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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Jan 09. 2024

자석에 쇳조각이 붙어 가듯이

하루키가 말하는 '창작당하다'

직업으로서 소설가 9장은 '어떤 인물을 등장시킬까'라는 장으로, 소설 작법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등장인물 캐릭터를 설정하는 법, 이름 짓는 법, 소설을 1인칭으로 쓰는지 3인칭으로 쓰는지에 대한 이야기라, 어쩌면 소설 작법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훌쩍 넘어가지는 장이긴 하다. 나 역시 에세이를 쓰는 건 좋아하지만 소설은 잘 읽지도 않고, 쓸 생각이 (아직은) 없기 때문에 다른 장보다 느슨하게 읽었던 기억이다.


읽으면서 재미있는 부분은 하루키가 자신은 소설을 '퐁퐁 샘솟듯 쓴다'라고 말해왔는데, 그것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써놓은 부분과 하루키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성장을 도모하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소설을 쓸 때 '퐁퐁 샘솟는다'는 이야기를 넘어, '받아 적는다'라고 까지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매우 귀여운 발상 하나를 이야기해 주는데 바로 '오토매틱 난쟁이'라는 개념이다.


소설 등장인물을 만들 때 실제의 누군가를 상정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석이 쇳조각을 붙여가는 것처럼' 하나하나의 설정이 더해지면서 하나의 인물을 만들 게 되는데, 그 공정을 '오토매틱 난쟁이'가 해준다는 이야기다.


그런 자동적인 작용에 나는 지극히 개인적으로 ‘오토매틱 난쟁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나는 대체로 매뉴얼 기어 차를 줄곧 탔었지만 맨 처음 오토매틱 기어 차를 운전했을 때는 ‘이 기어박스 안에는 분명 난쟁이 몇 명이 살고 있고 그들이 서로 분담해 기어를 조작하는 게 틀림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난쟁이들이 “아, 남을 위해 이렇게 아득바득 일하는 것도 이제 지쳤다. 오늘은 좀 쉬자” 하고 파업을 일으켜 차가 고속도로 위에서 갑자기 멈추는 거 아닌가 하는 어렴풋한 공포감도 느꼈습니다.

내가 그런 얘기를 하면 다들 웃겠지만, 뭐 아무튼 ‘캐릭터 만들기’ 작업에서는 내 안에 살아 숨 쉬는 무의식 속의 ‘오토매틱 난쟁이’들이 아직까지는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여전히 아득바득 일을 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기를 키우는 사람들이 몇 번 들려준 이야기와 닮았다. 아기들이 스피커를 보고 "저 안에 사람들이 들어가서 연주를 하는 거야?"라고 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 생각을 한 아기가 너무 귀여워서 내 아기가 아닌데도 볼을 깨물어버리고 싶었던 적이 있다. 하루키 할아버지는 나이를 초월해 이런 귀여운... 발상을 자주 하시는 것 같다.





이렇게 하루키 할아버지는 어떤 힘에 의해(아마 그 힘이 2장에서 말한 '에피퍼니'같은 것일 듯하다) 소설을 써나가는데, 소설을 써 나가면서 자신도 하기 싫거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것을 극복하면서 성장을 해나간다고 말했다. 잘 나가는 소설가나 작가라고 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쓰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그들도 역시 작품마다 자신의 한계를 깨 나가야 하는구나, 싶었다.


예를 들어 1994년에 발표한 '태엽 감는 새'까지 하루키는 1인칭으로만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1인칭 서술의 한계를 느끼고 2002년 '해변의 카프카'(제목만 들어도 지금도 다시 읽고 싶어 진다.)부터는 3인칭 작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1인칭 작법에서는 주인공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되니 편안한 부분이 있지만, 그 주인공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쓰지 못하기 때문에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또한 1987년작 '노르웨이의 숲' 이전에는 등장인물의 이름도 짓지 않았다고 한다. 등장인물에 이름을 짓는 것이 쑥스러웠다고 한다.


쉽지는 않았지만 눈을 질끈 감고 ‘에잇’ 하고 해치웠더니 그 뒤부터는 등장인물에 이름을 붙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

그처럼 나는 새로운 소설을 쓸 때마다 '좋아, 이번에는 이런 것에 도전해 보자'라는 구체적인 목표-대부분은 기술적인, 눈에 보이는 목표-를 한두 가지씩 설정했습니다. 나는 그런 식의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새로운 과제를 달성하고 지금까지 못 해본 것을 해내면서 나 자신이 조금씩 작가로서 성장한다는 구체적인 실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글쓰기를 하면서 세세한 부분이라도 내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소설이 3인칭이 되고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붙여지고 서로의 관계들이 뒤엉키면서 '이야기의 가능성이 뭉클뭉클 커졌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하루키가 등장인물에 '이끌려' 성장을 하게 되는 소설 쓰기 이야기가 나온다. 이 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다.


바로 2013년 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쓰면서 겪은 이야기인데, (이때까지는 하루키 소설 나오는 족족 다 사고 다 읽었던 것 같다) 원래 이 책은 장편이 아니라 단편 소설이었다고 한다. 이 장편 소설은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쓰쿠루가 갑자기 연이 끊어진 옛 친구들을 찾아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고 오는 이야기다. 원래 쓰쿠루는 옛 친구들을 찾아갈 생각이 없었는데, '사라'라는 등장인물이 쓰쿠루에게 '너는 네가 보고 싶은 것만 볼 게 아니라 꼭 봐야 할 것을 봐야 해'라고 하면서 쓰쿠루는 연이 끊긴 친구들을 하나하나 찾아가게 된다.


더 웃긴 건 사실 하루키도 쓰쿠루를 친구들에게 보낼 의도가 없었다고 한다;; 소설을 쓰면서 사라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말하게끔 써졌기 때문에) 이 소설이 그렇게 긴 장편이 되었다고 한다.


소설이 제대로 궤도에 오르면 등장인물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스토리가 제 마음대로 흘러가고, 그 결과 소설가는 단지 눈앞에서 진행되는 것을 그대로 문장으로 받아쓰기만 하는 지극히 행복한 상황이 출현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 캐릭터가 소설가의 손을 잡고 그/그녀가 미처 예상조차 하지 못한 뜻밖의 장소로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하루키는 소설을 쓰면서 일종의 '접신'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설의 신이 강림하는 것인가.. 이렇게 자기가 쓴 이야기를 남이 쓴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있는 점이다.


나는 소설가들이  등장인물 설정이나 소설 결말 등을 미리 정해두고 쓰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쓰지 않는 작가도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소설가도 그냥 '내려오는 이야기'를 쓰는 것처럼 쓴다니 신선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물론 김은희 작가처럼 이야기의 구도와 결말, 복선 등을 치밀하게 공부하고, 계획해서 쓰는 작가들이 더 많을 것 같다고 생각하긴 한다.


하루키는 이런 자신의 소설작법에 대해 '창작을 당한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라 실은 작자인 나를 향해 말을 건넸던 것입니다. “너는 이제 그다음 스토리를 써야 한다. 너는 그 영역에 이미 발을 들였고 이미 그만한 능력을 갖고 있으니까”라고. 요컨대 사라 역시 나의 분신의 투영이었다는 얘기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소설가는 소설을 창작하는 것과 동시에 소설에 의해 스스로 어떤 부분에서는 창작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가기도 하는 게, 나는 소설처럼 긴 이야기를 쓰진 않지만 종종 '오늘은 뭘 쓸까?'라고 생각하다가도 '일단 써보자'라고 생각하고 노트북을 켜면, 어떻게든 무언가 써진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기사를 쓸 때, 이것저것 취재를 해놔서 머릿속이 뒤엉켜져 있을 때, 종종 나는 'AI에 이 취재 녹취록들을 다 업로드하면, AI가 이 취재 내용을 다 습득하고, 멋진 기사로 좀 써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 같긴 하다)


그렇게 머릿속이 뒤엉켜졌을 때 마감은 점차 느려지는데, 이때 한 선배가 나에게 해준 말이 있다. 일단 '아무 말 대잔치'를 열어보라는 것이다. 일단 아무 말 대잔치를 열다 보면 생각보다 아무 말 대잔치가 아니라 나름 흐름이 있는 기사 초안이 써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초안을 쓰고 좀 쉰 후 순서도 바꾸고, 모자란 취재도 더 하다 보면 기사가 잘 완성될 것이라는 조언이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일단 시작해!'라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노트북을 연 근미래의 내가 알아서 쓰겠지...'같은 모습이다.




지극히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지금 이곳의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바라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현재진행형의 나 자신은 웬만해서는 파악하기 어려워요.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는 다양한 사이즈의 내 것이 아닌 구두에 발을 밀어 넣고, 그것으로 지금 이곳에 있는 나 자신을 종합적으로 검증해 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삼각법으로 위치를 측정하는 것처럼.


하루키 역시 '일단 신발을 신어봐'라고 말한다. 어딜 갈까, 어떻게 갈까, 무얼 입을까 이것저것 생각하기 전에 일단 신발을 신어볼 것. 그러면 그 신발이 나를 어디든 데려다줄 것이다.


오토매틱 난쟁이가 일을 하듯이, 자석에 쇠가 붙듯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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