의 미러볼에서 빠져나와 차 안의 온전한 불빛으로 비추는 그녀의 모습은 화려한 조명에서처럼 환상적이진 않지만, 크게 벗어나지도 않는다. 한 가닥도 삐지지 않은 그녀의 머릿결이 단정히 흘러 새하얀 목덜미에서 미끄러지고, 날카로운 턱선을 따라 앵두 같은 입술에 다다르니 나의 사타구니가 뻐근해진다.
“아니, 대리운전 부를 거야”
기댔던 몸을 바로 하며 그녀의 물음에 시크하게 대답한다.
“오빠는 나이도 안 묻고 바로 반말이네?”
나보다는 어려 보인다. 원나잇이 난무하는 이런 약육강식 들판에서는 우위를 선점하려면 반말인 것은 인지상정이다.
“기분 나빠? 존대할까?”
“아니, 그냥. 그럼 나도 말 놓는다 오빠. 어디로 갈 건데 대리 언제 부를 거야?”
그녀가 몸을 내 쪽으로 좀 더 밀착시키며 재촉한다.
“목적지는 없어. 그냥 어디로든”
“목적지는 뻔한 거 아니야?”
“목적지가 어딘데?”
그녀가 원하는 대답 대신 오히려 반문하며 그녀의 확실한 동의를 구해본다.
“그걸 내 입으로 말하라는 거야? 우선 빨리 대리나 불러”
당돌하다. 이 정도면 간접적인 승인이나 마찬가지다. 클럽에 두고 온 친구 녀석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초대형 홈런을 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냥 우선 잠시 술 좀 깨자”
한번은 물러선다. 급하면 그르치기 때문이다.
“입으로 해줄까?”
갑자기 그녀가 장난스럽게 제의를 한다.
“여기서?”
당혹스러움에 말 그대로의 의미인지를 반문한다.
“뭐가 두려운 거야? 왜 자꾸 확인이에요?”
그녀가 짜증스러운 듯 고개를 획 돌린다. 뭐지 이 여자? 아무리 헤픈 여자라도 이렇게 갑자기?
“아니, 그게 아니라….”
“오빠, 해줘? 말아?”
잠시 망설여진다. ‘그래, 어차피, 방 잡고, 샤워하고, 맥주 마시고, 다시 분위기 잡을 바에야 우선 여기서 하지 뭐. 그녀가 먼저 원하잖아.’ 그녀의 짧은 치마가 앉은 자세에 말아 올라 스타킹 속에 가려진 둔덕 한 허벅지를 더욱 도드라지게 드러내며 나의 시선을 괴롭힌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만든다.
“응 해줘”
나는 혁대를 풀고, 바지를 발목까지 내렸다.
하지만 그녀는 선뜻 나서지 않고 아직 벗지 않은 불룩 솟은 내 팬티를 잠깐 물끄러미 처다본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들어 내 쪽을 처다보는 마주친 그녀의 눈은 밝은 서클렌즈에 영롱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건 분명 버러지 보듯한 눈길이였다.
“미친 새끼, 날 뭐로 보고…. 설마 하고 시험해 봤더니 역시 발바리 새끼였네….”
새초롬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는 겉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욕설을 날리고 그대로 일어나 차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린다. 창밖에서 그녀는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시 묶으며 또깍또깍 멀어져 간다.
‘뭐지?….’
나는 한참 동안 바지를 올리지 못했다.
좀 전에 이 여자를 클럽 밖으로 데리고 나올 때, 세 녀석이 비트에 몸을 맡긴 채로 환호성과 함께 축하를 해줬었다. 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퇴짜 맞은 것을, 버려졌다는 것을, 그 녀석들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다. 나중에 어땠냐고 물어오면 환상적이었다는 거짓 답변을 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소외된다는 것,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죽기보다 싫은 트라우마이기 때문이다.
이대로 돌아갈 순 없다. 분한 마음에 핸드폰을 뒤적뒤적거린다. 얼마 전 소개팅으로 만난 한 여자가 생각난다. 몇 번 만났는데 그녀가 나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핸드폰 주소록에 ‘소개팅 정주연’을 검색하고 통화 버튼을 누른다. 이상적인 외모는 아니지만 나름 생활력이 강한 것 같고, 우선 착하다는 것이 마음에 드는 여자다. 직접 물어본 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기도 쪽에 두 채의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부모님도 있어서 내 기준에서 크게 빠지지도 않는다. 두 채 모두 호가 10억 이상씩은 되는 아파트들이었다. 나는 아직 결혼 생각은 없지만 그런 것들을 미루어 본다면 결혼 상대로는 나름 괜찮은 편이다.
결혼 생각이 크게 없는 이유는 남녀의 부부로서 이어지는 삶이 무료하고 의미 없어 보여서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애틋한 정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자식을 낳아 키우고 아등바등 살면서 애들 뒷바라지로 내 인생이 버려지는 것도 싫고, 금전적으로 모자란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간 지금의 삶의 수준을 유지하기에는 아이들을 낳아 키운다는 것은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특히 천정부지로 높아진 부동산값, 특히 주거를 담당하는 아파트값이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치솟아있기 때문에 아이들의 장래는 암담하다고 생각한다. 그 각박한 삶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다. 우리 회사에 다니는 자녀가 있는 기혼 직원들을 보면 결코 그들의 삶이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결혼하더라도 아이는 낳지 않을 생각이다.
“여보세요?”
통화음이 너무 오래 울리면 예의에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듯, 두세 번의 연결음 뒤에 바로 그녀의 목소리가 연결된다.
“주연 씨 저예요. 이정석”
일부러 경쾌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내가 누구인지 밝힌다.
“네, 이 밤에 무슨 일이세요?”
그녀가 일어나 단정히 옷매무새를 챙기는 듯한 목소리로 묻는다.
“뭐, 일이 있어야 전화하나요?”
“아, 네. 저는 비번이 끝나는 날이라 자고 있었어요, 내일 일찍 나서야 하거든요”
급한 일이 아니면 통화를 끝내자며 그녀가 예의 바르게 거절하는 것이다.
“아 그래요? 시간 괜찮으시면 제가 그쪽으로 가서 술 한잔하자고 하려 했는데요”
그래도 옥죄여 오는 소외감을 풀 길이 없어 거절을 알아듣지 못하는 척 시도해본다.
“미안해요, 내일 당번 일이라 힘들 것 같아요”
“네…. 할 수 없지요, 또 연락할게요, 쉬세요”
“네 정석 씨도 얼른 들어가세요, 끊을게요”
배려심 없는 연락에 실망했는지 그녀의 전화가 차갑게 끊긴다. 나를 옥죄는 소외감은 더욱 나를 차갑게 끌어안는다.
핸드폰을 옆좌석으로 던졌더니 쿠션에 튕겨 바닥으로 떨어진다. 잊혔던 말레이시아에서의 따돌림이 나를 조여 온다. 오늘도 두 여자에게 소외됐다. 아직 끌어올리지 못한 바지도 두 발목에 고이 접혀 소외되어 있다. 지금 난 두 여자에게 버려졌다. 술이 깬다. 이대로 운전해도 될 것 같다. 대리운전기사는 부르지 않는다. 시동 버튼을 누른다. 나의 BMW가 미끄러지듯 올림픽대로에 오른다. 속도를 올린다. 앞 유리에 거리의 가로등이 쏟아지며 옆으로 빠르게 흐른다. 클럽에서와는 다르지만 역시 다양한 픽셀로 서울 야경이 부서진다.
300만 픽셀, 1,000만 픽셀, 40만 픽셀, 700만 픽셀….
이 아름다운 광경을 나 혼자 보기에는 너무 아깝다. 핸드폰으로 영상을 담으려고 하는데 아까 조수석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이 생각난다. 주위 차간 거리가 충분함을 확인하고, 허리 숙여 조수석 아래 떨어진 핸드폰을 줍는다.
영상 촬영 버튼을 누르고, 시원하게 달려가며 펼쳐지는 야경을 담는다. 그리고 인스타그램에 그 영상을 업로드한다.
‘#오늘 같은 밤이면 #드라이브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