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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뭇잎 Oct 30. 2022

다름을 인정하는 일


은재의 머릿속에는 지하철 노선도가 판에 찍힌 듯 저장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지하철 노선도를 외워서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대구 지하철 노선도 그리기도 식은 죽 먹기였다. 새로운 취미도 하나씩 늘었다. 가령,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다녀오기 같은 일이었다. 현장 체험학습 계획을 세울 때 은재에게 물어보면 정확했다. “여의도 KBS에 견학 가려고 하면 우리 어떻게 가면 될까?”라는 물음에 두 번째 손가락을 세우고 눈은 살짝 천장을 쳐다보며 입술에 힘주어 이야기했다. “7호선 장암행 열차에 탑승한 후 네 정거장 지나 신풍역에서 내립니다. 신풍역 5번 출구로 나와 5713번을 타고 전경련 회관에서 하차하면 됩니다.” 인터넷 길 찾기의 모든 경로가 은재의 머릿속 사진기에 저장되어 있었다. 누군가 길에 대해 질문을 하면 저장고에서 답을 꺼내주었다.  


동혁이는 급식실 정리 왕이었다. 다 먹은 식판이 가지런하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음식물 담는 부분 다섯 개 모두 나란히 포개져야만 옆 식탁에서 마음 편히 점심을 먹었다. 퇴식구 식판에 남은 음식들이 있으면 그걸 꼭 음식물 처리 바구니에 부어야만 교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교실로 향하다가도 미간을 찌푸리며 뛰어와 식판을 팍 엎어 탈탈 턴 다음 정리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동혁이만의 습관은 또 있었다. 발밑 타일 금 밟지 않고 건너기, 등굣길 학교 버스에 내려 우유갑 정리하기 등 동혁이만의 일정한 패턴은 곳곳에 있었다. 우유갑을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도 봤지만 소용없었다. 동혁이는 숨은 우유갑 상자를 참 잘도 찾았다. 남은 우유가 손등 위로 뚝뚝 떨어져도 셔츠 배 부분에 쓱 닦으면 그만이었다.       


지역사회에 있는 YMCA로 수영하러 다녀온 날이었다. 신나게 수영을 한 후 샤워를 하고, 다시 가방을 챙겨서 학교에 도착하니 하교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다. 교실에서 함께 짐 정리를 끝낸 후, 수업을 진행하려는데, 집중하기 어려웠는지 유찬이가 일어났다 앉기를 반복했다. 운동 후, 몸은 피곤하겠지 싶었다. 거기다 나른하고 노곤한 오후 시간이었으니까. 이해는 했지만, 그래도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선 나의 제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유찬이가 양말을 벗고 세면대에서 빨기 시작했다. 세면대에서는 물이 뚝뚝 바닥으로 흘렀다. 그러다 양말을 입에 물었다. 상반신을 앞뒤로 흔들면서. 높은 톤의 목소리로 “양말 그만 빨고 화장실에서 나와.” 하는 순간 유찬이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유찬이가 내 두 팔을 있는 힘껏 온 힘을 다해 잡았다. 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유찬이의 두 손에 잡힌 팔을 뺄 수가 없었다. 잡은 팔을 놓지 않은 채로 상반신에 반동을 주어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빼낸 팔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반소매 옷을 입었던 터라 흔적은 더욱더 선명했다. 화가 부닥쳐서 생긴 나쁜 기운의 마찰이 교실에서 흐르다 결국 터져버린 날이었다. 


아이들의 독특한 습관은 때때로 힘든 상황을 만들어 냈다. 은재가 지하철, 버스 노선도를 외울 때는 사람들이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은재 자신도 힘들 때가 있었다. 예측한 대로 버스나 지하철이 오지 않을 때는 안절부절못했다. 동혁이도 정리하느라 지칠 때가 있었다. 학교의 많은 아이는 식판을 가지런하게 놓기보다는 삐뚜름하게 놓는 일이 더 많았다. 학교 안에서는 그나마 괜찮았다. 외부로 체험학습 가는 날이면, 음식점에서 반찬이나 식기를 정리할까 봐 걱정되었다. 유찬이와의 그날은 몸도 아팠지만, 마음이 힘들었다. 커다란 멍을 누가 볼까 봐 부끄럽기도 했고, 학생 기분을 잘 맞추지 못하여 그 지경까지 갔는지 자괴감이 들었다. 처음엔 내 팔에 멍이 파랗다가 보라색으로 변하고 또, 시커멓게 변해가는 과정만 보느라 유찬이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행동의 패턴이 다른 이에게 경계를 침범당해 부딪치고 어긋나면 마음이 상한다. 결국, 다친 마음을 털지 못하면 날이 선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외우는 노선도, 은색 스테인리스 식판을 정리하는 습관, 더운 날 양말을 빠는 행동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봐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제 또 다른 은재와 동혁이, 유찬이를 만나면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어. 너희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 미안해. 너희를 만나서 내 마음과 다른 이의 행동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단다. 너희는 나의 예쁜 제자이자 선생님, 그리고 히어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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