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렁울렁 첫사랑
bgm 스노우맨 - 홍광호
https://youtu.be/lY751C4Y8t4?si=p3b37nw3nzDHlMRZ
세상이 지구와 우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내가 닿을 수 없는 저 딱딱한 하늘의 바깥에는 또 다른 거대한 세상이, 그 밖에도 어쩌면 또 다른 세상이……. 세상이 나에 비해 지나치게 거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나만 알고 있는 그 사실에 위로를 받는다. 자기 전 눈을 감았을 때만 떠오르는 난데없는 걱정들. 아무도 없는 방, 우두커니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생각할 만한 것들. 아주 고요하게 미쳐 돌아가는 세상. 나에게는 지나치게 거대한 존재들이지만 저 바깥에서는 가끔씩 들리는 출처 모를 우지끈 소리나 피곤하면 들리다 마는 이명이 되는 것이다. 딱 그 정도 크기의 사건인 것이다.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통해서만 진위를 가릴 수 있다는 과학자들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들은 하루에 수십번을 듣고 수백번을 봐도 우리를 알아내지 못했다. 흥미롭다고 생각하지만 불만은 없다. 외계인이 자신들에게 신호를 보내는지 온갖 ‘과학적’인 방법으로 확인하려 하는 것은 조금 웃기다. 지구 밖에만 있을 거라고 확신하다니.
어쨌든 나는 오로지 나의 세상에 집중하기로 한다. 이곳 밖의 세상, 그 세상 밖의 세상, 모든 세상들은 건너뛰고 오로지 나의 세상에만. 지금이야 나 혼자 방에서 교복 마이를 둘러입고, 혼자 양말을 신고 있으니 이런 잡생각이 드는 것이지만 다인이와 있으면 전부 깨끗하게 사라질 것이다. 생각이 사라지리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어도 꼭 그렇게 된다. 계단을 내려와 신발을 구겨신으며 반투명한 현관문 유리 너머 다인이의 형체를 본다. 문을 당겨 열자 다인이가 입술을 꾹 눌러 웃고 있다.
“야, 안녕.”
항상 내가 먼저 인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불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어쨌든’은 다인이가 좋아하는 단어인데, 본인은 모르는 것 같다. 한번은 다인이가 가족여행을 간다고 학교를 빠진 적이 있었다. 섬으로 가니 바닷물을 떠 오겠다던 그 말이 나는 왜 그렇게 좋았는지 모르겠다. 나한테 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도. 한 해에 얼마 안 되는 다인이가 없는 하굣길은 조용했다. 담벼락 밑의 작은 꽃들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혼자 집에 걸어가며 ‘어쨌든’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 단어를 왜 그렇게 많이 쓰는 걸까?
생각해 보면, 다인이는 좋아하는 게 아주 많아서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 아이다. 다만 여러 주제들 사이에 연결고리를 끼는 데는 능숙하지 않다. 이야기의 주제가 학교에 사는 길고양이에서 갑자기 어떤 독립운동가의 일화로 훅 넘어가는 그런 일들이 잦다는 뜻이다. 이때 나오는 마법의 단어가 ‘어쨌든’이다. 나 어제 집 가다가 고양이들끼리 싸우는 거 봤다. 야, 어쨌든. 너 역사 교과서 본문 말고 귀퉁이에 있는 내용들 알지. 난 그런 세부적인 것들만 재미있어서 점수가 안 나오나 봐. 외워야 할 건 안 외워. 내가 무슨 내용이었냐고 물어보면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하숙이 비밀결사 기지였대. 종로경찰서에 폭탄 던지고 하숙 사람들 다 같이 사라졌는데, 그 뒤 기록은 없대. 궁금하지. 그래서 너는 그렇게 할 수 있었겠냐고 물어보면 아주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다인이에게 나는 네가 그렇게 했다면 너를 데리고 산으로 들어갔을 거라고 말하고 싶다. 실망할 걸 알아서 말하지는 않는다. 다인이는 잠시 조용하다 민망했는지, 또 다시, 어쨌든.
1. 의견이나 일의 성질, 형편, 상태 따위가 어떻게 되어 있든.
2. ‘어찌하였든’이 줄어든 말.
3. 다인이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을 때 주제와 주제 사이에 욱여넣는 추임새.
4. 그놈의 어쨌든.
이 글을 누군가 읽게 된다면 다인이를 어떤 모습으로 그릴까. 교복도 제대로 안 입는 천방지축? 친한 사람 앞에서만 말이 많아지는 괴짜? 물어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 안에서는 방법이 없으니 아쉽다. 하지만 다인이는 정말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애다. 흔하다는 뜻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 보통 사람, 일반인이라고들 하지만 우리 주변에 어디 똑같은 사람이 있던가. 결국 무엇 하나는 다르기 마련이다.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이 다 비슷해 보이는 이유는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생각하기 쉽게 다인이의 생김새나 입은 교복의 모양새를 설명해 주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죽어도 싫다. 사람들이 자기 좋을 대로 다인이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내 눈에 비치는 다인이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도. 이건 나 혼자 품고 있는 못된 생각이다. 누구에게도 해롭지 않은 이기심이다.
다인이와 나는 서로 옆반이다. 화장실에 갈 때도 마주칠 수 있고, 급식실에서 줄을 설 때도 사람들 머리 사이로 다인이를 볼 수 있다. 모든 걸 의식하면서 학교를 다니는 건 아니다. 복도에 나가기 전에 거울 앞에서 눈곱이 꼈는지 확인하고 입가에 침이 흘렀는지 살피는 정도이다. 교실을 나설 때는 시선이 저절로 왼쪽으로 기울어진다. 없다는 게 확실해지면 부글부글 끓었던 마음의 거품이 파스스 가라앉는다.
그때 다인이는 나타난다. 교실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면서 열리고 머리가 튀어나온다. 곧바로 눈이 마주치면 손바닥이 보이도록 손을 척 든다. 흔들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나, 둘, 셋을 세면 다인이의 머리와 손은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교실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나도 내 볼 일을 보고 종이 치기 전에 다시 교실로 들어간다.
개학하고 두 달 정도가 지나면 학생들은 종례를 일찍 끝내는 순서로 순위를 매길 정도로 각 반의 담임들에 대해 파악한다. 다인이는 자기 담임 선생님이 학생들이 선생님께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어 종례를 세 문장 안으로 끝낸다고 한다.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좋다는 게 다인이의 주장이지만 나는 그 사람도 다섯 시가 되면 집에 가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나라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다인이가 자라서 선생님이 된다면 정말 그런 마음으로 종례를 하는 담임 선생님이 되겠지. 나도 똑같이 선생님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인이와 비슷하게 하고 싶고. 이렇게 생각하면 다인이네 담임도 좋은 마음으로 종례를 짧게 하는 가능성도 있겠다. 다인이의 이유든 나의 이유든 간에.
말이 길어졌지만 내가 설명하고 싶었던 건, 보통 다인이가 나보다 학교를 먼저 마친다는 것이다. 학기 초에 둘 다 아주 친하다 할 친구가 없을 때 같이 집으로 걸어간 이후로 늦게 끝나는 쪽을 기다리는 게 불문율이 되었다. 누가 먼저 시작한 전통인지 굳이 따지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창문에 붙은 반투명 시트 위로 떠오르던 다인이의 두 눈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교실을 몇 바퀴 구르던 시선이 내게 떨어졌고 나는 담임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책상 밑으로 엄지를 들어올렸다. 창문에 그 이상한 시트만 붙이지 않았더라면 다인이의 웃는 눈 밑의 표정도 다 보였을 텐데. 어쨌든 다인이와 나는 바로 그날부터 같이 집으로 돌아갔다.
단둘이서 하교한다는 건 아니다. 나도 우리 반에 같이 다니는 무리가 있고, 다인이는 말할 것도 없다. 다행히 내 무리의 친구들 중 몇 명이 다인이의 무리와 아는 사이여서 자연스럽게 같이 섞여 하교하게 되었다. 생판 남들이라 멋쩍어하는 놈도 있지만 옆 반이기도 하고, 내년에 같은 반이 될 수도 있으니 알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종례가 끝나고 아이들이 교실에서 쏟아져 나간다. 책상과 책상 사이를 뚫고 친구들이 웃으며 다가온다. 가방을 잠그고 일어서는데 다인이의 친구들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그 중 가장 말이 많은 애 하나가 머리만 교실 안에 넣고 누군가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린다. 나도 맨뒤에 서 있을 다인이를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다인이의 친구가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빨리 오라며 손짓한다.
“너 다인이랑 같이 갈 거지?”
“우리 다 같이 가잖아.”
“걔 오늘 청소 당번이라 좀 늦을걸.”
다인이가 오늘 아침에 그런 말을 했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같이 집에 못 간다는 부류의 말은 들은 기억이 없다. 하지만 무언가 마음에 걸리적거린다. 작은 돌멩이가 들어간 신발을 신고 걷는 기분이다. 무언가 걸리적거린다.
“청소 당번이 뭐가 그렇게 오래 걸린다고. 혼자 하는 거야?”
“아니, 여러 명 있는데 역할은 다르지. 다인이가 가위바위보 져서 재활용 당번이야.”
“그러면?”
“다인이가 너희 둘이 같이 가도 된댔어. 15분은 걸린다고 우리는 먼저 가래.”
“나는 15분 더 걸려도 되나…….”
“그건 걔한테 물어보고. 우리도 많이 물어봤는데 진짜 괜찮다고 한 거야.”
이 이상 끌면 나에게 좋을 것이 없다. 고개를 털어서 끄덕인다. 어서 가라고 손짓하니 친구들이 어깨를 치며 인사한다. 나를 빼고 덩어리처럼 뭉쳐서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왜인지 신기해서 난간을 잡고 내려다본다. 내 시선을 눈치 챈 한 친구가 입모양으로 내일 보자고 말한다. 달리 대답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니 미련 없이 멀어진다. 나도 얼마든지 저렇게 할 수 있다. 미련 없이 저 덩어리에 끼어서 계단을 내려갈 수 있다. 다인이가 당연히 내가 남을 거라 생각하는 줄 몰랐을 뿐이다.
내 반을 지나쳐 다인이의 반으로 걸어간다. 평소처럼 쉬는 시간이었다면 문에 붙어있는 경고문 때문에 눈치가 보여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 종이에는 검은색 유성펜으로 적은 ‘다른 반 뒤돌아! 그대로 나가!’라는 큼지막한 글씨가 박혀 있다. 다인이가 담임 선생님의 부탁을 받고 써 붙였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 규칙은 오후 4시 30분 이후의 학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교실은 더 이상 학교의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있는 아무 학생, 의자와 분필들, 그리고 햇빛을 반사하며 둥둥 떠다니는 먼지들의 것이다.
다인이가 재활용 쓰레기들을 담는 흰색 서랍장 앞에 등을 보이며 서 있다. 들고 있는 손걸레를 보니 굳이 서랍장을 닦으려는 것 같았다. 사서 고생이다. 등교할 때처럼 보자마자 야 하고 부르고 싶지만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는 목소리가 섣불리 나오지 않는다. 다인이가 맨위층의 플라스틱 칸을 무 뽑듯이 당겨서 서랍장에서 뽑아낸다. 그리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걸레를 움켜쥐고 서랍에 묻은 연갈색과 회색 얼룩들을 닦아낸다.
“야.” 순간 툭 튀어나온 내 목소리는 나한테도 어색하다. 다인이는 놀라지도 않고 서랍을 닦는 손을 멈추지도 않는다. 고개만 뒤돌아본다.
“왜 너 혼자 해?”
다른 애는 일반쓰레기랑 종이 했어. 다인이가 엄지와 집게 손가락으로 손걸레를 집어들고 다가온다. 더러워서 싫은 척 토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서자 뜻밖의 재미를 봤는지 더욱 빠르게 걸어온다. 맞춰주며 뒷걸음질을 몇 발짝 하다가 옆으로 슬쩍 비키니 와락 웃고 문을 열고 나간다. 와락 웃는다. 정말 존재하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인이는 정말 와락 웃는다. 보통 사람이 “하하하” 하고 이어지도록 웃는가 하면 다인이는 절대로 “하”가 두 번 이상 가는 일이 없다. 길어봤자 “하하”이다. 지금 쉽게 설명할 방법이 떠올랐다. 파도가 해변 위로 철썩 올라왔다가 뒤로 빠지기까지의 시간만큼 웃는다. “하하!”
따라갈까 하는 생각도 순간 들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솔직히 자기 교실에 들어오는 다인이의 모습이 어떨지 궁금하다. 다른 반인 나로서는 평소에 알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 다인이가 튼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책상에 앉아 교실을 한 바퀴 둘러본다.
한동안 배경음악처럼 깔려 있던 물소리가 뚝 끊기고, 다인이가 꽉 쥐어짜서 쭈글쭈글해진 손걸레를 쥐고 들어온다. 걸음은 빠르고 얼굴은 시큰둥해 보인다. 다인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오기가 생긴다.
“너는 무슨 닦기까지 하냐. 같은 청소 당번인데 하는 일은 더 많고. 억울하게.”
닦는 이유는 잘 알고 있다. 매점이나 자판기에서 산 캔 음료수를 마신 다음 안 씻고 버리는 경우가 흔하니까. 우리 반도 재활용 서랍장에서 기분 나쁘게 달큰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담임이 여러 번 주의를 준 적이 있다. 몇몇의 깔끔한 아이들이 보다 못해 본인의 당번 순서가 돌아올 때마다 닦아 준 덕분에 그나마 청결하게 유지되고 있다. 다인이가 그런 아이들 중 하나라는 게 은근히 특별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서랍장을 닦지 않았더라도 다인이는 어떻게 해서든 특별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별로 안 억울한데. 다인이가 일반쓰레기 칸을 서랍에 끼워넣으며 중얼거린다. 실수한 것 같다. 다인이가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나도 인성에 큰 문제가 있거나 태도 때문에 문제가 생긴 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다인이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의 범주는 평균을 훌쩍 넘어선다. 당연히 교복을 반듯하게 입어야 하고, 수업 2분 전을 알리는 종인데도 당연히 교실에 들어가야 하고, 당연히 체육 시간이 끝나면 교복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오늘 또 하나 늘었다. 당연히 재활용 서랍을 닦아야 한다. 그것마저 다인이라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내가 다인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범주 밖으로 나가는 것은 싫다. 내 당황한 입꼬리가 꼴사납게 씰룩거리는 게 느껴진다. 이럴 때일수록 대수롭지 않게 말을 흘리는 것이 중요하다.
“나도 닦아. 당번일 때 가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책상 위에 걸터앉아 교실을 휘휘 둘러보며 말한다. 이렇게 말을 흘릴 때는 시선 처리가 말투보다 더 중요하다. 둥그렇게 눈을 굴리며 시선으로 창밖 하늘을 찍었다가 칠판을 찍고 다인이를 찍는다. 이렇게 하면 관심 없어 보이는 효과도 생기니까. 재활용 서랍을 닦는 게 그리 놀랍지 않은 것처럼 보이니까.
그래? 나는 오늘 처음 닦는 거야. 평소에는 안 닦아. 다인이가 마지막으로 종이 칸을 서랍에 끼워 넣는다. 헛웃음이 새어나오기 전에 킁 소리를 내며 일단 의미 없는 감탄사부터 뱉는다. “아하"와 “응"이 절반씩 섞여 나온 것 같은 소리의 감탄사다. 다인이는 뭘 기대했냐는 표정이다. 다인이는 드디어 온전한 상태가 된 재활용 서랍을 발로 툭 건드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서랍 안에 팔뚝까지 집어넣고 얇은 학습지 파일 하나를 꺼낸다. 생긴 모양새를 보니 역사 학습지가 틀림없다. 홀수반은 갑자기 학습지 검사를 하기로 악명 높은 선생이 담당한다고 들었는데, 미리 채워가기로 한 모양이다.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나중에 내 방에 혼자 앉아 있을 때 지금 다인이가 한 말이 몇 시간이고 맴돌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 나는 오늘 처음 닦는 거야. 그게 너무 싫어서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다인이가 없을 때 다인이의 생각을 하는 게 얼마나 답답하고 짜증나는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와, 아무도 없다. 앞서 복도를 걸어가는 다인이가 두 팔을 옆으로 크게 벌리며 말한다.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목소리의 끝이 조금 울린다. 마치 다인이가 이 복도를 다스리는 신이 된 것처럼. 복도를 다스린다고 해 봤자 지금 복도에 있는 건 다인이와 나뿐이지만, 어쨌든. 대답 대신 발소리를 조금 크게 내서 내가 뒤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소리만으로 전한다. 복도는 태양이 작정하고 달려든 것처럼 진한 주황색이다. 다인이가 경쾌하게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다인이가 1층 문에 다다를 때까지 뒤돌아보지 않았으면 한다. 얼굴과 뒷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방법이 왜 아직 개발되지 않은 걸까? 난데없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떠오른다. 그래, 그런 방법이 있었더라면 둘은 슬프지 않았을 것이다. 다인이와 내가 그리스 로마 신화가 아니라 21세기의 한국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다.
다인이가 문 앞의 계단에 앉아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운동화로 갈아신는다. 나는 다인이보다 조금 뒤에 꿇어앉아서 신발을 느릿느릿하게 갈아신는다. 운동장에서는 여자애들 두 명이 네트를 끌고 오고 있다. 한 명은 라인기를 탈탈 끌며 깔끔하게 선을 긋고 있다. 다인이도 선생이 아니라 학생이 직접 라인을 긋는 게 신기한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야, 가자.”
다인이의 가방을 툭툭 치자 퍼뜩 정신을 차린 다인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가로수길을 지나고 교문을 빠져나오도록 우리는 잉크를 낭비하며 인쇄할 만큼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저녁이 무엇인지, 집에서 부모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지, 내일 시간표와 급식은 어떤지, 수행평가가 몇 개나 남았는지. 만난 지 3초도 안 된 사람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들만 나눈다. 나는 이런 점에서 사람에 대한 마음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짧게 생각한다. 다인이와 함께하는 무엇도 특별하지 않다면 다인이 하나만이 다르다고 생각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다인이가 평소에 재활용 서랍을 닦지 않는다고 말했는데도 왜 다인이가 덜 좋아지지 않는 걸까? 저 바깥에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왜 여기만이 나에게 전부일까? 이 작은 것이 전부인 게 왜 전혀 억울하지 않고 오히려 잘됐다 싶을까. 사람에 대한 마음 안에는 무엇이 있어서.
좀 천천히 걷지. 다인이의 툭 터트리는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빠르게 걷고 있는 내 다리를 발견한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다인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앞만 보며 걷고 있다. 내가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 텐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직 앞만 보고 뚜벅뚜벅 걸어간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설마 환청을 들은 건가. 다른 사람도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이런 상황이 자주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기차에 타 한창 풍경을 보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내 머리 주위만 진공 상태인 것처럼 멍멍하다.
너 방금 나한테 천천히 걸으라고 한 거지? 하고 물어보고 싶다. 대답할 틈을 놓쳐서 그냥 공중에 떠 있는 오른발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이제 코너를 돌면 은행나무가 주욱 늘어선 길이 나오고, 그 길의 끝에는 직진하는 긴 횡단보도와 오른쪽으로 꺾이는 짧은 횡단보도가 있다. 다인이와 나의 집 둘 다 오른쪽 짧은 횡단보도를 건너서 조금 걷다 편의점에서 왼쪽으로 돌아야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다. 오른쪽 횡단보도의 신호등에서 초록색이 깜박이고 있다. 학교 앞이라 그런지 도로의 폭에 비해 신호가 길다. 조금만 빠르게 걸어도 여유롭게 건널 수 있다.
다인이는 그 횡단보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앞만 보고 있다. 분명히 무슨 생각이 있을 것이다. 내 반응이 궁금하다거나 정말 들러야 할 곳이 있다거나. 아까부터 말이 없는 게 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울퉁불퉁한 생각이 돌멩이처럼 굴러들어온다. 그 돌멩이는 마음에 콱 박혀 또 오기로 자리잡는다. 다인이가 뭐라도 먼저 말해 줄 때까지 이 횡단보도는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라는 말을 꺼내지 않을 것이다. 다인이가 가면 가는 대로, 멈추면 멈추는 대로, 날아가면 날아가는 대로 따라갈 것이다. 거짓말이다. 정말 다인이가 뛰기라도 한다면 나는 쫓아갈 체력이 되지 않으니 절반밖에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날아간다면 발을 동동 구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다인이보다 체력이 안 좋고 날지도 못하는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동일선상에 서는 것뿐이다. 나란히.
야, 나도 알아. 직진하는 횡단보도의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자마자 다인이가 나를 보며 말한다. 무엇을? 이번에는 제대로 들은 게 확실하다. 그런데 그래서 무엇을? 세상이 뒤집히는 것처럼 울렁거린다. 세상은 온통 주황색인데 하늘에서는 하얗고 동그란 눈이 나풀거리며 올라간다. 아무것도 모르는 다인이는 여름에 눈이 내리는 것도 모른다. 그러니 머리카락에 하얀 알갱이가 묻어도 쳐다도 안 보지. 세상이 다시 한번 뒤집히지만 우리의 발은 땅에 붙어있다. 이제 하얀 눈 알갱이가 천천히 내려온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나에게는 방금 세상이 뒤집혔다 돌아왔다는 건 알 바가 아니다. 단순히 다인이의 웃는 듯 화난 듯한 표정이 싫지 않다. 다인이의 이름이 나쁘지 않다. 다인이가 있는 이 반쯤 둥그런 세상이 괜찮다. 싫지 않고 나쁘지 않고 괜찮다. 더 짧고 쉬운 단어로 말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