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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뭇잎 Aug 26. 2023

태풍 곤파스가 나에게 남긴 마.상.

태풍 곤파스. 2010년 우리나라를 지나갔던 크고 작은 태풍 중에 수도권 지역에 큰 피해를 남긴 태풍의 이름이다. 태풍이라는 것이, 날씨라는 존재가 애당초 인간이 예측하여 100% 맞추기는 어렵다. 왼쪽으로 갈 듯하다가도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기 일쑤다. 그런 까닭으로 태풍 예보가 있기 하루 전날만 해도 조심하고 대비해야 한다고만 했지, 학생들의 등교는 어찌하겠다는 말이 없었다. 맑은 날에도 걷기 힘들어하던 임신 5개월 차였던 나는 다음 날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새벽이 되자마자 창문을 열어 밖을 보니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꺾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얼른, 뉴스를 켜니 태풍이 우리나라를 빠른 속도로 관통하면서 직격탄을 맞을 것이라고 했다. 빠른 태풍의 속도를 따라잡을 순 없어도 출근 운전 길의 거센 비바람은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7시가 되기 전에 얼른 출발해야지.” 하고 평소보다 일찍 나섰건만 태풍 영향을 덜 받고 싶다는 생각은 나의 헛된 바람이었다.


출근길 26㎞의 고속도로가 마치 260㎞처럼 느껴졌다. 집에서 출발할 때는 와이퍼 1단이었는데 중동-송내를 달리는 내내 와이퍼가 미친 듯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왔다 갔다 해도 앞이 뿌옇기만 했다. 나의 첫 차, 빨간색 모닝은 살짝 옆으로 밀리다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빙판길에서 초보 스케이터가 걸음마 떼는 기분이었다. 그때, 띠리링 문자가 왔다. '경기 지역 전 학교 휴업령'. 연달아 학교에서 문자가 또 왔다. ‘학교 휴업으로 학교 버스 운행도 하지 않으니, 부모님의 협조와 이해를 부탁드린다는 연락을 각 반 담임이 해달라.’ 2010년, 13년 전에는 운전하면서 전화할 수 있는 블루투스 기능이 내 차에만 없었나, 나만 기능을 몰랐나, 아니면 그런 기능이 2010년에는 존재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기억이 확실치는 않다. 내가 기억하는 건 비바람에 휘청이는 모닝 안에서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한 손으로 급하게 핸드폰 버튼을 눌렀던 내 모습.


"어머니, 죄송해요. 혹시 뉴스 보셨어요? 오늘 휴업령이 내렸대요. 혹시 학교 버스 시간에 맞춰서 일찍 나가실까 봐 연락드렸어요.”

이어지는 한숨 소리. 그리고, 힘듦과 화가 섞인 말이 휴대폰을 타고 쏟아졌다. 갑자기, 크게.

"그걸 당일 아침에 이야기해주면 어떡해요? 내가 아이들 둘을 데리고 있어야 하잖아요.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전화 뒤로 준혁이와 진혁이는 울고 있었다. 특수학교에 다니는 중학생, 고등학생 형제를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급작스러운 휴교 소식은 당황스럽다 못해 화가 날 법도 했다.

‘아침에 갑작스러운 휴업 연락을 받고 혼란스러웠겠지. 하지만, 내가 휴업을 결정한 건 아닌데. 나도 아침에 연락받았다고.’

억울한 마음을 토로하고 싶었지만, 운전대를 두 손으로 잡기 위해선 서둘러 끊어야 했다. 그 와중에도 태풍은 나의 작은 빨간 차를 계속 흔들어대고 있었다.

"어머니,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운전 중이어서요. 다른 소식이 있으면 다시 전해드릴게요.”

늘 상냥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던 어머니의 싸늘하고 까칠한 반응에 난 적잖이 당황했고,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 마치 태풍 곤파스가 우리나라를 할퀴고 지나가듯. 태풍이 얼마큼의 위력으로 어느 방향으로 갈지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기상청의 잘못인지, 태풍이 오기 전에 휴업령을 좀 더 일찍 발표하지 못하고 선제 대응에 실패한 교육청의 잘못인지, 아니면 태풍이라는 큰 기상 상황을 만든 하늘의 잘못인지 따지고 싶었다. 준혁이, 진혁이 엄마도 나처럼 힘든 마음을 타인인 나한테 돌리고 싶었겠지만.     


내 이야기는 진짜 악성 민원의 발끝만큼도 따라가지 못하는 그저 나의 섭섭함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세월이 흘러, 태풍으로 휴업한다는 연락은 교사가 직접 하지 않아도 안전 안내 문자로 전송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 각종 민원을 교사 혼자 온몸으로 받아야만 하는 시스템은 달라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시스템이 없었고, 교사에게 무한책임을 지운 제도를 만든 그들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화를 누르지 못하는 건지, 기분 나쁜 상태를 감출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것인지. 노여움을 학교에 푸는 사람이 많다. 연일 뉴스에 교권과 악성 민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많은 이야기가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빵빵 터지는 건지 모르겠다. 오랜 세월 말하지 않고 참고 있던 일이 지금 수면 위로 떠오른 거라 짐작해본다. 학교 교사를 대하는 학부모가, 가게에서 일하는 점원을 대하는 손님이, 공공 기관에서 업무를 보는 직원을 대하는 민원인이 상대방에게 ‘나는 대접받아야 하는 VIP, 밀착형 일대일 관리를 원하는 왕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은지 되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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