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는 누굴 위해 글을 쓰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10장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라는 챕터는 매우 짧은 하루키의 성장일기처럼 읽힌다. 그가 초창기 글을 쓸 때 왜 썼는지에 대한 생각부터 시작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무렵과 지금까지 왜 쓰는지에 대한 생각을 밝힌다.
그 유명한 조지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라든가 오르한 파묵의 노벨상 수락 연설문처럼 하루키가 왜 쓰는지 솔직하게 밝힌 챕터여서 ‘레전드 챕터’가 아닌가 싶다. 그만큼 줄 친 부분도 많은 챕터이다.
챕터의 처음은 하루키가 자주 받는 질문인 '어떤 독자를 상정하고 글을 쓰느냐'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하루키는 독자가 아닌 '자신을 위해 쓴다'라고 한다. 그 다운 솔직한 답변이다.
사실 자신이 재미있고 잘되려고(?) 쓰는 게 쓰는 사람들의 첫 번째 이유가 아닌가 싶다.
다만 그는 글을 쓰는 초창기에는 ‘독자를 염두하지 않고’ 썼다가 어느 정도 소설가로 궤도가 오른 후 독자를 염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독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기사도 그렇고, 많은 글을 쓸 때 ‘타깃 설정’은 매우 중요하다고 배운다.
브런치북만 하더라도 어떤 독자들을 생각하며 쓴 글인지 혹은 브런치북이 누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지 쓰는 란이 있다. 그리고 출간을 위한 작법책 등을 보면 항상 나오는 게 타깃을 잘 설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출판업계뿐 아니라 모든 산업에서 똑같다.
그러나 하루키는 ‘나는 내 독자를 모른다’고 말한다.
물론 하루키처럼 광범위하게 읽히는 작가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게 아닌 싶긴 하다.. 타깃 독자 같은 것을 분석할 필요도 없는 작가.... 독자가 너무 많기에.. 타깃 할 필요도 없고.. 누군지도 알 필요도 없는 걸 수도.....ㅜ
여하튼 그럼에도 재미있는 것은 하루키가 소설을 썼던 초창기부터 하루키는 독자를 상정해 글을 쓰기보다 ‘내가 좋으면 그만’ 같은 태도로 썼다고 한다.
딱히 누군가를 위해 소설을 쓴다는 의식이 내게는 애초에 없었고 지금도 딱히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서 쓴다,라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한밤중에 주방 식탁에서 썼을 때는 그게 일반 독자의 눈에 가닿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으니까(정말로) 대체적으로 나 자신이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만 의식하면서 썼습니다.
그리고 꽤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소설가로서 궤도에 올랐을 때는 독자를 의식하긴 했으나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은 비슷하긴 했다고 한다.
‘내가 즐기기 위해서 쓴다’는 기본적인 자세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글을 쓰면서 즐거우면 그것을 똑같이 즐겁게 읽어주는 독자가 틀림없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수는 별로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로 괜찮지 않은가. 그 사람들과 멋지게, 깊숙이 서로 마음이 통했다면 그걸로 일단은 충분하다,라고.
이런 태도로 글을 썼기 때문에 하루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악평이 나와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애초에 독자보다는 자신이 좋아서 한 일이기에.
다만 이런 ‘기분이 좋다는 게 뭐가 나빠?’라는 태도는 역시 건방지고 어린애 같은 생각이긴 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면서 이런 태도로 계속 글을 쓰면 '직업작가로서 아마 어딘가 막다른 길에 몰린다'라고 생각다고 말한다.
소설가로서 발전하려면 ‘내가 좋아서 쓴다는데 뭐’라는 태도에서 더 성장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쓰면서 나 자신이 기분 좋고, 동시에 정면 돌파적인 힘을 가진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무라카미 류나 나카가미 겐지의 장편 소설을 언급하면서 그런 멋진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 내가 쓰고 싶은 것과는 달랐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나대로 독자적인 길을 개척해나가야 합니다. 선행하는 그러한 작품에 담긴 파워를 구체적인 예로 염두에 두면서 내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것을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한 후 집필한 것이 '양을 둘러싼 모험'이라고 한다. 이 소설은 하루키의 문체가 잘 드러난다고 평가받는 소설이다. 이때 하루키는 나름 잘 경영하고 있던 재즈바를 매각하고 전업 작가가 됐다고 한다.
이때까지는 가게를 통해 얻는 수입이 소설을 통해 얻는 수입보다 많았지만, 생활 자체를 소설 쓰는 일에 집중하고 싶어 가게를 정리했다고 한다. 주변에서 만류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하루키는 성격상 '어중간한 것'을 참지 못해 전업 소설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고 한다.
사실 '내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것을 쓰라'고 하지만 과연 그런게 있을까....싶긴 하다 ㅠㅠ ㅎㅎ
이후 소설가로 대성을 거둔 후에 '나만을 위해 쓴다'는 감각보다는 독자를 의식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독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여기서 또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독자가 많아지면 어쩔 수 없이 결국 어디선가는 나쁜 말을 듣게 돼있기에, '내가 즐기기 위해 쓴다'는 원점으로 복귀하지 않으면 계속 쓰는 것이 어려워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챕터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단이 나온다.
그러느니 모른 척하고 내가 가장 즐길 수 있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만일 평판이 좋지 않더라도, 책이 별로 팔리지 않더라도, ‘뭐, 어때, 최소한 나 자신이라도 즐거웠으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재즈 피아니스트 텔로니어스 멍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할 말은 네가 원하는 대로 연주하면 된다는 거야. 세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런 건 생각할 것 없어. 연주하고 싶은 대로 연주해서 너를 세상에 이해시키면 돼. 설령 십오 년, 이십 년이 걸린다고 해도 말이야.”
많은 이들이 급변하는 시대에 '도대체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라는 생각을 많이들 한다. 아기를 낳고 키워보니 '아기에게 어떤 교육을 시켜야 할까'라는 생각도 비슷하게 이어진다.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하는데, 도대체 어떤 중심을 잡고 나를 키워나가고 아이를 키워나가야 할지 어려워지는 것이다.
하루키가 쓴 이 대목을 곱씹다 보면,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고, 뭔 짓을 하든 욕을 먹게 돼있다. 그렇다면 결국 원점은 '나'일 수밖에 없다. 세상이 외면하는 직업이든, 사양 산업이든, 월급이 적든 일단 내가 하면서 즐거운 일을 해야 오래 할 수 있고 욕을 먹어도 견뎌낼 수 있다.
다만 하루키가 2장부터 강조해 온, 자신만의 '감'은 언제나 벼려둬야 한다. 그저 즐기기만 하면 장땡이지 뭐 이런 마음가짐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재능, 노력, 감각이 내가 즐기는 분야에 걸맞은지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냉철하게 판단하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지만 외부에서의 환경에 따른 변화가 아니라, 항상 출발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물론 누구나 하루키 급의 성공한 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나마 '베스트 버전의 나'가 되려면 나로부터 시작된 선택을 믿고 나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