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리내 Jun 10. 2024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혈액 검사

 혈액내과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검사는 다름 아닌 혈액검사이다. 혈액내과의 관심 대상은 “혈액”이기 때문에 이 검사는 우리 과 검사 중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매일 혈액 검사를 시작으로 아침을 맞이한다.


 검사를 했으면 결과를 알려드려야지! 우리는 매일 혈액 검사지를 종이에 출력하여 환자분들에게 나눠드린다. 요즘에는 병원 어플로 혈액검사 결과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환자분들 중 고령이라 앱 사용이 자유롭지 않은 분들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아침마다 종이로 결과를 받아보는 재미가 있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우리는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매일 혈액 검사지를 준비한다.


 혈액검사는 워낙에 항목도 많고 다양한데 혈액내과에서 빠지지 않는 혈액검사 항목이 있다. 혈액 검사 4종 세트, 이름하여 백혈구, 호중구, 혈색소, 혈소판이다.  혈액내과 환자들은 적어도 이 4가지 수치에 대해서는 전문가이다. 경력환자 분들은 “이제 수치가 오름 추세네요.”라고 말하며 여유 있게 바라보시기도 하고, “오늘은 성적이 별로네요.”라며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신다. 그분들이 혈액검사 결과 읽기에 달인이 된 것은 오랜 경험과 검사 수치에 대한 간호사들의 설명의 콜라보 때문이리라.


신환들에게 혈액검사 수치 종이를 나눠줄 때는 나는 꼭  검사 항목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설명해 준다.

혈액검사  bottle,  환자들에게 나누어 줄 혈액검사 결과지


백혈구 & 호중구

“백혈구, 호중구는 우리 몸에 들어온 병균과 싸워주는 군대예요. 이 두 수치는 비슷한 방향으로 오르락내리락해요.  백혈구, 호중구 다 병균과 싸워주는 애들인데, 그중에서 호중구는 정예부대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군필 아저씨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으신다.


혈색소

“혈색소는 팔에다가 산소를 붙여가지고 온몸을 돌며 산소 운반을 해줘요. 그래서 혈색소가 부족하면 숨이 차거나 어지럽기도 해요. 혈액이 빨간색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이 혈색소 때문입니다. “


혈소판

“혈소판은 피를 멈추게 하는 지혈에 관여하는 성분이에요. 혈소판이 낮으면 피가 나는 상황에서 잘 멈추지 않고 몸에 멍이 잘 들어요. 혈소판 성분은 노란색이라 우리 환자 분들은 편하게 '노란피'라고 부르기도 해요.”



 얼마 전 입원 온 김인수님은 복부 통증을 무척 심하게 호소하며 입원 오셨다. 대체 무슨 진단명일까 나도 궁금할 정도로 통증 때문에 힘들어하셨는데 결국에는 소포성 림프종(follicular lymphoma) 진단을 받았다. 림프종은 보통 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은데 자꾸 아프다고 하시니 걱정이 많이 되었다.

 입원 온 다음 날 혈액 검사지를 들고 환자에게 가서 통증은 괜찮은지 살피고 어느 때처럼 혈액 검사 수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직 항암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항암을 하게 되면 백혈구, 호중구 수치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여가며 다소 유치한 군대 비유, 색깔 비유까지 끌어다가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혈액 검사 수치에 대해 더 궁금하신 것은 없으세요?

아마 매일 검사를 하다 보면 수치에 대한 감이 오실 거예요."

라고 말하는데 김인수님이 인자한 웃음을 지으셨다.

'내가 굉장히 설명을 알아듣기 쉽게 했다보다.'라고 뿌듯해하며 병실을 나왔다.


 며칠 후 다시 김인수님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동료들이 전해준 충격적인(?) 소식이 있었다. 김인수님의 직업이 의사라는 것이었다. 아뿔싸!! 며칠 전 나의 혈액 수치에 대한 설명을 돌이켜보니 '내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았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그래서 김인수님이 웃으셨구나.' 웃음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보다 혈액 수치에 대해서는 더 많이 아는 의사 김인수님에게 정예부대며 '노란피'며 설명을 늘어놓았다니 나도 웃음이 났다.


 '혈액 수치에 대한 설명 방식을 좀 더 진지하게 바꿔볼까? 군대 관련 비유를 없애고 과학적인 용어를 첨가해 볼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결국 나는 그냥 내 길을 가기로 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좀 잡으면 어때? 많은 환자들이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생각하면 좋은 것이지!


 김인수님은 본인의 전문 분야에 대한 나의 간략한 설명을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주셨다. 나중에 내가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상대를 존중해 주며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김인수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해본다.



커버 이미지 by @mumu_pattern


이전 08화 내 정맥은 소중하니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