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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Feb 26. 2024

남편 생일 선물로 준 질문

생일에 선물 필요 없다는 사람을 조심하라

“난 생일에 선물 필요 없어. 그냥 평소에 잘해줘. 생일이라고 유난은 무슨.”


남편 생일이 다가올 때마다 뭘 갖고 싶냐고 물으면 돌아오는 답이다. 정말 난감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다.


그는 한 번도 “내 생일에 뭐뭐 사줘~”라고 말한 적이 없다.




생일에 선물 필요 없다는 사람을 조심하자


결혼 초반에는 이 말이 진짜인 줄 알았다. 순진하게 그의 생일날 진짜 아무것도 안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남편은 며칠 동안 무언가 쌀쌀맞은(?) 분위기를 풍긴 정도가 아니라 대놓고 삐진 것 같았다. 계속 생일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어봐도 답을 받을 수 없었다. 아직도 남편은 생일 때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이미 생일 때 진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서라고 답을 내렸다.


그 생일 이후에도 남편은 계속 “아무것도 준비하지 마”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을 시 며칠 동안의 쌀쌀맞음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건 나이므로 나는 무엇이든 준비해야만 했다.


이쯤 오면 그냥 대충 남편에게 뭔갈 사주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차피 같이 사니까, 평소에 그가 필요했던 물건을 아는 건 쉬운 일이고, 대충 그걸 사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러나 남편은 직업상 쇼핑에 도가 튼 사람이다. 나보다 쇼핑을 정말 잘하고 싼 값에 물건을 사는 게 특기이다. 취미는 임장 가서 당근 지역 인증하고 그 지역과 당근 마켓에 올라오는 물건을 비교하기이다. 당근 마켓을 통해 평소에 가지고 싶었던 것을 반값보다 더 싸게 잘 사 오는 것도 특기다. 당근 마켓에서 산 것이라고 해서 중고티가 나는 게 아니라 새것 같은 것을 잘 구해온다. 


그렇기에 남편은 항상 내가 사는 물건에 대해 불만이 있고, 반품을 시키는 일도 잦았다. 우리 집 쇼핑 담당도 남편이다. 나도 어디 가서 센스로 꿇리지 않어.. 그러나 남편은 항상 나의 쇼핑 결과를 타박한다.


몇 번 남편 몰래 생일 선물을 사줬는데 그것 역시 반품을 당했다. “아 그냥 좀 써!”라고 해도 “안쓸 것 같은데 어떻게 해..”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러면 내 돈이 아까워서 그냥 내가 반품을 하게 된다. 그 이후로는 '웬만한 물건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일을 겪고 지난 몇 년간 나는 그냥 “생일에 미역국 끓여줄게~”가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행했다. 


남편이 퇴근하기 전 미역국과 그가 좋아하는 반찬을 몇 개 하고 케이크에 불도 붙이고 생일 축하 노래도 불러주는 정도로 타협을 봤다.


녹아내린 아이.. 러브.. 유.. 초. (왼쪽) 4년 전 생일 케이크. (오른쪽) 


이번 생일에는 “제발 나처럼 그냥 원하는 걸 말로 해!!”라고 애걸복걸해 보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내가 원하는 건 XX동 아파트야”였다.


그거 말고 다른 걸 말해보라고 하니 나의 통장 잔고를 모두 바쳐야 살 수 있는 시계 모델명을 말했다. 그래서 올해 역시 그냥 미역국을 열심히 끓이고 반찬을 만들고 케이크를 사뒀다.


역시 생일 때 나처럼 원하는 물건을 따박따박 말하는 사람이 가장 편하다는 걸 알게 됐다.




생일 정도는 되어야 들어줄 수 있는 말 들어주기


그렇게 남편 생일을 보내던 와중 갑자기 생일 선물로 주고 싶은 질문이 생각났다. 그래서 노트를 들고 그의 앞에 앉았다.


"지금까지 나랑 살면서 내가 고쳤으면 좋겠는 점 5가지 말해봐.


조금 기분 나빠도 적어놓고 고치려고 노력할 거니까. 그리고 들으면서 화도 안 내고 반박도 안 하고 노트에 적을게. 이런 날 별로 없다? 생일이니까 특별히."


이 질문에 그는 “정말??”하면서 매우 빠르게 5가지가 넘는 고칠 점을 줄줄이 읊어댔다. 아니 5가지 만이라니깐..


그가 원한 것을 5가지로 요약하면 이랬다.

1. 조금 더 넓은 시야로 보면서 할 일 처리하기

2. 위생/ 청소 지금보다 더 신경 쓰기

3. 억울한 마음 타파하기

4. 게으름 타파하기

5. 땀 흘리는 운동 매일하기


솔직히 2번 같은 경우는 반박하고 싶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현재도 내가 청소를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고 더 하기는 싫기 때문에..) 생일 질문으로 물어본 것이니 참기로 했다.


그리고 사실 3번과 4번에도 완전한 실행은 불가능할 것 같다는 첨언을 하려고 했으나 일단 알겠다고 했다. 어찌 보면 2번과 4번과 5번이 거의 비슷한 이야기 같긴 하다. 


내가 고쳐야 할 점을 들어주는 것 자체가 선물이고, 그것을 고치는 것까지는 선물에 들어가 있진 않다. 일단  그의 평소 요구를 화내지 않고 모두 들어봐 줬으니 된 것 아닐까. ^^




사실 평소엔 부부끼리 상대의 고칠 점을 말하기가 힘들고, 서로가 서로에게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수용적인 태도로 듣고 있기 힘든 게 사실이다. 생일 정도가 되지 않으면 듣고 있다가 싸움이나 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래도 다행히 남편은 이 생일 질문이 꽤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남편 친구가 집에 놀러 왔을 때 이 일화를 친구에게 말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연애 2년에 결혼 5년 차, 드디어 남편 마음에 드는 생일 선물을 한 번 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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