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적장애 학생을 가르칩니다. 장애등급제가 폐지되기 전, 1급에서 3급까지의 숫자가 또렷이 표기된 장애인등록증을 가진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더러는 자폐 성향을 보이는 친구도 있었고, 몸이 불편하여 휠체어를 타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서 지적장애가 있는 학생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달랐지만 ‘지적 기능과 적응 행동에 심각한 제약을 보임’이라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단어 정의에는 맞는 모두 같은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각장애가 있는 선생님이 제가 소속되어 있는 부서에서 근무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8년이라는 경력을 이름 앞에 붙인 선배로서의 제 역할은 H 교사의 적응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나 자신도 새 학기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던 터에 다른 이가 한 조직에 잘 스며들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절대 만만치 않았습니다. 불편했습니다. 지적장애 학생을 위한 특수학교에 오랫동안 근무했던 제가 만났던 사람은 두 부류였거든요. 법적 정의에 맞는 지적장애가 있거나 지적장애가 없는 사람, 이렇게요. 지적장애 학생과 지적장애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지내는 공간만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참, 이상한 일이죠? 장애인 차별 철폐라는 말을 18년 동안 듣고 외치면서 지냈지만 저는 지적장애가 아닌 다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불편해했고, 멀리하였고, 차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계가 부당하다고 말하면서 그동안 제가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 사이에 거리를 두고 살고 있었습니다. 진한 선을 긋고 넘어오지 말라며 미간을 찌푸리면서요.
코로나가 시작된 2020년, 학생들은 봄을 집에서 보내야 했죠. 학교도, 놀이터도 텅 비었습니다. 여름으로 가는 길목 더워지면서 겨우 등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누리던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던 때였어요. H 선생님이 제게 왔습니다. 우리는 말과 필담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요지는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쓴 아이들의 입 모양이 보이지 않아 수업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스크 중간에 투명 필름으로 처리된 것을 학생들에게 나눠준 후 쓰게 하면 어떠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투명한 부분이 KF 84, 90의 기준에 맞는 것인지도 알 수 없으며, 학생의 안전이 염려된다는 이유였습니다. 새롭게 변형된 마스크는 누가 사서 나눠주냐를 생각하며 속으로는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입니다. 학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 제 임무라고 생각하면서 상대방의 불편함은 전혀 고려치 않은 채 기준만을 먼저 떠벌린 사람이었네요.
그해 8월, 휴직하게 되었어요. 지금까지도 코로나는 여전히 우리 옆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네요. 어느 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TV를 틀었습니다. 많은 예능 방송의 방청객들이 투명마스크를 한 채 웃고 있었습니다. H 선생님이 이야기한 마스크가 저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투명마스크의 정확한 모습도 그때 알았을 뿐만 아니라, H 선생님의 웃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만난 후엔 바로 코로나가 시작되었으니까요. 아, 코로나도 변명인 것 같아요. 우리에게 주어진 1년의 세월 동안 시곗바늘의 숫자만큼만 함께 있었네요. 속마음을 이야기하면서 공감을 더 했다면 365일의 숫자보다 더 큰 온기가 남아 있었을 텐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서로 다른 나와 당신’이라는 벽을 제가 만들었음을 고백합니다. 마음 한쪽에 남아 있는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을 이젠 말하고 싶네요. 그때는 말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어요. 미안합니다. 많이 미안했어요. 대수롭지 않게 나누는 하찮은 대화를 ‘평범하게’ 해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H 선생님이 이제는 힘들지 않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