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기를 시작하기 전 2월이 되면 몸과 마음이 바쁘다. 1년 동안 만났던 아이들과 이별하고, 그동안 맡았던 업무도 정리하여 인수인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18년간의 교직 생활, 신학기가 되어 일이 마구 쏟아지는 3월보다 2월이 늘 더 힘들게 느껴진다. 불확실함이 원인이다. 다음 학기에는 몇 학년을 맡을지, 어떤 학생들을 만나게 될지, 업무는 무엇이 될지 알 수 없어 초조해진다.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게 되어도 닥치면 다 잘할 거니 괜찮다고 스스로 주문을 걸어보지만 큰 효과는 없다.
대게 2월 중순이 지나면 신학기 반 배정과 업무분장을 알 수 있다. 중등 특수교사인 내가 특수학교에서 맡을 수 있는 학생은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 후 자립을 위해 준비를 하는 전공과까지이다. 먼저 학년을 확인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재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학생 명단을 확인했다. 아뿔싸! 다른 학생의 이름은 부옇게 흐려지고, 한 학생 이름만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이찬희! 머리가 멍해졌다. 찬희는 학교에서 유명한 학생이었다. 등교부터 하교할 때까지 소리를 지르는, 그것도 꽤 높은 옥타브로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기 때문에 눈에 띄는 아이였다. 화가 나거나 불편한 일이 있으면 옥타브는 더 올라가고 반복하는 말도 많아진다. 복직한 후 교무실에서 나오는 찬희 어머니 뒷모습을 여러 번 봤다는 사실이 떠올라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다행히 한 학기 동안 찬희의 높은 옥타브에 나와 반 친구는 적응했다. 같이 지내다 보니 찬희의 목소리가 기분 좋은 노랫소리처럼 들리는 날도 있었다. 찬희도 교실에서 편안하게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2학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터졌다. 학부모와 소통을 위해 적는 알림장에 빼곡히 적혀있는 장문의 편지. 요약하면, 찬희 다리에 난 털을 누군가가 민다는 생각이 든다, 찬희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의 대상이 아닌지 걱정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찬희 종아리에 난 털이 다리에 골고루 분포하지 않고 어느 특정 부분만 부족한 것이 증거라는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어머니의 다리털에 관한 주장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찬희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면서부터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해마다 어머니 의심의 대상은 바뀌었다. 처음엔 찬희보다 조금 더 덩치가 큰 친구가 범인일 것이라고 했다. 다음에는 자원봉사 활동하러 온 대학생이었다가, 마지막엔 사회복무요원과 교사도 의심했다. 남학생의 화장실 이용을 도왔던 사회복무요원도, 동아리 시간을 함께하는 건장한 체격의 남선생님도 영문을 모르겠다고 했다. 어머니의 의심을 받은 이들은 모두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찬희의 털을 누군가가 고의로 자른다는 물증은 찾지 못했다.
찬희의 다리를 매일 관찰했다. 상담일지에 찬희 털 이야기가 쌓여갔다. 가을이 되면서 긴 바지를 입기 시작한 찬희는 불편하다는 표정과 함께 고성을 질렀다. 나도 편하진 않았다. 남학생의 다리를 보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고, 학생에게도 좋은 감정을 줬을 리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찬희의 다리에 혹시나 면도칼이라도 대어 미는 게 진짜라면, 큰일 날 일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찬희가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곤, 거의 찬희 옆에 붙어 있었다. 다른 이들과의 접촉을 막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학생이 하교하면, 아침부터 오후까지 수업하면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찬희 어머니에게 문자도 보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도 만난 듯 다리털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누군가 찬희를 일부러 해코지 한 건 없고, 털은 그냥 자연스럽게 빠진 걸로 어머니도 이해했다.
털을 몇 달 관찰하고 났더니, 내 머리카락이 한 줌씩 빠지는 느낌이었다. “찬희는 오늘 잘 지냈어요. 친구와도 재미있게 활동하여 짜증 내는 목소리로 소리 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어요.”라는 이야기보다 “제가 보기에 다리털은 어제와 비슷했어요. 오늘은 외부 활동이 없어서 찬희 다리를 누가 만지는 일도 없었고요.”라는 말을 더 많이 했다. 찬희 어머니의 걱정은 다리털이 핵심이라기보다는 혹시나 찬희를 누가 괴롭히지나 않느냐는 것이었다. 찬희가 이야기를 못 하고, 힘든 감정을 소리를 지르며 표현하다 보니 찬희를 누가 미워할까 봐 불안한 감정이 따라다닌 결과였다. 누군가의 다리를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털과의 전쟁도 찬희가 어떤 괴롭힘에 연루된 일 없이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면서 완전히 끝이 났다. 누군가로부터 미움받을까 봐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