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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Feb 06. 2024

다시 ‘0’부터 증명하고 싶은 욕망

하루키가 말하는 새로운 프런티어

이 연재의 끝이 보이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11장 이야기다.


연재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이 연재를 하게 된 계기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 책을 하나의 포스팅으로 리뷰하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 장 한 장 재미있는 포인트들이 너무 많았고 또 하나의 장에 속한 이야기에 덧붙이고 싶은 내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어쩌면 ‘필사’와 같은 리뷰를 쓰고 있다.


나 역시 책 하나를 이렇게 길게 리뷰하는 것이 뭔 소용인가, 이건 일종의 필사가 아닌가? 생각하다가 필사책들도 있는 마당에 뭐 어때, 라며 다시 타이핑을 한다.





11장 ‘해외에 나간다. 새로운 프런티어’라는 장은 어쩌면 다른 장보다는 쓱쓱 읽어나갔던 장이다. 이 장은 하루키가 어느 정도 소설가로서 이름을 알리고, 미국에 진출하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아무래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는 사람들은 꼭 소설가는 아니더라도 ‘직업으로서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일 테다. 그런데 11장의 이야기는 하루키가 이미 일본에서 성공한 소설가가 된 후의 이야기라서 좀 ‘남의 얘기’처럼 들린다. 미국에서까지 성공하는 이야기? 일단 자국에서부터 성공도 못했는데.. 하면서 위인전처럼 거리감을 두고 읽게 되는 장이긴 하다.


하루키가 처음 소설을 썼을 때라든가, 가게를 운영하며 주방에서 글을 쓰는 내용이 담겨있는 앞부분이 더 현실감 있게 읽힐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른 장보다는 좀 빠르게 읽어 나갔다. 그럼에도 이 장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하루키는 0에서부터 다시 증명해 보이려 했다


하루키는 40대 초반, 일본에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소설가였다. 그러나 미국으로 가 ‘다시 처음부터 쌓는 마음’으로 자신의 소설을 알렸던 때를 회상한다. 미국 ‘고단샤 인터내셔널’을 통해 작품들을 번역하고, 미국 번역가와 출판 관계자들과 관계를 쌓고, 하루키가 좋아했던 매체인 ‘뉴요커’에 연재를 하게 되는 등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시 일본에서 하루키가 성장하지 못하거나 길이 막혀 미국에서의 성장을 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일본의 고성장 분위기에 익숙해질까 봐 그것을 피해 미국에서 다시 시작한 것이다.


마흔을 목전에 둔(즉 작가로서 매우 중요한 시기인) 나로서는 그리 반길 만한 환경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민심을 현혹하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야말로 그 말 그대로였습니다. 사회 전체가 술렁술렁 들떠서 입만 벌렸다 하면 돈 얘기입니다.

차분히 자리를 잡고 시간을 들여 장편소설을 쓸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곳에 있다가는 나까지 자칫 망가져버릴 것 같다 그런 기분이 점점 강해졌습니다. 좀 더 팽팽하게 긴장된 환경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프런티어를 개척하고 싶다. 나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1980년대 후반에 일본을 떠나 외국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 사회에 돈이 풀리는 고성장 시대, 소설을 쓰지 않아도 잡지 등에 기고를 하면서도 충분한 원고료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돈이 풀리니 잡지들도 엄청 많이 생기고 광고료도 많았다고 한다) 그 상황을 거부하고 소설을 쓰는데 방해된다고 생각하다니.. 나로서는 조금 황당했다.


역시 나같이 인생 편히 살려는 속물과는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저런 사람들이 소설을 쓰는구나, 나는 소설을 쓰기는커녕 잘 읽지도 않는 인간이라 동의하기 어려운 사상(?)이었다.


이 책의 첫 번째 장에서 하루키는 '소설가는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사람은 하기 힘든 직업이다'라는 일종의 겸손 내지 계산 빠른 이들에 대한 손절(?)이 느껴지는 문구가 바로 이런 점과 연결되는 게 아닌가 싶다. 세상의 시선에서 보면 '아니 왜 저렇게 하지?' 싶은 구석이 있어야 소설가가 될 수 있다는 것.





하루키가 미국으로 건너간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당시 하루키의 작품은 일본에서 굉장히 비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의 외국에서는 인정받지 못할 작품이라는 악평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악평이 많아서, 한편으로 '외국에서 한번 인정을 받아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고 한다.


호경기로 들썽거리던 일본에 그대로 머물렀다면 『노르웨이의 숲』을 출간한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거북하지만)라고 원고 청탁이 줄줄이 들어와서 마음만 먹는다면 높은 수입을 얻는 것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런 환경을 벗어나 일개 (거의) 무명작가로서, 신참자로서, 일본 이외의 시장에서 내가 얼마나 통하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개인적인 테마이자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그런 목표를 기치로 내걸었던 것이 나에게 바람직한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프런티어에 도전하는 의욕을 항상 간직한다는 것은 창작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을 오랜 기간 속일 수는 없다


시간이 흘러 미국에서도, 나아가 유럽 등으로 하루키의 소설이 뻗어나가고 인기를 얻었을 때 그는 매우 뿌듯한 심정을 밝힌다.


그러자 일본에서는 또 ‘하루키 문학은 번역하기도 쉽고 외국인도 알아듣기 쉬운 이야기라서 그렇다’는 악평을 받았다고 한다. 반대로 미국에서는 하루키만의 ‘오리지널’이 있다고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하루키는 소설은 그렇게 외국에 먹히게 쉽게 쓰고 싶다고 쓰는 것도 아니고 휙휙 전략을 바꿔 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애초에 소설이란 어디까지나 신체의 내측에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것이지 그렇게 전략적으로 홱홱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장조사 같은 것을 해서 그 결과를 보고 의도적으로 내용을 분류해 가며 써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그런 일천한 지점에서 태어난 작품은 수많은 독자의 지지를 얻을 수 없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많은 사람을 짧은 기간 동안 속이는 건 가능하다. 몇몇 사람을 오랜 기간 속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을 오랜 기간 속일 수는 없다’라고.

소설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시간에 의해 증명되는 것, 시간에 의해서만 증명되는 것이 이 세상에는 아주 많습니다.


이렇게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한 하루키는 다시금 자신의 소설을 인정받고 ‘증명됐다’고 여기는 듯하다.





남편이 '미국에서 살래?'라는 질문에 No 하는 이유


종종 남편도 나에게 '아기랑 미국 가서 살아볼래?'라고 물어본다.


그럼 나는 단호하게 ‘아니.. 나중에 아기 좀 더 크면 가자’라고 말한다.


나도 아기와 함께 미국에 가서 살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그 욕망 중 80%는 아기가 영어를 쉽게 배웠으면 해서이고, 아기가 미국 문화를 겪어봤으면 해서이다. 나머지 20% 정도가 나의 새로운 경험을 위해서이고 나 역시 영어를 공부하고 싶어서 정도이다.


그러나 내 직업의 성격이 외국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차라리 10년~15년 정도 후 다른 직업을 가졌을 때 (설마 10년 후에도 기자를 하고 있을까..?), 또 아이가 어느 정도 커서 학령기가 됐을 때 1~2년 정도 살아볼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하도 남편이 저 질문을 자주 해서 왜 미국에 가서 살고 싶냐고 물어봤다.


남편은 “0에서 시작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솔직히 나는 왜 굳이 열심히 쌓아둔 밑천이 있는 한국을 떠나 다시 0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나는 말이 많은 사람이고 대화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이며 글을 쓰면서 자기 만족감을 얻는, 그야말로 언어를 사용하는 환경이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그런데 말과 글이 잘 안 통하는 곳에서 살게 되면 너무 답답할 것 같고, 사람들과 깊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게 삶의 질을 낮출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나의 영어 실력으로 드러나는 대화 수준으로 나를 평가할 것이니, 그렇다면 나는 거의 초등학생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치부될 것이 아닌가. 그런 대화를 나누는 일상은 나에게 불행을 줄 것이 분명하다고 예상한다. 물론 내가 지나치게 겁먹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0에서 시작하는 경험'이란 걸 굳이 미국에 가지 않아도 많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브런치 계정을 새로 파보는 것도 구독자 0에서부터의 경험이니 비슷한 거 아닌가? 아니면 유튜브를 해보던가. 구독자가 0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잖아. 등등 한국에서도 0에서의 경험은 충분히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한국에서의 안락함을 버리고 왜 굳이 0에서부터의 경험을 해야 할까 싶어서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루키의 ‘프런티어 정신‘에 대한 글을 읽으니 남편을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해만 했을 뿐 하루키에게도, 남편에게도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내 눈에는 '사서 고생'하는 타입일 뿐이다. 이렇게 내가 안정지향적인 타입이니 큰 성공도, 큰 실패도 없는 그럭저럭 인생을 살아온 거겠지.  



0에서부터 증명해 보이고 싶은 욕망이란


나는 남편이 미국에 가서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는 욕망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 역시 하루키가 말한 것처럼 이 역시 자신을 세상에 증명하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딜 가도 나는 다시 재건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증명해 보이고 싶은 욕망.


자국에서도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이 어려웠던 나에겐 갖기 힘든 종류의 자신감이다.


세상에는 프런티어, 즉 0에서 시작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구나. 나는 정말 그런 타입의 인간은 아닌 거 같다는 것도 다시 깨달았다.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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