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며 행하는 9월의 의식
9월이 되자 지역 카페 게시판이 도넛' 얘기로 가득했다. 어디 도넛이 맛있다느니, 올해는 드라이브 스루만 가능한 곳이 많다느니, 하며 시나몬 가루가 뿌려진 도넛 사진과 함께 미리 예약할 수 있다는 사이트 주소도 친절하게 올라왔다. 도대체 그 도넛이 뭐길래. 조금 더 손품을 팔아보니, 9월이 되면 사과 농장에서 지역 사람들이 사과를 직접 따갈 수 있도록 개방을 하는데 한쪽에서 사과 주스와 도넛을 같이 만들어 판다는 정보가 나왔다. 미시간에서는 가을이 되면 그 도넛을 꼭 먹어야 한다며.
주말을 맞아 차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사과 농장에 다녀왔다. 여름 내내 맑은 날이면 하늘에 양떼구름이 가득 차 있었는데, 어느새 구름 한 점 없는 쪽빛 하늘이 되어 있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조금씩 차가 밀리더니, 차가 길게 늘어선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에 온 뒤로 본 가장 많은 차들의 행렬이었다.
"이렇게 기다려서 도넛을 먹는다고?"
빨리빨리의 민족인 나와 남편은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분명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냥 돌아갈까, 다른 농장을 가자고 해볼까, 아 미리 예약 주문을 해놔서 안 되겠구나. 우리는 말없이 음악의 볼륨을 높이며 도넛을 먹기 위한 기나긴 대열에 합류했다.
기다리다 보니 차 안에 앉아 농장과 다른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들은 사과 주스와 도넛을 사러 주말에 농장에 오는 일이 일상인 듯 보였다. 이날은 차에서만 주문을 받고 있었지만, 코로나만 아니었어도 온 가족이 사과를 따고 잔디밭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풍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9월이 되면 쪽빛 하늘 아래에서 도넛을 먹으며 가을이 왔다는 것을 실감하는 하나의 연례 의식 같은 것일까. 여름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 공원으로 나가 일광욕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바베큐를 해 먹고, 가을이 오면 할로윈을 맞이해 대형 호박을 사다 잭 오 랜턴을 만들고,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를 차례대로 준비하는, 한 해를 보내는 순서들. 그렇게 계절에 맞추어 미래를 기대하고, 현재를 즐거워하고, 떠나보내고, 또 다가오는 날들을 준비하며 낯선 나라의 사람들이 한해를 차례차례 살아가는 방식을 생각하니, 도넛을 기다리는 줄이 아니라 이들의 삶의 속도에 합승한 것 처럼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와 도넛과 애플 주스를 먹다 보니 나도 이제 겨울을 준비해야 하나 싶다. 처음에 미국에 오자마자 소문대로 긴 미시간의 겨울을 보내다, 코로나 때문에 봄을 제대로 맞아보지도 못하고 여름이 오는 것을 보며 빼앗긴 봄 잃어버린 봄 이라며 분통해했었다. 그러다 좀 더 살아보니 미시간은 봄과 가을이 없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5월까지 눈이 오다 갑자기 에어컨을 틀며 여름을 맞았는데, 벌써 밤에는 히터를 튼다.
아직 가을을 제대로 맞이하지도 않았는데 겨울이 온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일 년이 반토막난 것 같은 느낌이지만, 나도 이곳의 속도에 맞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본다. 여름에 햇볕을 쬐며 걸었던 산책 코스와 남편과 함께 돌았던 자전거길에 단풍이 들고 지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봐야겠다고, 밖에 나갈 수 있는 시간은 줄겠지만 책을 더 많이 읽어야겠다고, 좀 더 추워지면 근처 몰에 가서 오너먼트를 구경하고 크리스마스트리를 사 와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도넛을 가을에 꼭 먹어야 하는 이유도 알 것 같다고 생각한다. 가을이 온지도 모르게 겨울이 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