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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Jan 05. 2024

공부는 큰 주전자와 작은 주전자로 나뉜다

하루키가 말하는 학교 시스템과 일본 사회 비판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8장은 ‘학교에 대해서’라는 장인데, 제목은 ‘학교’에 대한 이야기라지만 자신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으로 넘어가는 장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꽤나 신랄한 비판이 긴 분량으로 실려있다.


정말 이 책은 하루키가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작정하고 써 내려간 것 같다.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서는 드러내기에 한계가 있는 자신의 생각을 책을 통해 자세하게 설명해 낸 것이다. 책이라는 매체가 가진 장점을 제대로 활용한 것 같다.


하루키가 은근 정치적이라는 이야기는 이 연재 3화에서도 이야기했었다.

https://brunch.co.kr/@after6min/194


해당 장에서도 역시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엿볼 수 있었으나 이번 장처럼 노골적이진 않았다. 사실 이번 장은 일본 사회와 후쿠시마 사고에 대해 수위 높은 비판을 해서 마치 신문 칼럼을 읽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글에서 신선함보다는 '오.. 꽤나 신랄하게 비판하는 걸?'같은 느낌이 반복해서 드는 장이긴 하다.


이 책이 초판을 찍은 것이 2016년인데, 이미 하루키는 2011년, 2014년에 후쿠시마 사고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었다. 그래서 당시 그의 발언 내용을 아는 사람들은 이번 장을 읽으면 비슷한 이야기라고 느끼긴 할 것 같다.


2011년 하루키의 원전사고 비판 발언 기사

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05106929?sid=101

2014년 발언 기사

https://n.news.naver.com/article/022/0002732372?sid=104




하루키는 자신이 학교에 다닐 때 그다지 공부를 잘했던 학생은 아니라고 말한다. 정기고사 때마다 과목별로 상위 50명쯤 명단이 발표되었는데 그 명단에 이름이 실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공부를 안 했던 건 아니고, 중상위 정도의 성적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런데 와세다 대학 되게 공부 잘해야 가는 대학 아닌가..;; 이것도 설명해 줬으면 좋았을 듯하다 ㅎㅎ)


시험공부를 하기보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도 보고 수영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여기에서 하루키는 '시험'을 위한 공부는 재미없다고도 하지만, 이를 '즉효성'만 있는 공부라고 보고, 자신이 했던 활동- 책 읽기와 음악 읽기, 영화 보기, 여자친구 사귀기 등-은 '비즉효성'이 있는 활동이라고 말한다.


그런 것(시험공부)보다는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죠. 하지만 그런 종류의 지식에는 그다지 즉효성은 없습니다. 그런 지식이 진가를 발휘하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립니다. 유감스럽게도 눈앞의 시험 성적으로는 직접 연결되지 않습니다.

즉효성과 비즉효성의 차이는 예를 들어 말하자면 작은 주전자와 큰 주전자의 차이와 같습니다. 작은 주전자는 금세 물이 끓기 때문에 편리하지만 금세 식어버립니다.

한편 큰 주전자는 물이 끓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끓은 물은 웬만해서는 식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 더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라 각각 용도와 본연의 특징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잘 구분해 가며 사용하는 게 중요합니다.


시험공부와 책 읽기 등의 공부를 작은 주전자와 큰 주전자로 비유하고, 그렇다고 해서 두 주전자 중 하나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부엌에는 다양한 주전자가 있어야 하고 역할에 따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참 그답기도 하고, 공감이 가는 포인트였다.





하루키는 자신은 학창 시절에 그다지 공부를 잘하진 않았지만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은 좋아했다고 말한다. 그의 영어 공부 이야기를 들어보면 역시 시험공부를 위한, 즉효성 있는 공부라기보다 비즉효성을 가진 공부 방식이다.


그는 시험을 위한 영어 공부, 관사를 골라낸다거나 전치사를 외운다거나 하는, 그런 공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영어로 쓰인 소설책 한 권을 죽 읽어낼 만큼 영어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원어로 소설을 읽고 싶은 목적의식 때문에 스스로 영어 공부를 했다고 한다. (하루키의 부모님은 두 분 다 국어 선생님이어서, 하루키가 시험공부를 안 해도 책을 읽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본의 교육 시스템을 비판한다.


유럽에 가면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유창하게 영어를 씁니다. 책도 영어로 줄줄 읽어버려요(그 바람에 유럽 각국의 출판사는 자국어로 번역된 책이 팔리지 않아 난처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젊은이 대부분은 말하기가 됐건 읽기 쓰기가 됐건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영어는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건 역시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일그러진 교육 시스템을 그대로 방치해 둔 채, 한편에서 초등학생 때부터 영어를 공부시켜 본들 별로 도움이 되지 않겠지요. 교육산업의 배를 불려줄 뿐입니다.

 

또한 학교의 체육 시간에 대해서도 '학교의 체육 수업이란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닌가'라고 말할 정도이다.


학교에 다닐 땐 체육 수업 때 뭔가를 하면 벤치에 앉아있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성인이 된 하루키는 달리기에 대해 에세이를 쓰고 매일 1시간씩 장거리 달리기를 할 정도로 달리기 애호가이다. 이 점에서도 하루키는 학교 밖에서 운동을 해보니 정말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학교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요즈음에는 학교를 그만두는 학생들이 많지만, 자신이 학교를 다닐 때에는 그런 선택지는 보이지 않았다고 하면서 만약 요즘같은 때였다면 자신도 학교를 다니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루키는 스스로 '고양이과 천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일본의 사회 시스템은 '개적인 인격'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개적인 인격'을 넘어 무리를 졸졸 쫓아다니는 '양(羊)적인 인격'을 만들어낸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런 시스템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 한다.


‘모두 함께 선단을 짜고 목적지를 향해 일념으로 돌진하자’는 식의 사회 시스템은 그 역할이 이미 끝나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목적지는 더 이상 단일한 시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장의 뒷부분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쉽게 말하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역시 앞서 말한 '시스템' 아래에서 이뤄진 사고이고 '그 시스템 안에서의 책임 부재이자 판단 능력의 결락' 때문이라고 말한다. 경제성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일어난 비극이라고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원칙적으로도 원자력 발전에 반대한다고 밝히고, 만약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주의 깊게 관리된다면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처럼 '수치 중시', '효율 우선'의 관리 체계 아래에서는 소름 끼칠 정도의 리스크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이 장의 마지막에는 일본 사회에서 어떠한 '장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건 어떠한 장소인가.

개인과 시스템이 서로 자유롭게 이동하고 온건하게 협의 negotiate 하면서 각자에게 가장 유효한 접점을 찾아나가는 것이 가능한 장소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곳에서 자유롭게 팔다리를 쭉쭉 펴고 느긋하게 호흡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제도, 엄격한 상하 관계 hierarchie, 효율, 따돌림, 그런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곳은 말하자면 개인과 공동체의 완만한 중간 지역에 속하는 장소입니다. 그곳의 어디쯤에 자리를 잡을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량에 맡겨집니다. 우선 나는 그곳을 '개인 회복 공간'이라 부르고자 합니다.


하루키의 '개인 회복 공간'은 결국 책이었다고 한다. 책을 실컷 읽으면서 살 수 있었기에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책을 통해 일종의 '메타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어떤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아무래도 세계가 부글부글 끓어서 바짝 졸아듭니다. 온몸이 긴장하고 발걸음이 무거워져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시점에서 자신이 선 위치를 바라보게 되면, 바꿔 말해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뭔가 다른 체계에 맡길 수 있게 되면, 세계는 좀 더 입체성과 유연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건 인간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자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독서를 통해 그것을 배운 것은 나에게는 큰 수확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학교에 당부한다. 효율과 반대말인 '상상력'을 가진 아이들을 압살 하지 말라는 부탁이다. 학생 하나하나의 개성이 살아남을 수 있는 장소를 부여해 달라고 한다.


이 장을 읽고 나면 하나의 굉장히 훌륭한 신문 칼럼, 혹은 '주장문'을 읽을 기분이 든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류의 하루키의 글은 아니지만, 만약 누군가가 '하루키는 탈정치적이고, 사소설적인 것만 쓴다'라고 주장할 때 르포집 '언더그라운드'의 사례와 함께 반론을 펼칠 수 있는 대표적인 재료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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