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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Feb 27. 2024

놀람을 유지하고 싶은 의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마지막 장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12장은 하루키가 선생님으로 모셨던 듯한 가와이 하야오 라는 사람에 대한 글이다. 사실 이 책을 죽 읽어온 독자라면 이 장이 조금 생뚱맞게 느껴진다. 11장 '해외로 나간다 새로운 프런티어'장이 하루키가 소설가로 성공을 하고도 해외에서 다시 시작하는 경험을 다루고, 그렇게 끝이 나야 깔끔한 끝처럼 느껴지는데 지금껏 나오지 않았던 심리학자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후기를 보면 이 책의 구성이 하루키가 틈틈이 자신의 소설에 대해 써온 원고를 모으고, 마지막에는 하루키가 교토 대학교 강당에서 연설한 것을 껴넣은 것 때문이다. 굳이 이 원고를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책에 껴놓은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이 연재에는 12장 이야기를 하지 않고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그래도 몇 번 읽다 보니 이 장에도 정이 들어서 조금 더 이야기해볼까 한다.




가와이 하야오 교수를 찾아보면 한국에도 번역서가 몇 권이 있는데 '카를 융 인간의 이해', '일본인의 심성과 일본 문화' 등이 있고,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라는 책도 나와있다. 가와이 하야오 교수가 살아계셨을 때 하루키와 매우 막역한 사이였던 것이 추측된다.



'수용' 모드와 '교환' 모드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이 장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하루키가 가와이 하야오 씨를 관찰하면서 느낀 바를 쓴 것인데, 가와이 씨는 처음 하루키를 만났을 때는 아무 발언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말수가 적고 뭔가 음울한 느낌'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눈이 게슴츠레하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 만남에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게 행동해서 하루키가 놀랐다고 한다. 게다가 두 번째 만남이 첫 번째 만남의 바로 다음날이었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어린아이의 눈빛으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루키는 그 변함을 이렇게 표현한다.


아마 '수용'에서 '교환'으로 모드를 전환하셨던 것이겠지요. 그다음부터 우리는 극히 평범학 자유롭게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건 내가 가와이 선생님의 '기준'을 일단 통과했다는 뜻이라고 나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루키가 이렇게 가와이 선생님을 이해한 맥락이 있다. 그 역시 일본의 지하철 사린 가스 사건을 다룬 '언더그라운드'를 집필할 때 가와이 씨처럼 '수용' 모드로서 사람을 대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내가 그걸 알아본 것은 나 역시 때때로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내 쪽의 기척을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히고 상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수용하려고 합니다.  

특히 인터뷰할 때가 그렇습니다. 철저히 집중해서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 자신의 의식의 흐름 같은 건 죽여버립니다. 그런 전환이 되지 않으면 정말로 진지하게 남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습니다.


정말로 '언더그라운드'를 읽을 때, 이 책은 하루키가 쓴 것처럼 느껴지지 않은 적이 많았다. 아마도 인터뷰를 위해 '수용' 모드로 있던 하루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 테다. 아무래도 참사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룬 인터뷰이기 때문에 이런 태도가 필요했던 것 같다. 만약 참사 피해자가 아니라 저명한 작가나 교수를 인터뷰한 책이라면 '교환' 모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이 '모드 변환'에 대해 나도 할 말이 좀 있다. 기자로서 인터뷰했던 때를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원가족과 있을 때 '수용' 모드, 즉 약간 눈빛이 게슴츠레하고 말이 없는 모드로 변한다. 그리고 남편과 만든 나의 가족과 있을 때나, 친구들과 있을 때는 까불거리는 어린아이의 모드로 변한다.


원가족과 있을 때는 내가 말을 주도하지 않기에 가족들은 종종 나를 두고 '얘는 말이 없잖아'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으면 남편은 아주 깜짝 놀란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정말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렇게 글도 매번 길게 쓰는 편이다.


그러나 왜인지 원가족 앞에 가면 나는 말을 잘하지 않는다. 요즘에는 많이 나아졌지만 20대 중반까지는 정말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나의 모습을 두고 나 스스로도 '내가 너무 원가족에게 솔직하지 못한가?'라고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이 '모드 변환'이야기를 듣고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내 안에도 여러 가지 모드가 있고, 항상 같은 모드를 켜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수용' 모드를, 어떤 때에는 '교환' 모드를 켜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수용'모드 이후엔 '푸닥거리'가 필요하다


하루키는 가와이 선생은 심리학자(임상가)로서, 자신은 소설가로서 '수용' 모드를 켜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 공통점이라고 말한다. 임상가는 클라이언트를 마주하면서 그 사람의 영혼 어두운 밑바닥까지 함께 내려갔다 와야 하고, 소설가 역시 자신의 어두운 밑바닥까지 내려가면서 소설을 써 내려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푸닥거리'가 필요한 것이라고. 가와이 선생은 썰렁한 농담을 하고, 자신은 달리기를 한다고 말이다.


썰렁한 농담과 달리기를 하면서 자신에게 엉겨 붙은 '음의 기척'을 떨어내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점 때문에 하루키는 가와이 선생과 무언가를 공유했다는 실감을 느껴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가와이 선생이 하루라도 더 오래 살아계셨으면 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이 책은 끝이 난다.





사실 이 책에 매우 몰입해서 읽은 독자의 입장에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가와이 선생 이야기로 끝나는 것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하루키가 가와이 선생을 애정했다고 하더라도 책을 읽는 독자로서는 이 장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이야기와 그렇게 큰 연관이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금 생뚱맞은 끝을 맞는 책이지만, 이 책이 내 인생에서 (지금까지는) 가장 열심히 읽은 책 중 하나이자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임은 틀림없다.


놀람을 유지하고 싶은 의지


이 책의 후기에서 하루키는 이렇게 말한다.


어쩌다 소설을 쓰기 위한 자질을 마침 약간 갖고 있었고, 행운의 덕도 있었고, 또한 약간 고집스러운 성품 덕도 있어서 삼십오 년여를 이렇게 직업적인 소설가로서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직도 나를 놀라게 한다. 매우 크게 놀란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요컨대 그 놀람에 관한 것이고, 그 놀람을 최대한 순수한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는 강한 마음(아마 의지라고 칭해도 좋으리라)에 대한 것이다. 나의 삼십오 년 동안의 인생은 결국 그 놀람을 지속시키기 위한 간절한 업이었는지도 모른다.




인생의 어느 순간 놀람이 찾아오고, 그 놀람을 강한 의지로 지속시키고자 하는 사람. 그렇기에 매일 달리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도 거의 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소설가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 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


마지막장까지 읽으면 왜 하루키가 '소설가는 머리 좋은 사람이라면 도저히 못 할 일입니다'라고 말했는지 이해가 간다.


그 말은 나에게 '그렇게 머리 굴리다간 계속 글을 쓸 수 없어'라고 들린다.


그러다 보면 마지막 장에서 다시 첫 장의 문장을 읽고 싶어 1장을 다시 펼친다. 이렇게, 이렇게 나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었다.


이같이 필사와도 같은 길고 긴 리뷰를 쓰고 나니 이제야 이 책을 다 읽은 것처럼 느껴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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