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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솔현 8시간전

대학입학. OT.

“뭐? 그 여학생 3년 내내 꼴찌여서 대학 못 갈 줄 알았는데 대학을 간다고?”

나는 여중,여고를 졸업했다. 여중까지는 공부를 곧잘 했는데 고입고사를 보고 상위 성적으로 명문여고를 입학하고 나서 꽈당 꼴찌를 했다. 그것도 전교 꼴찌. 정말 충격이 말이 아니 라서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 다음 중간고사, 모의고사 ..;..꼴찌. 정말 이래도 되나 싶었다. 그러나 꼴찌 래도 평균 64점이였고, 모의고사는 300점대에서 놀았다. 아, 다른 하위학교에 가면 1등먹을 점수일 텐데 라는 생각이 드니 위안이 되었다.

자퇴도 생각했지만 낙제 점수가 내신 평균 54점인데 10점이나 높았다. 그리고 자퇴하면 앞날이 막막하다. 내 고장에서는 고교를 졸업해야 사람 취급하는 곳이기에, 친척들이 뺑뺑이지만 이 학교를 졸업했기에 버텨야 했다. 그래서 버텼다. 2년, 3학년이 되었다.

여전히 내 내신 성적은 평균 64점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모의고사는 어느덧 3학년이 되어서야 310점대를 노리고 있었다. 와…. 내신성적 유지와 모의고사 점수 높이기에 내 엉덩이에 종기도 나고 물집도 나면서 엄청나게 학교 공부를 했다. 


드디어 수능을 치렀다. 그리고 한 달 뒤 수능 점수를 받았다. 00년도 수능은 불수능.다들 시험을 망쳤다고 학생들이 울고불고 했다. 나도 340점을 노렸는데 310점. 평소에 나올 수 있는 점수가 나와서 실망을 했다. 그러나 이 점수….. 대학을 떡하니 붙을 점수이긴 했다.


“네? 제가 왜 대학을 못 가요? 재미없어요? 선생님?”

내가 반문했다. 아무도 어느 선생님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담임도. 그래서 내가 알아서 갈 대학을 찾아갔다. 담임선생님도 할 말을 잃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대학은 수능100%로 수시를 모집한 대학을 찾았다. 내신은 전체 석차라 나빴다. 과목 석차면 1등급이 숱하게 나왔을 거다. 암기과목 위주지만. 어쨌든 시대를 잘못 타고 나서 수능100% 보는 대학으로 과수석으로 입학해 버렸다. 내 수능 성적이 과수석이라니!

또 고교선생님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또 놀라워했다. 아니! 이 3년내내 전교 꼴찌가 대학갔다는 것과 엉뚱하게도 동명인 이과애가 대학을 못 갔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워 입소문이 자연스럽게 났다. 하, 이런 이변이 있나. 

그 때 내 학교의 여학생들은 서울에 가고 싶어했다. 인(IN)서울하려고 여학생들이 은근 발버둥쳤다. 나도 과목 석차라면 인(IN)서울은 못해도 근교까지는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타지는 모르고 걱정이 된다며 외가가 있는 춘천에 4년제 사립대학으로 보냈다. 드디어 탈출이다!! 최종학력을 보니 대학에서 점수 잘 받으면 돼!!

결국엔 대학 졸업은 어떠냐고? 흠… 아버지가 튀지 말라고 했는데 하다보니 또 과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과수석 한 학생들 중에 인문대학에서 유일한 여학생이였다. 근데 난 그 때 뭔 객기인지 동계졸업식에 참여하지 않고 공무원 준비한다고 또 자취집에 박혀 있었다. 참…. 기행을 좀 일삼았다. 남과 좀 달랐다. 아주 다른 건 아니 였는 데 여느 여학생과는 다르 긴 했다. 

그래서 이번기회에 나의 대학생활을 되돌아보면서 재미있었던 추억을 꺼내 보고자 한다.


대학을 수시모집으로 입학하고 홀가분하게 남들은 정시모집을 준비할 때 난 처음으로 컴퓨터라는 걸 배웠다. 처음 보는 컴퓨터는 생소했다. 20여년전의 컴퓨터는 윈도우가 설치되고 옆에 하드웨어가 따로 있었다. 지금은 데스크 컴퓨터는 하드웨어와 모니터가 하나로 합쳐진 형태로 하드웨어가 사라졌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 때 내 타자실력은 독수리 법으로 하나씩 눌러서 <한글타자연습>이라는 걸로 타자치기 연습을 시작했다. 이때 수시 합격한 친구와 함께였다. 이 친구는 이과생이 였고 난 문과생이 였는데 어찌 터득 속도가 내가 좀 빨랐다. 남들보다 깨우치는 게 조금은 앞서 나갔다고 할까.

“이 파일을 완전히 삭제하는 데 어떤 키를 눌러야 할까요?”

윈도우 프로그램을 다루는 법을 가르치는 강사님의 질문이였다.

다들 침묵으로 일관할 때 조심스레 내가 대답을 했다.

“shift키에 삭제를 클릭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 대답에 강사는 놀라워했다.

“이거 제법 어려운 질문이 였는 데 어떻게 알았어요? 학생??”

“…… 찍었어요. 생각 나는 대로 말한 것뿐인데요.”

이렇게 나의 컴퓨터 수업은 학교 마지막 수업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수능만 끝나면 학교 수업은 수능에 맞춰서 다 끝나기에 놀자 판이긴 했다.)


이렇게 대학에서 활용해야 할 것들을 배우면서 시간을 보냈다.


수능이 끝난 학교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수시 붙은 학생들은 놀자 판, 정시 준비하는 학생들은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정시 모집에서 대학에서 하는 입학시험을 다시 한번 준비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찌 저찌 정시모집도 끝나고 이렇게 학교 생활이 끝나가고 있었다.



“자자, 다 신입생들 모였나요? 여기 팻말 대로 가서 모여 앉으세요.”

2월 학교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 고교 졸업식을 하고 얼마 후 대학생활을 미리 알기 위해 대학교 O.T를 실시한다 길래 신청한 후 모이라는 곳에 모였다.

학교는 산 중턱에 살포시 앉아 아기자기한 대학이였다. 춘천시가 다 보였다. 학교도 다른 학교에 비해 조그마해서 다행히 강의를 들으러 건물과 건물 사이를 오가는 데 뛰어다니지 않아도 될 거리였다. 내가 수시 합격해서 온 대학의 명칭은 한림대학교이다. 거기에 ‘중국학과’를 보고 지원했더니 갑자기 ‘지역학군’으로 120명을 한 데 묶어버렸다. 순간 조금은 당황했다. OT때 알려줬다. 그래서 이름 순으로 ‘중국학과,일본학과,러시아학과’로 구분해서 OT참가 신입생들을 줄 세웠다.

나는 낯가림이 심했지만 매도 먼저 맞음 좋다고 다들 앞에 서길 꺼려 해서 점점 뒤로 빠질 때 그냥 앞서서 1번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다음으로 1줄로 세웠다.

1시간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점점 지루해지고 입에 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음, 버스가 오지 않았구나. 진행에 차질이 좀 생긴 거 같네. 언제 가려나…. 엉덩이 시려.’

맨 바닥에 털썩 앉아 있더니 엉덩이가 시려 와서 다시 쪼그리고 앉았다.

‘너무 심심하다……(주변을 둘러본다.) 말이라도 시켜볼까? 낯가림 심한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용기를 내어 내 뒤에 앉아있는 여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아…안녕? 난 수현이라고 해. 원주에서 왔어. 넌?”

“(약간 당황하며) 안녕? 난, 보라라고 해. 난 춘천이야.”

그리고 또 온 어색한 시간. 

‘음, 어떻게 말을 이어 나가야 할지 모르겠네… 아무 말 투척해 보자.’

“진행에 차질이 생겼는지 늦네…. 그치?”

“응, 그런가 봐. 먼저 말 걸어오는 거 처음이야. 나 낯가림 심하거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한 번 용기를 내어 봤어. 거절하지 않고 받아줘서 고마워.”

다시 침묵….. 

‘아, 말을 걸어도 이어 가기가 이렇게 힘들구나!’

조금 있다가 재학생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자, 신입생들 버스가 도착을 했으니 순서대로 버스에 오르도록 하세요.”

그래서 버스에 올라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옆자리에 어떤 신입생이 탔는지도 모른 채, 잠이 오길래 스르륵 잠들었다.


버스는 강릉 어딘 가에 도착했다. 시동이 꺼지는 것을 느끼고 나는 깼다.

“하암. (기지개를 키며) 도착한 건가.”

주섬주섬 갖고 온 소지품을 챙겨 버스를 내렸다.

콘도였다. 다들 안내에 따라 방을 배정받고 숙소에 들어가 먼저 쉬었다.

총 6명이 한 방에 사용하게 되었다. 남자 3명, 여자 3명이 한 방이였고 방장으로 재학생 1명이 배정되었다. 방장은 ‘중국학과’ 재학생 남자였다.

나는 ‘중국학과’를 가려 했기에 제대로 방장이 선정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내가 고교때 계획한 대로 놀다가 엉뚱한 학과로 갈 줄을 꿈에도 몰랐다. 즉, 120명이 나의 경쟁자라는 걸 깜박했다.

어쨌든 서로 어색한 인사를 하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북적 북적대는 식당안에서 각자 깃발이 보였다. ‘중국학과’,’일본학과’,’러시아학과’로 각자의 깃발은 배정된 신입생들이 알아볼 수 있게 하고 학과별 식탁에서 식사를 하게끔 했다.

‘섞지.’

나는 생각했다. 다양한 신입생들이 입학했는데 너무 형식에 얽매인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120명을 통솔하기엔 재학생들도 방법이 딱히 없어 보였다. 중국학과는 이름 순이라서 김씨가 많았다. 김씨들끼리 모여서 식사를 한 모양새다.

조용히 식사를 하면서 곁눈질로 어떤 사람들이 오고 가는 지 정신없는 와중에도 관찰을 했다. 그 때 내 앞에 앉아서 먹는 여학생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식사 맛있어?”

“엉?? 응….. 괜찮아. 입맛에 맞아. 넌?”

“응, 나도 괜찮은 데 내 입맛에 싱거운 거 같아. 어디서 왔어?”

“난 원주. 넌?”

“난 경기도 광주. 이름은 하얀이라고 해.”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같이 식사를 하면서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 와 함께 옆에 앉아서 먹은 남학생도 끼었다. 근데 어찌 된 게 다른 학과를 배정된 학생이였다.

“난 경기도 마석이야. 어딘지 잘 모를 걸?”

“어. 생소하다.”

나와 하얀이는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찌지뽕, 같은 말했어!”

하얀이 먼저 장난을 쳐왔다. 셋이서 말을 터서 식사 후 로비에서 같이 시간을 보냈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저녁이 되어 갔다. 방장이 게임 한판 하자고 제안을 했다. 보드게임을 할 줄 알았는데 그저 빙 둘러앉아서 ‘아이엠그라운드 자기 소개 하기’를 하며 ‘너! 너!’로 지목해서 제대로 지목을 못하면 등을 마사지해주는 벌칙을 주었다.

그러면서 6명은 서로 안면을 트면서 조금씩 알아갔다. 여기서 남자 신입생 2명은 재수생이였다. 그래서 안면을 텄다고 음음거리며 거들먹 거리며 ‘오빠와 형’라고 부르랬다. 나머지 여학생(나를 포함해서) 셋과 1명의 남학생은 거절했다. 아니, 재수가 무슨 벼슬이야?

그렇게 안면을 튼 후에 바로 이런 이런….. 술파티가 열렸다. 더 친해지라는 의미에서 술파티를 하면 더 친해진다고 말이다. 난 술 주량이 얼마인지 주는 대로 받아 마시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였다.

건배사가 있고 나서 각자 빙 둘러앉아 120명이 한 잔씩 하고 각자 뒤엉켜서 게임을 하며 놀았다. 희생양을 만드는 게임도 했다. ‘마셔라 마셔라~’라며 노래도 부르며 재미가 있었지만 ‘희생양 놀이’는 내가 그 타겟이 되니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취기가 올라오며 배 속에서부터 먹은 게 올라오는 것 같아서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 가서 토했다. 아무데나 열었다. 남자 화장실이고 상관이 없었다. 그러다 복도에 토하게 생겼으니까. 토하고 나와 어지러워 섞이다 보니 6방은 술 파티 방 이였고 6방은 쉬는 방으로 먼저 잠자리에 들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었다. 이미 방은 술파티에 참여하지 않은 신입생과 이미 잠든 여학생들로 차 있었다. 그래서 나도 어느 여학생의 옆에 가서 이불을 깔고 울렁이는 머리를 감싸 쥐며 구역질 한 번 더 하고 잠에 빠졌다. 이 날이 O.T 첫 날이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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