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의 도시 아를은 보는 사람에 따라 모습이 바뀐다. 지도에 그려진 아를을 본다면 성당에서 새벽 예배를 마치고 나온 룰랭 씨는 날개를 편 천사의 모양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모자를 모으는 취미가 있는 아들린 양이 본다면 모자를 쓴 자신의 초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사실은 우연히 바람과 파도에 의해 그런 모양으로 닳은 땅덩어리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식으로 기껏 쌓은 낭만을 냉소로 무너뜨리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가 숨쉬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아를을 그저 딱딱하게 굳은 진흙덩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아를에는 그려 보고 싶을 정도로 아기자기한 지붕의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어울리지 않게 로마의 원형 경기장이 우뚝 서 있다. 그 오래된 흔적은 풍경에서 비껴나간 듯하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잡아당기는 힘이 있다. 2만명의 구경꾼들이 이천년 전에 지른 함성이 아직도 메아리치고 있는 것일까. 가장 높은 관중석에 앉아 중앙의 황야를 보고 있으면 바다에 뛰어들 듯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그런 경우에는 경기장에 압도당하기 전에 시선을 돌려야 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 매혹을 견뎌낼 수 있는 자는 없으니까.
아를에 도착하자마자 만나게 되는 라마르틴 광장은 다양한 사람이 강처럼 흘러가는 곳이다. 오후 1시가 되면 각자 볼일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붐비며 저녁에는 술집에 삼삼오오 모이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매일 이 광장에 오더라도 당신이 칸트가 아닌 이상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을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뿐인가, 아를에는 한적한 마을이 제공할 수 있는 최대치의 낭만, 론강이 있다. 그 강으로 향하는 지름길은 매우 아름답고 고요하기 때문에 작게 이야기 나누며 강변으로 향하는 연인들을 볼 수 있다.
광장의 남쪽에는 생동감 있는 거리와 어울리지 않는 검은 집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흰 건물에 그 집이 있는 층 한 칸만 검은색이다. 건물의 1층에는 12년째 장사 중인 륀이라는 작은 가게가 있는데, 낮에는 카페로 밤에는 술집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낮의 손님들은 카페 바깥에 마련된 파라솔 밑의 테이블에 앉아 고단한 몸을 식힌다. 여름의 륀에 오면 햇빛에 달구어진 볼을 얼음 담긴 잔에 대며 한숨을 푹푹 쉬는 모습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그래도 겨울보다는 여름이 나은지, 언제 시원해질지의 순으로 대화를 이어간다. 늘 다른 답이 나오기 때문에 듣는 재미가 있다. 그에 비해 밤에 오는 손님들은 특징이 중구난방하다. 관광객, 노동자, 가족, 친구, 부부, 그 직전의 연인....... 밤은 모두 떨어져서 서로만이 이해하는 대화를 나누는 특별한 시간이다.
검은 집으로 돌아가 보자. 그 작은 공간에는 화가가 들어 있다. 그는 사물을 비추는 빛의 한순간을 포착하는 사람이었다. 노을이 지는 순간에 떨어지는 꽃잎을 빠르게 캔버스 위에 칠했다. 어둑한 불꽃과 빛나는 그림자를 종이 위에서도 움직이게 할 방법을 연구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사랑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람들은 무관심해졌다. 그건 화가의 애정이 너무 커서도 맞았지만, 왜인지 지저분한 수염을 가진 볼품없는 남자의 예술을 후하게 평가하기에는 자존심이 따라 주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화가는 결국 자존심을 버렸다. 그는 다시 그리기로 결심했다. 값싼 캔버스를 살 돈도 부족했기에 이미 그려 놓았던 그림 위에 덧칠했다. 그리고 그림들을 싸들고 시장 입구로 향했다.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시장 안의 구경거리들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지나가며 그나마 눈길이라도 주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지만 그 시선은 겨울철 화가의 작업실보다도 추웠다. 화가를 둘러싼 세상이 그에게 외쳤다. 당신은 완벽한 실패자야.
그러나 그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림을 사랑하기 전의 삶을 기억할 수 없었다. 단순히 감상적인 표현이 아니다. 일을 내버린 지 너무 오래되어 붓을 들기 전의 생활이 어땠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막노동을 할 만큼 체력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건 그렇잖아도 쇠약한 화가의 명을 단축하는 일이었다. 일자리를 소개해 줄 지인도 없었다. 주변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찾아올 때마다 형을 향한 걱정과 한숨을, 그리고 마지막에는 격려를 쏟아내는 불쌍한 게일뿐이었다. 화가는 게일을 온마음을 다해 사랑했다. 그의 영혼과 사랑을 담은 그림을 모두 게일에게 넘기고 죽고 싶을 정도로. 생활비와 재료비를 모두 게일이 대고 있기에 원치 않아도 그리 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살아가던 화가는 어느날 밤 새벽에 눈을 떴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었다. 이런 푸르스름한 시간에 눈을 뜨면 사람은 누구나 가장 좋아하는 존재를 떠올리는 법이다. 화가는 론강을 떠올렸다. 그는 이 세상에 사랑하는 것이 아주 많다. 그는 자신이 보는 세상을 캔버스에 마음의 그것처럼 담아내고 싶다. 잘 되더라도, 잘 되지 않더라도. 어쨌든 그가 하고 싶은 건 그것 하나다. 다른 것을 해야 할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는 그러고 싶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림을 한다. 스스로 미련한 인간이라 생각하면서도 론강이 흐르듯 그림을 그리며 살아간다. 그러다 보면 미안한 마음이 찾아온다. 처음에는 게일에게 미안하다. 결혼하고 나서도 변변한 돈벌이 없이 그림을 그리는 형에게 매일 300프랑씩이나 보내 주다니. 그 다음으로는 뻔뻔하게도 그림에게 미안하다. 자신보다 매력적인 자의 손에서 탄생했더라면.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떨어져 죽기도 힘든 높이다. 무엇보다 이젤 위의 그리다 만 그림이 불편했다. 발을 질질 끌고 다시 매트리스 끝에 걸터앉은 화가의 입에서 맥빠진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우습지 않은가. 그만둘 수 없는 이유가 그만두기 위한 이유와 같다.
오늘이 그 새벽의 2년 전이다. 화가는 그날을 달력에 기념일처럼 기록해 놓고 있었다. 이후 그림을 한 점도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일은 다시 생각해 보라며 그림을 그릴 때와 같은 액수의 돈을 보내왔다. 거울 앞에 서니 붉은 수염이 지저분하게 난 얼굴이 보였다. 그는 아무렇게나 뻗친 수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눈썹 사이 깊게 패인 미간은 얼굴의 힘을 풀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아도 펴지지 않았다.
“화가로서의 마지막 흔적이군.”
그림을 그릴 때 빛이 닿는 곳을 찌푸리며 쳐다본 나머지 미간에는 곧은 세로선이 자리잡았다. 그 줄은 그가 예술가라는 희박한 증거가 되어 주었다. 정작 증거가 되었어야 할 그의 수많은 스림들은 게일에게 전부 넘어갔다. 더는 신경 쓰지 않는다. 가난한 미치광이 예술가라도 섣불리 건드리지 않는 험악한 인상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실제로 몸싸움을 할 능력이 없는 화가에게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테이블 위에는 게일이 이틀 전에 잠시 방문했을 때 놓고 간 지폐 몇 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한 장을 움켜쥐고 집을 나와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이보시오, 붉은 머리. 날씨가 참 좋지 않습니까?”
“직접 창밖을 보시오.”
여느 때처럼 화가가 퉁명스럽게 되받아치자 륀의 손님들이 낄낄거렸다. 가끔 밤새 바깥 테이블에 앉아 술을 퍼 마시던 주정꾼들이 다음날까지 남아 있는 날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을에 ‘붉은 수염 미치광이’로 소문이 파다한 화가에게 재미 삼아 질문을 던지고 다른 손님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을 좋아했다. 작년 한바탕 벌인 일대다수의 몸싸움에서 요란하게 진 이후로 화가는 그들과 더 이상 상종하지 않았다. 륀의 사장이자 건물의 주인인 조셉이 화가를 검은 집에서 쫓아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비켜라, 꼬마야.”
가게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화가의 발끝에 무언가 걸렸다. 그는 문 앞 계단에 쭈그려 앉은 아이를 비집고 나오며 퉁명스럽게 뱉었다. 주변을 지나가던 행인들이 힐끔거리며 그 모습을 쳐다봤다. 붉은 수염 미치광이가 아이를 이유 없이 괴롭히는 장면으로 보았을 것이다. 지금이나 나중이나 모르고 모를 사람들이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신경이 곤두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런 일들이 작게 모이면 아주 큰일이 될 수 있으니까. 살짝 차오르는 숨을 헐떡거리며 ‘고슬랭’ 베이커리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쟁반을 들고 빵을 진열하던 제빵사는 특이한 손님을 흘긋 올려다봤다.
“바빠 보이시는군요.”
“바쁘지는 않습니다.”
화가는 제빵사 앞에 구겨져 뒹굴거리는 지폐를 올려 두고 그녀가 봉투에 빵을 담기만을 기다렸다. 지나치게 느렸다. 어느 순간부터 그를 제외한 모든 것이 느려졌다. 사실은 모두가 느려진 것인데 홀로 그대로인 그를 이상하게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스름돈을 꺼내는 제빵사의 손짓,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 심지어는 햇빛에 반사되어 뚜렷하게 보이는 그녀의 머리카락 주변의 먼지들까지.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을 그리고 싶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거스름돈과 봉투를 낚아채듯 받은 뒤 거리로 나와 보니 사람들이 훨씬 늘어나 있었다. 화가는 사람이 많은 것을 극도로 꺼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풍경을 사랑했다. 아를은 강이 흐르듯 사람들도 흘러가는 마을이니까. 그 풍경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싫을 뿐이었다.
“시뻘건 머리가 왔다 갔다 하니 해가 떴다 지는 것 같군 그래.”
“이것 보게, 해가 뜬다!”
가게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까지 그를 조롱하는 주정뱅이들까지 싫지 않았다. 화가는 그들 또한 캔버스에 담은 적이 있다. 그들은 화가를 이야기하지 않을 때는 들을 만한 주제에 관하여 토론했다. 그런 생동감도 사랑했다. 화가는 늘 인간이 입체적이라고 생각했으며, 미워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의 모든 부분을 혐오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화가는 놀랍지도 않은 조롱들을 무시하고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다행히 2층에는 그 하나밖에 살지 않아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조셉이 가끔 창고에서 물건을 빼기 위해 올라오긴 했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그는 과묵하고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림이 상한다는 핑계로 화가가 복도에 커튼을 달 때도 조셉은 그저 그러라고 할 뿐이었다. 나중에 들어 보니 그것 또한 창고가 서늘한 편이 보관에 용이해서였다. 조셉은 자신이 말하는 그대로의 사람이었다. 그의 말에는 다른 뜻이 숨어 있지 않앗다. 그런 성격은 화가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화가는 어두운 복도를 익숙하게 가로질러 걸어갔다. 어둠은 드디어 친해진 그의 유일한 친구다. 다섯 걸음 정도만 가면 현관문이 나온다. 드디어 문 앞에 서서 열쇠를 찾으려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그의 시야에 쭈그려 앉은 작은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뒤로 나자빠질 뻔하지 않은 척하기 위해 화가는 얼마 안 남은 그의 근력을 끌어모아야 했다.
“누구냐?”
“기억 안 나세요? 그 빵 사러 나가실 때 저를 밀었잖아요.”
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는 나이답지 않게 질책하는 어조로 말했다. 어두운 복도에서는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어린 여자아이 같았다.
“1층에서 보고 궁금해서 따라와 봤어요.”
그 말을 하며 아이는 고개를 들었다. 1층에서 새어나오는 빛 덕분에 화가는 어렴풋이 그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긴 갈색 머리, 끝이 살짝 구부러진 일자 눈썹, 장난스럽게 일자로 다물린 입, 그와 상반되게 화나 보이는 검은 눈동자. 화가를 노려보는 검은 눈은 1층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빛 때문인지 반짝거렸다.
“그래, 몰랐구나. 미안하다. 이제 나와.”
아이의 부모는 붉은 수염 미치광이를 조심하라는 당부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잡상인에게 하듯 계단을 가리키며 나갈 것을 요구하는 화가를 보고 작은 한숨을 쉴 뿐이었다. 아이는 잠시 손장난을 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처음 보셨죠?”
화가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만큼 점점 무거워지는 팔을 느끼고 빵 봉투를 재려놓았다. 확실히 처음 보는 아이였다. 사실 게일을 제외한 누구라도 이 집 앞에 찾아오는 사람은 처음 보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정신을 다잡고 평소의 퉁명스러운 붉은 수염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더더욱 여기 앉아 있는 게 실례 아니겠니.”
“저를 민 것도 실례잖아요.”
오랜만에 화가의 말문이 막혔다. 서서 작은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다가는 누군가에게 오해를 받을 것 같아 그는 자세를 낮추어 아이를 마주보았다.
“그건 진심으로 미안하다. 이제 비켜 주겠니?”
작은 손이 화가가 떨어뜨린 바게트 봉투를 잡아당겼다. 안에 든 바게트들이 담보라도 되는 것처럼 아이가 봉투를 끌어안았다. 화가는 인상을 쓰고 싶은 마음을 눌러담고 눈을 감았다. 험상궂은 어른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투― 소리를 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아빠는 륀의 주인이에요. 조셉, 알죠?”
화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짧고 무거운 정보였다.
“아, 성만 알고 계신가요?”
아이가 재촉하듯 물었다. 화가는 어림도 없다는 눈빛으로 아이의 곧은 시선에 맞섰다.
“내가 네 아버지의 건물에 살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 집은 적어도 이번 달 동안은 내 공간이다. 네가 ‘합법적으로’라는 단어를 알고 있다면, 합법적으로 내 자유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와 별개로 내가 생각한 건, 조셉이 딸을 이리 버릇없는 사탄으로 키울 사람은 아닐 텐데.”
바게트 봉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번에는 아이가 생각하고 있었다.
“연결고리를 잘못 선택했네요.”
“당연하지.” 화가가 대답했다.
아이는 빵가루가 묻은 셔츠를 털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두 분이 친구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면 저와도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문장 그대로는 이해할 수 있었으나 뜻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화가는 그대로 쭈그려 앉아서 이제는 일어난 아이를 올려보았다. 아이는 다시 바게트 봉투를 당당하게 가져갔다. 화가는 이 대화가 끝나면 그 의도만은 제대로 물어볼 작정이었다.
“2층에 살고 있는 아빠 친구가 누군지 궁금해서 나올 때까지 앉아 있었는데 치고 지나가더라고요.”
손님이 모두 나갔는지 1층이 단숨에 조용해졌다. 조셉이 잠깐 새에 사라진 딸을 찾으러 올라올 것만 같아 화가는 계속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내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마음을 놓았다. 그는 뚜둑거리는 허리를 무시하고 일어났다. 그리고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말했다.
“그럼 이제 나와 주겠니?”
내내 무표정이던 아이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는 억지로 친근해 보이도록 입꼬리를 끌어당기고 손을 내밀었지만 바게트 봉투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는 봉투에서 자신의 키만한 바게트 2개를 꺼내어 화가의 왼쪽 손에 건넸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손바닥만한 딸기잼을 꺼내 화가의 오른쪽 손에 쥐여 주었다. 모르는 새에 양손이 꽉 찬 화가가 벙진 채 아이를 쳐다봤다.
“잼은 아예 없고 우유도 거의 안 남았죠?
“내 방에 들어온 것까지는 몰랐구나.”
“바게트를 열 개도 넘게 사 오는 걸 보면 모든 끼니를 바게트로 드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잼이 가장 맛있는 고슬랭에 자주 가는 것 같지도 않고. 1층에서도 음식 사 드시지 않잖아요.”
화가는 입을 닫았다. 그러자 아이는 덧붙였다.
“어쨌든 이 많은 바게트들은 언젠가 다 떨어질 게 분명하고요.”
물론 아이가 뒤로 감춘 바게트 봉투는 지금 선 자리에서 손만 뻗으면 바로 가져올 수 있었다. 다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감 가득한 아이의 눈빛을 꺾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금 드시는 게 점심이죠?”
아이는 화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저녁에 바게트 두 개 더 드릴게요. 그때는 포도잼으로..”
화가의 손에 든 딸기잼은 조셉이 직접 담가 륀에서 파는 제법 비싼 수제 잼이었다. 평소에는 간단한 눈인사조차 하지 않는 조셉이 그에게 딸을 통해 친히 잼을 선물할 리가 없었다. 잼을 들여다보는 화가의 모습을 아이는 심드렁하게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뒤돌아 계단으로 향했다. 안도하며 열쇠를 꽂아넣는 화가의 등에 대고 아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리고 저 ‘합법적으로’라는 단어 정도는 알아요.”
짧고 굵은 만남을 뒤로 하고 화가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신기하지 않은가. 앞에 어떤 일이 있었든 희미하게 사라지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서 있다는 게. 그러나 그 흐름을 느낄 수 없어 행복과 불안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길이 없다는 게. 그는 딸기잼과 바게트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 두었다. 어디에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뺨을 스쳤다. 거친 손으로 뺨을 매만지며 그 근원을 찾자 살짝 열린 창문과 휘날리는 커튼이 보였다. 구름에 햇빛이 가린 모양이었다. 이따금씩 하얀 빛이 어두운 방바닥을 침범하고 있었다. 죽어가는 햇살이라도 바람과 오랜만에 맞으니 나쁘지 않았다. 화가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사라져가는 빛 위에 손바닥을 올려 보았다. 빛은 곧바로 그의 손바닥 위에 다시 올라왔다. 문득 아이가 했던 말이 떠올라 그대로 손목시계를 보았다. 한참 분침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나서야 화가는 더 이상 손목시계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저녁은 언제인가. 화가는 생각했다. 어쨌든 그의 정의대로라면 저녁이 되기까지는 한참 남았다. 그는 손목시계를 풀어 침대 옆 서랍에 올려두었다. 바게트를 아주 천천히 먹다 보면 1시간은 거뜬히 간다. 다 먹은 후에는 평소처럼 침대에 누워 무슨 꿈을 꿀지 생각한다. 그러다 잠에 들면 무슨 꿈을 꿨는지 곱씹는다. 화가는 바게트 조각을 딸기잼에 찍었다. 모양새 좋게 잼을 바르던 시절은 지났다. 달달하고 쉰 딸기 조각을 씹으며 방을 둘러보았다. 목적 잃은 이젤이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 살이 되어 줄 캔버스가 사라지니 뼈만 앙상해진 이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을 존재 자체로 증명하는 낡은 이젤. 화가는 버릇처럼 중얼거렸다.
“시간은 흘러가지.”
똑똑똑. 화가는 발작하듯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커튼을 살짝 걷어 보니 하늘은 노란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똑똑.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가는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이불을 보기 좋게 폈다. 정신은 아이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으나 몸은 까맣게 잊은 것이다. 똑. 이제 보니 카운트다운이었나. 신경을 긁는 노크의 횟수에 화가의 발걸음이 급해졌다. 비척거리며 걸어가는 그의 발에 동그란 물체가 채였으나 무시하고 문을 열었다.
“바게트랑 포도잼이요. 주무셨어요?”
“손목시계가 고장나는 바람에.”
화가는 전혀 관련 없는 대답을 했다.
“잼은 바닥이 났네요.”
아이는 바닥을 구르는 빈 딸기잼 병을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화가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이에게 친절한 어른이 웃어주듯 미소를 짓고 싶었으나 잔뜩 일그러진 미소만 그려질 뿐이었다. 아이를 대하는 것은 늘 어려웠다. 아무리 성숙한 아이라 할지라도 선물한 잼을 다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의기양양해지지 않는가. 마치 영원히 맞추어질 일 없는 퍼즐 조각 같았다. 999개의 조각을 다 맞추고 마지막 조각을 꺼내들지만 이상하게 끄트머리가 맞지 않아 당황스러운 그런 조각. 그 마지막 조각은 지금 바게트와 포도잼을 들고 자신의 방에 들어오고 있었다. 화가는 편두통이 올 것 같아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지그시 눌렀다.
“왜 들어오는 거냐?”
“아멜리는 놀러 갔고 1층은 알코올 냄새 나서요.”
“그게 다냐?”
“와 보니 심심해 보이고.”
아이는 탁자 위의 빵 부스러기를 쓸며 턱짓으로 화가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의 묵묵부답을 나름의 허용으로 받아들였는지 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눈길이 등받이 없는 동그란 의자에서 멈췄다. 의자가 하나밖에 없어 고민하는 듯했다.
“거기 앉아도 된다.”
아이는 화가를 한 번 흘깃 보더니 의자에 풀썩 앉았다. 다리 길이가 미묘하게 맞지 않는 의자는 갑작스러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런데 의자가 왜 이렇게 얼룩덜룩해요?”
화가는 난처한 한숨을 내쉬며 마른 세수를 했다. 그 의자는 아침까지만 해도 이젤 앞에 놓여 있던 의자였다. 아이가 혹시나 올 것을 대비하여 이젤은 임시방편으로 화장실에 던져 넣었었다. 덕분에 의자는 짝을 잃은 채 물감만 덕지덕지 묻은 채로 홀로 서 있었다. 생판 남인 사람 앞에 이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아이는 눈썹을 들어올리며 대답해 보라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화가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살면서 물감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곧 답을 알아내게 될 것이다.
“그림 그리시는 거죠?”
아이가 앞니로 입술을 물며 웃었다. 화가는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은 늘 예술가에게 질문이 많다. 밥은 잘 먹고 사는지, 어떻게 시작했는지, 작업 중인 작품이 있는지.......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다. 아이의 호기심을 해결해 줄 수 없다.
“뭐, 그러면 화가 맞네요. 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알았을까.
“륀은 소문이 워낙 빠르거든요.”
눈앞에 서 있는 이 볼품없는 어른은 화가가 아니라 붉은 수염 미치광이라는 걸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까. 그는 언제나 교육에 소질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는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는 친구가 필요해요. 나이가 같다는 그런 의미의 친구 말고요. 무슨 뜻인지 알잖아요.”
“나는 당최 무슨 뜻인지 모르겠구나.”
“물론 저는 아멜리라는 친구가 있죠. 하지만 걔는 없는 날이 더 많거든요.”
“나는 친구 대행인이 아니다.”
“서로 필요한 게 같다는 거죠. 솔직히 말하면 친구 없는 수준이잖아요, 우리.”
“우리?”
화가는 자진해서 없는 것과 원하지만 없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길게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자진’하게 된 것도 정말로 웃으면서 대화할 사람이 필요 없어서는 아니었으니까. 아이는 그저 수긍하는 화가를 보고 마음이 안 좋았는지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먼저 소개부터 시작해요.”
화가는 드디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소개할 것이 없었다. 한때 붓 끝에 빛을 묻혀 캔버스에 칠하고, 그렇게 그린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어쩌면, 정말 어쩌면, 몇십 년 전의 빛을 느끼고. 그런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이 집이 아를에서 30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면 말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소문, 험담, 조롱, 그리고 무관심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낯선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의 악인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소개할 단어가 가난뱅이, 미치광이, 불쌍한 인간 외에도 있을까. 자기연민은 아니었다. 사실이니까. 어린아이에게 번지르르한 소개를 해 놓고 까발려지는 것이 싫을 뿐이었다. 마을의 소문이 흘러넘치는 륀을 드나드는 아이가 그에 대해 모를 리도 없었다.
“내 소개라면 대신 떠들어 줄 사람들이 많아. 당장 밑에 내려가서 아무나 잡고 물어보면 미치광이 붉은 수염에 대해 많이들 알려 줄 거다.”
아이는 발로 바닥을 빠르게 두드렸다.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까다롭네요. 저는 누가 산다는 이야기 정도만 들었거든요.”
아이는 박수를 짧게 치며 일어났다. 의자가 다시 흔들거렸다.
“제가 1층에서는 귀를 막을게요. 그러면 됐죠?”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네 아버지도........”
“그리고 생각보다 사람들은 큰 관심이 없어요.”
화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었다. 원래 가장 괴로워하고 오래도록 생각하는 건 상처 받은 쪽이니까. 아이는 그만 나가려는 듯 문 쪽으로 걸어갔다. 화가는 무언가 잘못한 학생이 선생님을 따라가듯 그 뒷모습을 따라갔다.
“2층의 검은 페인트는 직접 칠하신 건가요?”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화가는 잠깐 멈춰 섰다. 건물 외벽을 말하는 것이리라.
“거기는 내가 올 때부터 검은색이었어. 나도 보기 흉하다고 생각한다.”
“저라면 노란색으로 칠할 거예요. 어때요?”
별 의도 없는 질문인 것 같아 대답하기가 편했다. 그는 아래는 하얗고 위는 샛노란 건물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았다. 유명한 관광지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집주인이 허락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칠하면 륀이 망할 테니까.”
“아빠도 우스꽝스러운 사람인걸요.”
그 조셉이? 화가의 입장에서 조셉은 신과 가장 비슷한 유형의 인간이었다. 모든 것에 도달한 듯한 차분한 얼굴, 자신이 정해 둔 기준에서 옳은 일을 행하는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쳐다보는 사람을 괜히 엄숙하게 만드는 짙은 눈빛. 소문이 흉흉한 자에게 방을 내어 주지만 그게 훌륭한 인품을 가져서는 아니다. 소문이나 편견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이다. 불쾌하게 하는 법이 없지만 다정하거나 따로 호의를 베푸는 것도 아니다. 화가가 생각하는 신과 조셉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이단적인 발상일 수 있으나, 그는 가끔 자신의 집주인이 신일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했다.
“내일은 아침에 봐요.”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는 속셈이 있는 것 같았다. 재미도 없는 곳에 올라올 이유가 없을 텐데. 화가는 책상에 놓인 포도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그만 가져와라. 불똥이 튈까 봐 걱정된다.”
“글쎄요, 평소에 개수를 세는 것도 아니거든요. 두 번째인데도 눈치도 못 채셔서 요즈음 건강이 걱정되기는 해요.”
아이는 그 말을 하며 쿡쿡 웃었다. 그 조셉이 빈틈도 있었다니, 화가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뒤를 돌자 셔츠와 바지에 얼룩달룩하게 묻은 물감 자국이 보였다. 초록, 빨강, 노랑이 마구 뒤섞인 게 야채 샐러드를 통째로 묻혀 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이는 옷이 더러워진 것은 걱정이 되었는지 진한 눈썹을 팔자로 일그러뜨렸다.
“빨래통에 몰래 집어넣기만 하면 눈치 못 챌 거예요.”
그렇게 화가는 아이를 배웅했다. 내일 아침에 오겠다고 거듭 강조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그 아이의 아침이 언제 시작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불을 끄고 어느새 완벽히 까맣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침대에 눕고 나니 텅 비었던 머릿속으로 생각이 들이닥쳤다. 붓을 놓은 이후로는 한 번도 많이 생각하지도, 오래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는 생각을 귓구멍 밖으로 쏟아낼 수 있을 것처럼 왼쪽으로 돌아누웠다. 몸이 딱딱한 매트리스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감각을 좋아했다. 그런 기분이 드는 날은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문제는 그의 눈에 액자들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얇은 프레임의 액자 속에는 화가와 게일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어린 시절의 그는 눈이 움푹 패이고 이마가 넓은 데다 창백하기까지 한 소년이었다. 지금과 별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린 그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든지 실패해도 된다는, 무엇이든 도전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다. 오히려 어린아이는 그렇게 하는 쪽이 보기 좋지 않은가.
그는 게일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사진 속의 게일은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동생은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안고 태어났다. 처음으로 숲에 들어갔을 때만 맡을 수 있는 흙냄새, 그 풀내음! 빼빼 말랐지만 품은 마음은 화가가 사랑하는 밤하늘만큼이나 넓고 깊다. 그림에 대한 의견은 가끔 화가와 안 맞는 경우도 있었으나, 마지막에는 늘 형의 생각도 옳은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이던 유한 사람. 그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권한 사람.
화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당장 게일의 편지가 읽고 싶었다. 그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두꺼운 편지더미들을 끌어냈다. 모아서 세어 보니 서른 장은 족히 넘는 것 같았다. 마지막 두어 개는 혹시 반가워 답장을 할까 봐 봉투를 뜯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4월 13일이라 적힌 봉투를 찢어서 편지를 꺼냈다. 게일 특유의 둥글한 필기체가 눈에 들어왔다. 글씨는 사람을 닮아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사랑하는 형에게
형, 답장이 오지 않은 걸 알지만 걱정되는 마음에 한 번 더 보내. 이 편지의 문장들은 모두 형에 대한 나의 걱정이라는 걸 알아주길 바라.
답장은 하지 않더라도 스케치는 일주일에 한 점씩은 보냈었는데... 혹시 건강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지? 조세핀도 마지막으로 본 형이 유독 힘들어 보였다고 걱정하고 있어. 세상에 나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형의 조카를 위해서라도 이번만큼은 꼭 답장해 줘.
형이 그림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어. 나는 그렇게 뜨거운 열정은 처음 봤거든.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내가 가질 수 없는 감정일 것 같아 질투한 적도 있지. 그러나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형이 후회하는 거야. 형도 알다시피 그림은 그린 이만이 사랑해서는 그 가치를 가질 수 없잖아. 그게 참 어려운 것 같아. 수치로 돌아가는 일들은 모든 게 맞아 떨어지기만 하면 좋은 평가를 받지만 예술은 우연의 극치에 도달하는 순간이 와야만 그 빛을 보게 되잖아. 그리고 그 우연의 극치는 화가가 살아있을 때 찾아올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지.
형은 깊게 후회하게 될 거야. 나는 그걸 알고 있어. 형이 소중한 존재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솔직한 말을 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아 줘. 그림을 포기하는 것은 형의 삶을 포기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삶을 살아내는 과정일 수도 있어. 그게 형의 몸과 정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더더욱.
하지만 형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걸 뺏을 생각은 없어. 나의 의견일 뿐이지. 언제나 그랬듯 형의 선택을 응원하고 지지할게. 그건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 부담스럽게 받아들이지 마. 다만 한 가지 부탁은, 꼭 답장해 줘.
게일
화가는 글씨 자국으로 울퉁불퉁해진 종이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펜촉이 종이에 닿고 잉크가 종이에 스며드는 동안 동생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게일이 걱정하는 바와 달리 화가의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웠다. 그림을 그리지 않으니 재료값을 아낄 수 있었다. 낡아 헤지기 시작한 외투를 바꿀 수 있었다. 게일의 말대로 가장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나니 비로소 삶을 살아낼 수 있었다. 화가는 편지를 반으로 접어 봉투에 넣으려다 편지 끝부분에 작게 끄적인 글씨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찡그렸다.
추신: 연필 스케치도 멋지지만 형의 색채들이 그리워.
아, 신이 있다면 게일은 천국에 가야 한다. 화가는 편지를 품에 안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게일은 미련을 열정이라 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그 미련을 존중한다. 그 어떤 응원의 문장도 없는 편지였지만 화가는 담담한 게일의 편지에서 늘 위로받았다. 그럼에도 캔버스에 다시 손을 댈 용기가 부족했다. 이번에야말로 팔릴 만한 작품을 그려내야 할 때였다.
그날 밤 꿈에서 화가는 처음 그림을 그리던 순간으로 되돌아갔다.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게일과 가지고 놀라며 놓고 간 연필과 종이가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연필을 손에 꽉 쥐고 흰 바탕 위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게일은 무언가 깨달은 듯한 어린 얼굴로 그 옆에 앉아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악마 같으니라고.”
그림만 생각하면 몸이 떨렸다. 그에게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대개 겪는 인생의 전환점 따위는 없었다. 어떤 계기 때문에 무릎을 탁 치고 이젤을 끌고 와 붓질을 시작한 게 아니다. 어느 여름날 얼굴에 뜨겁게 내려앉는 햇빛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할 수 있겠다! 바람이 볼을 쓸고 지나가듯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이 스친 것뿐이다. 머리가 아주 잠깐 멍해지고, 숨이 미묘하게 빨라지고, 벌써 그 일을 해낸 것처럼 가슴이 벅차고. 그 순간들은 아주 짧게 지나갔다. 아주 못 그릴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렸다. 그게 다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던 것이다. 짧게 스친 순간들이 실재하는지 확인해 보고자 목탄을 샀던 날. 처음 제대로 잡아 본 목탄이 종이의 표면에 닿던 그 순간. 그때 들이켰던 숨이 아직도 목에 남아 있다. 그 숨은 마지막 남은 악마의 숨결이었으리라.
5.
두 주가 지났다. 아이는 여전히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그즈음 되니 화가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꼬마를 지루한 하루의 재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이가 매 끼니마다 문을 두드리는 건 아니었다. 오래된 친구처럼 불쑥 찾아와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설명해 주고, 어디에선가 주워들은 괴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아이의 자리는 늘 물감 묻은 의자였다.
아이가 들려 준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면 베개로 쓸 만큼 아주 두꺼울 것이다. 몇몇 이야기들은 매우 흥미로워 그림과 그림의 소재 외에는 큰 관심이 없는 화가마저도 기억할 정도였다. 화가는 테오가 당부한 대로 캔버스 위에 채색을 시작해 볼 작정이었다. 그는 나뭇가지를 주워 모으는 여인을 그렸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여인 그대로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화가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생명력이었다. 지독한 가난의 한가운데에서 고요하게 나뭇가지를 주워 모으는 그 강인함을 캔버스 위에 새기고 싶었다. 계속 살아낼 각오에는 그 어떤 이유도 없다. 그저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 생명력이란 얼마나 고귀한가.
그러나 그림은 말을 하지 못한다. 그림은 언어라면 직관적으로 전달될 상황과 감정을 보여 주어야 한다. 단순히 선과 그 사이사이를 채운 색깔들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붓을 긋는 방향, 쌓아올린 물감의 두께, 붓으로 그은 선의 길이. 그림에 시선을 짧게 두었을 때 보이는 것들, 아주 오래 한 지점을 관찰할 때 보이는 것들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 그 이상을 보여 준다.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글자 속에 국한되지 않는다. 감상자가 다른 것을 느꼈다면 그것 또한 그림의 새로운 의미가 된다. 모두가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다만 그 경이를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이 화가의 한계였다. 아이가 탁자에 엎드려 신문의 모든 페이지에 낙서를 끄적이는 동안 화가는 같은 부분을 덧칠하고 덮고, 다시 덧칠하기만을 반복했다. 노을이 질 때쯤 화가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반나절 동안 한 귀퉁이도 완성하지 못한 그림을 눈으로 훑었다. 아이가 갈라진 틈 사이로 잼을 넣은 크루아상을 내밀었다. 화가는 고맙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며 크루아상을 크게 베어물었다. 딸기잼이었다.
“그 그림이 꽤나 애먹이나 봐요.”
“어떻게 색칠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차라리 새로 시작할까 한다.”
아이는 벌써 두 개째 먹고 있는 크루아상을 접시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그리고 아직 그 어떤 가능성도 없어 보이는 캔버스를 유심히 살폈다. 채색된 부분을 뚫을 듯 노려보는 아이의 콧잔등에 얇은 선 세 개가 그려졌다.
“솔직히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뭘 그린 건가 싶어요.”
“나도 그게 문제라는 건 안다.”
“하지만 화가를 아는 제 입장에서는 다르죠. 생명력을 그리고 싶은 거잖아요. 단순한 행위가 내뿜는 생명력.”
아이의 눈은 늘 정확했다. 이따금씩 그린 낙서를 훔쳐볼 때 화가는 아이의 재능을 느꼈다. 아이답게 간단하고 단순한 선들이 자아내는 분명하고 단호한 특유의 분위기. 화가는 아이가 더 많은 것을 말해 주기를 바랐다.
“곧 될 거예요.”
아이는 팔짱을 끼고 턱으로 캔버스를 가리키며 툭 던지듯 말했다.
“확신하는 이유가 궁금하구나.”
“저는 보는 데 소질이 있거든요. 이 귀퉁이만큼 칠해진 걸 보면… 그림 전체가 보여요. 분명 원하는 그림이 될 거예요.”
단호한 긍정의 말만으로 그림이 달라 보였다. 화가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고맙구나. 사실 괜히 물감을 낭비할 것 없이 새로운 그림으로 덮는 선택지도 고려 중이었다. 네가 이 그림의 수명을 늘렸어.”
“덮는 건 절대 안 돼요.”
“가난한 화가에게는 아주 흔한 일이다.”
“덮은 그림이 정말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이는 또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내려는 모양이었다. 화가는 이야기를 기대하는 티를 안 내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 붓을 들 용기가 났다. 교훈이 담겨 있거나 위로를 목적으로 지어내는 이야기들은 아니었으나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할 이유를 오래도록 듣는 기분이었다. 아이는 진수성찬을 앞에 둔 사람처럼 두 손을 맞대어 비볐다.
“이건 학교에서 도는 괴담인데요. 아주 오래도록 소설을 써 오던 유명한 작가가 있었대요. 그는 삶의 끝을 장식할 마지막 작품을 쓰려고 했어요. 2년 동안 소설의 줄거리를 고민하고, 3년 동안 등장인물에 대해 고민하고, 5년 동안 결말을 고민했죠. 그리고 마침내 10년째 되는 날에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한 거예요.”
“고민이 많은 작가였구나.”
“마치 어떤 화가처럼.”
화가는 눈을 굴렸다.
“아무튼 그 작가는 소설을 쓰기 위한 모든 준비를 끝냈으니 글만 쓰면 된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글 쓰는 것도 쉽지는 않지.”
“너무 오래도록 한 이야기만 생각한 작가는 싫증이 나 버렸어요. 처음에는 쓴 시간이 아까워서 꾸역꾸역 도입부까지 글을 써냈죠. 그리고 억지로 중간까지도 썼어요.”
“내가 구상부터 스케치까지 완료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절정에 도달했을 때 한계에 도달한 거예요.”
“저런.”
“그래서 걸어잠갔던 문을 열고 나가서 세상에 알렸어요. 이전에 말했던 내용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겠다고.”
“이전의 작품은 버려진 거군. 글 쓰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흔한 일일 수도 있지.”
“그 다음이 가장 중요해요. 작가는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기도 전에 실종됐어요. 총성을 듣고 문을 따고 사람들이 작업실에 들어갔을 때는 아무도 없었어요. 그의 책상 위에는 마지막 작품의 원고가 가지런하게 올려져 있었죠. 그러나 그 결말만은 타 들어가 읽을 수 없었어요.”
“총성 소리가 들렸다면 누군가 쓰러져 있어야 할 텐데.”
“어떤 사람들은 작가가 결말 직전에 내친 작품의 주인공이 그 범인이라고 믿어요. 너무 오랫동안 작가의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진 바람에 정말로 나타난 거예요. 원고 밖으로 나와 자신을 버린 작가에게 복수하고, 마지막 작품의 결말도 함께 불태워 버린 거죠.”
“세상에, 그건 불가능해.”
“그러니까 괴담이죠.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요. 작가의 실종은 명백한 사실인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저 그림을 완성하라는 네 뜻은 잘 알았다.”
“친구가 저 캔버스 속으로 잡혀가면 슬프니까. 아무리 그림을 좋아하셔도 저 여인에게 잡혀가는 건 계획에 없으시잖아요.”
화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붓을 들었다. 자신의 그림으로 빨려들어가 다른 그림을 못 그리게 되는 것보다는 끈기 있게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 나았다. 조용한 방을 붓질 소리가 잔잔하게 채웠다. 이윽고 신문 위에 연필을 사각이는 소리도 기분 좋은 소음에 동참했다.
세 달이 지났다. 아이와의 독특한 만남은 지속되었다. 달라진 점은 둘의 옷이 두꺼워졌다는 것과 아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뿐이었다. 후자는 매우 중요한 차이였다. 화가는 아이가 신문 귀퉁이에 그려 놓은 그림들을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했다. 정확히 무엇을 그리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이는 도무지 꽃으로 보이지 않는 그림을 매번 단호하게 꽃이라고 설명했다. 그게 무슨 꽃이냐 물어보면 어울리지 않게 아이다운 웃음으로 자신만 아는 장소에 있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때 화가는 어린아이의 눈이 내심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아이는 화가의 방에 찾아와 그림을 끄적였다. 화가는 책상 앞에 앉아 제대로 그려 보기로 마음먹은 스케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게일에게 보내고 싶은 그림이었기에 특별히 정성을 기울일 생각이었다. 나뭇가지를 줍는 여인의 그림은 완성해 게일에게 이미 보냈다. 게일은 기뻐하며 그림에 대한 칭찬을 담은 편지와 돈을 보냈다. 그런 동생에게 화가는 답장 대신 몇 장의 스케치를 보냈다. 게일은 다시 건강에 대한 염려와 짧은 응원을 덧붙인 편지와 함께 돈을 보냈다. 화가는 그 돈을 서랍 한 구석에 넣어 놓는 대신 유화 물감을 샀다. 아이가 부탁한 노란 물감을 낱개로 하나 더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화가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서일까. 아이는 유독 노란색을 좋아했다.
가장 얇은 붓으로 신문지 위에 꽃을 그리는 아이에게 화가는 물었다.
“노란색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건 어려울 텐데.”
“제가 좋아하는 것들은 모두 노란색이거든요. 충분해요. 그리고 낙서에 필요한 물감 살 형편은 안 되는 거 다 알아요. 아빠한테 물감을 부탁하기에는… 이 모든 게 비밀이어서요.”
화가는 아이가 책상 위에 펼쳐 놓은 난장판을 보았다. 물감이 묻지 마라고 깔아놓은 신문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신문지가 놓여 있었다. 그는 아이가 그린 작은 우주를 살펴보았다. 활자 사이사이에 달, 별, 꽃, 레몬이 수놓여 있었다. 끈적한 물감이 덜 말라 번들거렸다. 화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쭉한 사람 형태의 그림을 가리켰다.
“이건 누구니?”
“제가 커서 되고 싶은 모습이요.”
“키가 아주 크구나. 옆에 있는 달보다도 큰데.”
아이는 대답 없이 특유의 찡그린 미소를 지으며 붓으로 일정한 선을 그었다. 그리고 물의 흐름을 표현하듯 팔의 힘을 풀고 곡선을 세 줄 그렸다.
“이건 론강이에요.”
“너도 론강을 그리고 싶어하는구나.”
“통할 줄 알았어요.”
론강! 강은 흐른다는 점에서 아름답다. 강의 아름다움은 그 모순에 있다. 너무나도 거대해서 고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흐르고 있다. 그보다 거대한 바다로! 강은 특정한 순간보다 ‘흐른다’는 근본적인 특징에서 뿜어내는 열정과 힘이 있다. 강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으면 움직이는 기분이 그다지 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깊은 잠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천천히 눈을 뜨면 당신은 어느새 바다에 있는 것이다. 그 단순한 아름다움이란! 이런 일련의 생각들에 정신을 맡기면 화가는 자신도 모르게 어린아이처럼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마음대로 입이 움직였다.
“날이 좋으면 론강에서 그림을 그리자.”
아이는 의자에서 일어나 손뼉을 한 번 쳤다.
“좋아요!”
사랑하는 형에게
형, 보내 준 스케치들은 잘 봤어. 형이 보는 풍경들을 그림으로 볼 수 있어서 기뻐. 형은 역시 고상한 사람들을 그리는 것보다는 한적한 풍경을 더 좋아하는 거지? 내 관찰력이 뛰어나다는 칭찬은 넣어도 괜찮아. 이때까지 형이 그린 것들은 모두 시골내음 나는 풍경들이었거든.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건, 유화를 그려 보는 건 어때? 물론 목탄이나 수채화 그림들도 좋았지만 요즘 형이 보내 주는 스케치들은 유화로 색을 준다면 정말 살아 움직일 것만 같거든. 무엇보다 형은 늘 유화가 캔버스에 묻었을 때 주는 질감을 좋아했잖아. 실은 나와 가까운 손님 중에 형과 비슷한 이유로 유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 어쩌면 형의 그림을 팔 수 있을지도 몰라. 늘 응원하는 마음으로 유화 물감을 살 돈을 함께 보내.
p.s. 형의 조카가 세상과 인사하기까지 두 달도 남지 않았어. 행운을 빌어 줘.
게일
게일에게
게일, 네가 보낸 돈으로 물감을 샀다. 네게는 늘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 없구나. 나는 요즘 매우 좋다. 좋다고 말하는 것은, 그림도 삶도 좋다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하고 쉽게 좋다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인생에 얼마나 될까? 스스로가 쓸모없는 개라고 생각하며 그림만이 날 붙잡아주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지금도 그림만이 날 붙잡는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림이 내 손을 잡고 낭떠러지에서 끌어올려주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림과 나란히 서서 손을 잡은 기분이다. 그리고 싶은 것도 많아졌고, 먼 미래에는 모든 것이 잘 풀릴 거라는 확신이 든다. 사람들은 이런 확신을 모두 가지고 살아가는 건지 궁금하구나. 너는 어떤 계기로 나에게 이런 기분 좋은 변화가 찾아왔는지 물어보겠지. 말 그대로다. 변화가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말할 수가 없구나. 너는 행복을 입으로 말하면 사라질까 걱정되는 기분을 알고 있니? 어쨌든 나는 늘 그 변화에 감사하고 있다. 한 가지 알려 줄 수 있는 것은, 곧 론강에 가서 유화를 한 점 완성할 거라는 사실이다. 너와 친분이 있는 그 손님이 마음에 들어한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그걸 신경 써서 그리지는 않겠다. 화가가 생각하는 자연의 핵심이 아닌 유행의 흉내만이 들어 있는 그림은 가치가 없거든. 너와 가까운 사람에게 그런 텅 빈 그림을 내밀 수는 없지. 그리고 또 한 가지 알려 줄 수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 곧 내 조카가 나온다는 사실을! 그 생각만 하면 내 마음은 충만해진다. 조세핀에게 나의 안부를 전해 주렴.
론강에 가기 전날, 작업실에서
화가는 캔버스와 싸우고 있었다. 하얀 건 똑같은데 흰 종이를 보는 것과 캔버스를 마주하는 건 왜 이리 다를까. 이젤에 우뚝 선 캔버스만 보면 고요한 호통소리가 들렸다. 어쩌자고 다시 자신을 꺼냈는지, 이번에 그려내는 것은 진심으로 다른 사람에게도 의미를 가질 만한 그림인지. 그럴 때 화가는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똑같이 캔버스를 향해 호통쳤다. 나는 결과를 앞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는 나를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론강에 가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와 특정한 날짜를 잡아 둔 것은 아니었으나 하늘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있다. 계절이 순환하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고 좋은 건 반복되는 법이 없는 인생과는 아주 다르다. 북적이는 하루에 해와 달, 일출과 노을, 여름과 겨울처럼 순환하는 것이 없었더라면 인간의 삶은 한층 더 머리 아픈 일이 되었을 것이다. 화가는 다시 찾아온 가을을 맞이하러 론강에 가서 그림을 그릴 계획이었다. 밤이 되기 직전, 하늘이 부드러운 주황색으로 덮이고 그 끄트머리를 완벽한 라일락색이 물들이는 날이 가을이다. 그때 그림을 그린다면 텅 빈 캔버스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스케치였다. 그에게는 오래전 론강에 가서 즉흥적으로 남긴 스케치가 있었다. 그때는 색을 입힐 생각이 없던 지나가는 그림이었으나 다시 아이와 론강에 대해 이야기하고 난 후 마음이 바뀌었다. 그는 까만 지문 자국이 남은 종이를 한 번 쓸고 그려놓은 그림을 관찰했다. 노랗고 푸른 풀이 덮인 강둑을 한 연인이 걷고 있다. 그들은 날이 추워서인지, 아니면 조금 취해서인지 서로에게 기대어 천천히 화가를 향해 걸어온다. 그들의 뒤로 돛단배 두어척이 둥실둥실 앞뒤로 움직인다. 오래 보고 있으면 멀미가 날 것 같다. 화가는 죽죽 그은 선으로 표현한 돛단배를 갈대펜으로 툭툭 쳤다. 한 척 정도 더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스케치는 말 그대로 계획이다. 계획을 바꾸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는 까만 선 몇 개를 더 그어 새로운 돛단배를 창조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주 정중한 두드림인 걸 보니 아이는 아니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화가는 천천히 걸어가 문을 절반쯤 열었다. 틈 사이로 조셉이 보였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문을 턱짓했다. 더 열라는 뜻이었다. 화가는 문을 활짝 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조셉은 방 안을 흘깃 살펴보는 것으로 집주인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를 찾아올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있다면 집을 비우라는 통보뿐이다. 둘의 사이에는 무언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듯했다. 조셉은 씩 웃으며 익숙한 봉투를 들어 보였다. 아이가 방에 올 때마다 몰래 잼을 넣어왔던 봉투였다. 아이가 들킨 것이다. 화가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당신에게 꽤 많은 잼이 갔던데. 잼이 이 방의 출입권이었소?”
신은 늘 지켜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조셉이 내민 봉투를 조용히 받아들었다. 조셉
은 과일들 이름을 나열하며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화가가 받은 잼 개수를 세고 있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져간 잼이 꽤 많소.”
세어 본다면 분명 서른 개도 넘을 것이다. 아이는 일주일에 두 병은 가져왔으니까.
“계산하고 제대로 지불하겠다고 약속하오. 아이를 꾸짖지는 말아 주시오. 그저 가난한 화가
를 돕고 싶은 마음이었을 거요.”
“살면서 당신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건 처음 보는군.”
고요한 정적 속에서 조셉이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려보냈다. “그 애는 이걸 들킨 것도 모르고
있소. 모르도록 둘 거고.” 조셉은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자신의 딸이 항상 위층의 어디로 사라지는 것인지 궁금했을 뿐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조용히 륀의 구석자리에 앉아 책이나 뒤적이던 아이가 왜 밤마다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것인지. 손을 찔러넣은 척하며 숨긴 불룩한 앞주머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 건지. 그는 화가보다는 자신의 아이에게 더 큰 궁금증을 품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 또한 륀의 손님들을 대접하며 세를 내어 준 화가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에 늘 아이의 상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번 바뀌는 소문에 정보의 신빙성을 의심하게 되었으며, 계단에서 슬금거리며 내려오는 아이의 표정이 어둡지 않아 그대로 두었다. 그러고 나니 위층의 화가가 궁금해졌다. 소문의 주인공은 어떤 유형의 인간이길래 별난 자신의 아이가 찾아가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궁금했소.”
“륀의 주인이라면 이렇게 찾아와 확인할 필요가 없을 텐데.”
“나를 그런 머저리들과 같은 선상에 두지 마시오. 나는 내 눈으로 확인해야 믿는 사람이니까. 아직 지구가 스스로 돈다는 사실조차 의심하고 있을 정도라고.”
이건 웃을 수밖에 없지 않나. 화가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도로 삼키려는 사람처럼 바람 빠진 풍선 소리를 냈다. 그리고 스스로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조셉은 잼을 숨겨오는 아이처럼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고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다시 어색해지려던 무렵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궁금했소.”
조셉은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소. 내 아이와 친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평범하지는 않을 테니까.”
화가는 조셉의 말에 답할 수 없었다. 조셉은 마을 보통의 부모들과는 매우 달랐다. 아무리 성품이 좋은 사람이라도 자식과 관련된 문제라면 편견 또한 위험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편견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그런 태도가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느꼈다. 자신이라도 그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셉은 꽤나 독특한 부모였다. 조셉이 주저하며 물었다.
“혹시 그 아이가…….”
그는 턱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 아이가 내 이야기를 합니까?”
이건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다. 질문을 듣자마자 기억을 더듬어야 한다는 시점에서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이가 조셉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처음 만났을 때 자기소개 외에는 없었다. 조셉과 눈을 마주치자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듯한 차분한 눈빛이 돌아왔다. 그가 바라는 대답은 아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화가는 어렵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바쁘다는 말은 자주 합니다.”
조셉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는 한 존재를 책임지는 삶을 생각했다. 함께 있어 주지 못할 명분이야 있었지만 감정은 별개의 영역이었다. 아이는 조셉을 닮아 차분하고 조용했지만 그처럼 어른이 된 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당장 채우지 않으면 영원히 빈 공간으로 남는 특정한 시기가 있다. 그 공백의 시간을 채워 줄 존재가 필요했다.
“가끔씩은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더군요. 꽤 유익합니다.”
화가의 말에 조셉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문틈으로 보이는 이젤과 그 위에 얹힌 스케치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림은 다시 시작한 겁니까?”
“불쑥 찾아오는 꼬마의 덕이 컸죠.”
“행운을 빌겠습니다.”
“행운은 그 꼬마로 충분합니다.”
“나는 이만 봉투를 제자리에 두러 가 봐야겠군요.”
1층으로 내려가기 전, 조셉은 복도 창문을 까맣게 가린 커튼을 걷었다. 이제 막 어두워지는 하늘의 주홍빛이 복도를 물들였다. 바깥의 생기 넘치는 바람이 화가의 볼을 쓸고 지나갔다. 조셉은 벽에 비친 한 줄기 빛을 가리켰다.
“화가에게 빛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까.”
그는 계단으로 발을 한 발짝 내딛고 다시 뒤돌아 화가를 보았다.
“밤공기가 좋습니다. 언젠가 내킨다면 론강에 가 보세요.”
완전한 가을이 세상을 덮었다. 주변의 모든 자연이 가을을 증명했다. 아침이 되면 조금 서늘해진 공기, 평소보다 자주 올려보게 되는 하늘, 길을 걸으면 코끝을 스치는 나무의 달콤한 향기. 여름의 열기가 식은 뒤 자주 찾아가는 원형 경기장 또한 새로운 계절을 맞이했다. 가을만의 시원하지만 따가운 햇살을 머금은 로마의 옛 흔적은 과거를 잊은 듯 고요했다. 딱딱한 돌 위에 앉아 몇 시간이고 스케치를 하는 화가를 보고 뒷담을 즐기는 자들은 더위를 먹어 증세가 심각해진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륀의 술주정뱅이들은 이야깃거리가 떨어졌을 때 드디어 미치광이 붉은 수염이 곧 죽을 날이 되었다는 가벼운 화제를 꺼내들고는 했다.
그러나 화가는 모든 것을 무던히 넘길 수 있었다. 그들 또한 결국 화가의 캔버스에 자리잡을 사람들이었다. 그림을 시작한 이후로 화가는 무언가를 완벽하게 싫어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그림이 고군분투하는 화가에게 살며시 선물한 진통제일지도 몰랐다. 먼지와 잡동사니만 굴러다니던 서랍 속에는 이제 드로잉이 가득한 스케치북과 아이가 낙서한 신문들이 가득했다. 원형 경기장 드로잉은 4장이나 되었고, 그중 잘 그린 2장은 게일에게 부칠 생각이었다.
게일에게도 화가만큼이나 많은 일이 몰아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식구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이다. 기쁨이 가득 찬 게일의 편지에는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눈썹 한올까지 설명할 기세인 편지를 읽고 화가는 조카를 상상하며 스케치를 한 장 그렸다. 또 다른 일은 게일이 운영하는 소박한 화상이 점점 잘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꽤 이름 있는 작가들이 그를 방문해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 또한 자신의 그림을 알아볼 한 사람을 찾아낸 것이다. 게일은 그림들에서 한 번 보았을 때는 알 수 없는 화가의 감정을 이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잘된 일이에요, 그렇죠?”
아이가 말했다.
“그래, 하지만 이제 동생에게 기대는 것도 그만두어야 해.”
“이야기를 들어 보면 더 돕고 싶어하는 것 같던데.”
“책임을 지고 싶은 거야. 나에게 그림을 권한 건 게일이니까. 하지만 그림을 시작한 건 내가 그걸 원했기 때문이야.”
“그 분도 알고 계실 거예요.”
화가가 무슨 뜻이냐는 듯 내려다보자 아이는 주머니에서 꾸깃한 편지를 꺼냈다. 그 주머니에서는 늘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 나왔다.
“너, 내 편지를 뜯어 본 거냐?”
“아직. 우체통에 들어 있길래 빼 왔어요. 이 편지 읽고 다시 생각해 봐요.”
형에게
형이 보낸 스케치들 잘 보고 있어. 이제 형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제대로 담아내기 시작한 것 같아. 내 말이 맞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작업에도 도움이 될 테니 조심스럽게 말할게. 형이 예전에 그린 나뭇가지를 줍는 여인들 있잖아. 그 그림을 볼 때 나는 여인의 행동을 관찰하는 타인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어. 그런데 이번에 형이 새로 그린 원형 경기장은 전혀 달라. 누군가가 찍은 사진, 누군가가 보고 그린 풍경을 보는 느낌이 아니야. 경기장의 바람, 돌의 딱딱한 질감, 날씨… 모든 걸 몸으로 느낄 수 있었어. 그림을 보자마자! 그러니까 형은 분명 형이 항상 말하던 자연의 핵심, 사물의 본질에 다가서고 있는 게 분명해. 형은 늘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는 걸 싫어했지.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형의 그림들에 대해 잘 알고 있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내가 형에게 투자하고 있다는 것도 믿어 주었으면 해. 형이 우리의 사정을 신경 쓰고 걱정하고 있다는 거 알아. 형의 편지들에 필요한 재료들에 대한 내용이 점점 빠지고 있거든. 그러면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그림을 관둔 건 아닌지 종일 걱정하는 수밖에 없어. 형에게 역으로 부담이 될까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조세핀과 나는 작년에 아주 경제적으로 좋았어. 화상에 손님도 늘고, 그림들이 제값을 받고 팔렸거든. 그러니 필요한 물감이 있거나 생활비가 부족하다면 형은 형의 그림에만 몰두하면 돼. 형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야 하는 사람이야. 그것만 한다면 해야 할 일을 다하는 거지. 형이 걱정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형은 충분한데 괴로워하는 이유도 모르겠어. 형은 분명 형이 그토록 바라는 본질에 가까워지고 있어. 행복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형도 그걸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끊임없이 형의 세계를 캔버스에 그려 줘. 늘 기다리고 있을게.
게일이
아이는 정말로 편지를 처음 보는 듯 화가의 주변을 맴돌며 어깨 너머로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걱정이나 염려는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아주 가벼운 사람도 누군가를 믿는다는 말을 이렇게 길게 하지는 않아요. 짧게 믿고 응원한다는 말만 하면 그만일 테니까. 이렇게 자세하게 믿는 이유를 적어 놓은 건 편지를 받는 사람이 더 깊게 생각하기를 바라서일 거예요. 문장의 뜻을, 쓴 사람의 진심을 곱씹으라는 거죠.”
“너는 게일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제 앞에서 편지를 읽은 게 한두번이어야죠.”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저요?”
아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고요하거나 장난스러운 상반되는 표정만을 유지하던 얼굴에 당혹감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화가는 덩달아 그런 아이의 모습에 놀라 헛기침을 했다. 사실 화가가 던진 질문도 명확하지 않았다. 화가의 그림에 대한 것인지, 게일이 화가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것인지, 그림을 관두어야 할지. 흔히들 하는 것처럼 지나가듯 하는 말이었으니까. 가볍게 동의하고 지나가면 되었을 상황에 아이가 처음 보는 모습을 보여 주자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게일의 편지보다도 아이의 대답이 앞으로의 일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처럼.
“누군가 아주 사랑하는 일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말할 용기는 없어요. 차라리 응원하는 게 마음이 편하죠. 게일이 무슨 마음으로 응원한다고 말했는지 저는 알 길이 없지만.”
아이는 캔버스를 가리켰다.
“그래도 한 가지는 정확히 알아요. 화가는 그림을 그려요. 죽었을 때 비석에 새기고 싶은 글자가 화가라면, 팔리든 말든 그림을 그리는 게 맞아요.”
아이는 탁자 위의 바게트가 담긴 봉투를 팔에 끼고 일어났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지만, 이런 우중충한 방에서 편지를 읽으면 생각도 우울할 수밖에 없어요. 장소를 바꾸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요.”
아이는 반대팔로 이젤에서 아직 아무것도 담지 못한 캔버스를 내렸다.
“저 수첩 밑에 숨겨둔 스케치, 가지고 나오세요.”
화가는 자신도 모르게 숨긴 스케치가 무엇인지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얼마 전 조셉이 찾아왔을 때 그리고 있었던 스케치였다. 급작스러운 방문 이후 몇 번 꺼내 보기는 했으나 그때의 풍경도, 감상도 아득해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 뒤로는 밑에 깔아두고 가끔 지나치다 떠올리는 정도였다. 아이는 어떻게 타인이 그린 종이 조각을 기억하는 걸까.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는 아이가 시킨 대로 수첩 밑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납작하게 깔린 얇은 종이를 뽑아 낡은 가방 안에 넣었다.
“어디로 가는 거냐?”
아이의 얼굴에 반달이 떠올랐다.
“당연히, 론강으로!”
누구든 예술가로 만드는 공간이 있다. 유독 그 공간에만 들어서면 아주 미세한 순간마저도 특별해지는 마법이 일어난다. 그런 장소를 억지로라도 만들어 둔다면 우리의 삶에 행복이 드나들 구멍이 많아질 것이다. 예시를 들지 않는다면 이런 말은 와닿지 않을 것이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사소한 일들이 행복이 될 수 있다. 이런 정론에 누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겠는가?
그러니 화가의 예시를 들자면, 지금 론강에 가까워지는 순간들. 가을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 꽤 오래 걸어도 덥지 않다. 고개를 들면 작년 이맘때쯤 본 색의 투명한 하늘이 세상을 감싼다. 보물찾기를 하듯 달을 찾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다. 가까워질수록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평온해진다.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히 아는 것도 기쁘다. 그리고 마침내 론강이 모습을 드러내면, 화가의 세계에는 오로지 이 강이 전부다. 곧게 뻗는 빛도 물결 위에서는 아스라진다. 강의 한복판이라면 그토록 잡고 싶었던 빛에 닿을 수 있다. 물결에 그려진 짧은 선의 빛들은 점차 보는 이를 향해 걸어온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저 찰랑거리는 소리, 그리고 눈앞에 놓인 별을 향한 징검다리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들이 이어지는 데는 3초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러니 그 순간이 지나가기 전에 기억을 붙잡고 그려야 한다. 시간과 맞서 싸워야 한다.
“자, 아를의 명물 론강. 이제 가장 행복할 일만 남았어요.”
아이가 잔디 위에 풀썩 앉았다. 화가는 조금 축축한 바닥을 손바닥으로 쳐가며 평평한 부분을 찾았다. 운이 좋게도 이젤은 흔들거리는 일 없이 견고하게 흙바닥에 섰다. 이런 사소한 운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스케치랑 똑같네요. 그때도 가을이었던 거죠?”
“글쎄, 너무 오래 전이라. 그래도 정말 그대로구나. 저기 있는 배도, 저기 걷고 있는 사람들도. 시간여행을 한 것 같다.”
“강은 잘 안 변해서 그래요. 그러고 보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대답은 해 보마.”
“모든 그림들 속에는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어요, 그렇죠?”
“왜 그렇게 생각하니?”
“그림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변하지 않는 것들을 이야기하잖아요. 사랑이나 열정이나, 분노나. 그런 것들. 백년이 지나고 천년이 지나도 여기 남아 있을 것들이요. 지금 이 캔버스에 새겨질 론강도 모습은 바뀌겠죠. 하지만 여기 담긴 건 수천년 동안 앉아서 강을 바라보았던 모든 사람들의 감정이에요. 그 평온한 감정은 지구의 물이 마르지 않는 한 변함없이 존재하겠죠.”
“네 말이 맞아.”
“그러니 이 그림은 영원을 담은 거겠죠. 그림을 그린 화가가 죽고, 제가 죽더라도 평온은 지구에 남아 있을 거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아무도 봐 주지 않는 그림이 된다면 무엇을 담았든 그대로 땅에 묻히고 말 거야.”
“고고학자들이 동굴 벽화를 찾았듯 누군가 파낼 거예요.”
“내 그림이 유물이 될 수도 있다는 거냐.”
“학생들이 제일 해석하기 어려워하는 그림이 될지도 몰라요. ‘세상에, 이 짧고 촘촘한 선들은 뭐지!’ 이 그림을 그릴 때 했던 고민들조차 중요한 역사적 정보가 될 거라고요.”
화가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천천히 캔버스에 스케치를 옮기기 시작했다. 잔디밭에 선 이젤이 선을 그을 때마다 흔들려 엎지 않으려면 아주 신중하고 느리게 작업해야 했다. 아이는 이젤이 잘 보이는 뒤에 앉아 바게트를 크게 베어 물었다.
“그건 언제 완성될 것 같아요?”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거다. 완성되고 보면 우스워 보이지만 복잡한 길을 거쳐 갈 거야.”
“그 말, 위인전에 나오는 한 줄 같아요.”
“책을 내야 했던 건가.”
“아뇨, 그림이 맞아요.”
아이는 나이에 맞지 않게 단호한 면이 있었다.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곧은 눈을 볼 때면 화가는 저도 모르게 붓질에 힘이 들어갔다. 단 한 사람의 신뢰만으로 이미 정해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안도감이 들 수 있는 걸까. 미래의 한 순간을 향해 걸어간다는 데서 나오는 안도감이 아니다. 끝이 어디든 걸어가는 길 위에서 영원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분명함.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가는 안도감일지라도 붓을 붙잡기에는 충분하다.
강변을 걷는 연인의 말소리가 론강을 비추는 별빛처럼 가까워지고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화가는 흰 캔버스의 윗부분에 반짝거리는 북두칠성을 그려넣었다. 밤하늘에 알아볼 수 있는 별자리는 없었지만, 그의 그림을 보게 될 누군가가 길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쩌면 그건 화가 자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슨 그림이 가장 끝내주는지 알아요?”
아이가 일어나며 말했다.
“그런 건 스케치를 끝내기 전에 알려 줘야지.”
아이는 옆에 다가와 거의 완성된 스케치를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화가를 돌아보며 우주에서 가장 큰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들어가 살고 싶은 그림.”
게일에게
아를의 가을도 어느새 끝자락이다. 네가 있는 파리는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구나. 오해하지 마라,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마음은 없다. 있을 리가 없지. 네가 궁금해하던 론강의 그림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그림이 어려운 건 눈은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일 거다. 사진기로 찍은 사진과 눈이 담은 순간은 매우 다르지.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듣기 불편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림이야말로 인간이 보아야 할 광경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무언가의 유무를 증명한다거나 그림을 그릴 시간이 없을 때 쓸 수 있겠지.
론강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 아주 오래전에 그렸던 스케치를 그대로 썼다. 다행히 이틀 전에 론강에 갔을 때는 변한 게 전혀 없더구나. 밤하늘에 떠 있던 별마저 그대로였다. 이미 구상해 놓은 스케치가 있으니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 자리에서 아를의 밤을 감상하며 손이 움직이는 대로 캔버스를 칠했다. 사방이 고요하면 캔버스에서 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니? 나는 그날 꿈에서까지 수많은 별빛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모든 것이 잘 될 거라는 확신이 든다.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부류의 확신은 성과를 수치로 매길 수 없는 직업에는 언제나 필요하지. 어떻게 될지 절대 알 수 없거든. 충만한 행복을 느끼다가도 네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역시 나는 이 길이 아니고서야 아무것도 모른다.
편지가 우울해 보인다고 오해하지 마라. 나는 지금 내내 행복하다.
가을의 아를, 작업실에서
화가는 세상이 순환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눈앞에서 사라진 것들이 다음날 되돌아오는 것을 보며 결국 모든 것은 떠났다가 되돌아오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화가는 자신의 운명조차, 실패조차 두렵지 않았다. 그 거대하고 둥근 고리 위에서 그가 걷고 있는 곳이 그림을 그려야 할 위치일 뿐이다. 빛을 잡아내기 위해서, 별을 사랑해서, 그저 그리고 싶어서. 그 어떤 이유든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저 신이 만든 고리를 걷고 있을 뿐이다. 몇만년을 가로질러온 그 고리 위에서 그는 찰나의 시간을 걷는다. 그 거대함 앞에서 죽음은 그저 고리의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함께하던 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반대편에서 걷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왜 신은 세상을 고리의 형태로 만들었나. 왜 보이지 않아야만 사라지고 죽는 것인가. 이런 생각들은 혼자 하면 스스로를 구렁텅이로 밀어넣을 뿐이다. 그럴 때 화가는 그날 본 론강의 별들에 대해 생각했다. 왜 신은 볼 수 있지만 갈 수 없는 곳을 만들었나. 그는 왜 죽음이 떠오르는 시간에 별을 떠올리나. 화가가 바라보는 별은 빛나고 있었지만 늘 그가 발바닥을 붙이고 서 있는 땅을 자각하게 했다. 일렁이는 별을 보면 그곳으로 가는 길이 있을 것만 같았지만 발이 땅에 붙은 이상 불가능하다는 건 태어나자마자 알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영혼이 되어서만 저 별로 갈 수 있는가. 별은 새로운 삶을 품고 있어 반짝이는가. 그래서 들어가 살고 싶어지는가. 발바닥에 땅이 붙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되돌아오는 생각에서 화가는 또 한 번 세상의 순환을 자각했다. 신이 분명 순환을 염두에 두고 세상을 창조했다.
사실 대부분은 이런 우울한 생각들이라면 대여섯번 정도 반복하고 대충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살아간다. 그들은 결론이 없다는 결론을 받아들인다. 화가도 생각을 정리한 지 오래였다. 단지 이런 질문들이 이어지는 밤에는 그림이 조금 더 잘 그려질 뿐이었다. 고요한 론강의 그림이.
그러나 신은 고요한 강에 재미삼아 돌을 던지고는 한다. 그는 움푹 패이는 수면을 시작으로 동그랗게 퍼져 나가는 파동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길게 이어지는지 알까? 그 일렁이는 찰나가 화가의 삶의 절반이었다는 것을 알까.
화가는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무용담으로 쓸 만한 사건을 겪어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검은집에서 5분 정도 거리인 사거리에서 웬 불운한 남자가 떨어지는 화분에 머리를 맞아 크게 다쳤다는 소문이 다였다. 결국 그것도 그가 직접 본 것은 아니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떠벌릴 일은 더더욱 아니었으니 결론적으로 그는 재미없는 인간이 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은 마음에 담아 둔 적도 없었고, 인망이 얇다 못해 사라져 있었기에 주변인의 걱정을 하는 데 더더욱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사고에 준비되어 있지 않지만, 화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것이 실수였다. 그는 무방비했고 사고는 또 다른 평범한 하루의 끝자락에 불쑥 문을 두드렸다. 신은 기어코 고요한 화가의 강에 돌을 던졌다.
그는 이젤 앞에 앉아 북두칠성을 덧칠하는 중이었다. 언뜻 보면 성의 없게 삐죽하게 그려진 덩어리였지만, 보면 볼수록 빠져들 것이다. 그 별은 악착같이 눈에 달라붙어 빛이 스며들게 할 거니까. 그림에서 돌아선 후에도 별빛은 아른거린다. 밤에 이불을 덮고 누우면 천장에는 그날 오후에 본 별이 떠오르고, 운이 좋으면 북두칠성까지 걸어가는 꿈을 꿀 것이다. 그는 가는 붓을 손가락으로 끼우고 두 걸음 물러서서 풍경을 갖추어가는 그림을 살폈다. 적어도 그의 마음에는 꽤나 드는 그림이었다. 론강의 아름다움을 모두 담지는 못했으나 애초에 그건 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밤에 아이가 오면 함께 별에 대해 이야기하며 돛단배를 그려넣을 생각이었다. 책상 위에는 아이가 남기고 간 낙서장과 뭉툭한 연필 몇 자루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물감 묻은 의자는 주인을 기다리듯 공손한 모습으로 책상 아래에 들어가 있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익숙하지만 아이의 노크소리는 아니었다. 조금 더 느릿하고 정중했다.
“누구요?”
“조셉이오.”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가는 곧바로 문을 열었다. 조셉은 들어오지 않았다. 복도에 못 박힌 듯 서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열린 창문 틈새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화가는 들어오겠냐는 뜻으로 살짝 비켜섰지만 조셉은 손을 들며 고개를 저었다. 안에는 미완성된 그림이 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아직 손을 대야 할 부분이 많았다. 화가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끝났으니 이제 조셉이 대답하기를 기다릴 차례였다. 그러나 조셉은 하려던 말을 까먹은 사람처럼 자리에 뻣뻣하게 서 있었다.
“월세라면 올려두고 갔는데, 혹시 사라진 거요?”
조셉은 다시 고개를 내젓다 숙였다. 그리고 주먹을 색이 변할 때까지 세게 말아쥐었다. 바람소리인지 헷갈리던 숨소리는 점차 거칠어졌다. 화가는 급히 다가가 그의 어깨를 세게 잡고 토닥였다. 언제나 차분하고 곧았던 남자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한참이 지나자 조셉은 밤의 론강만큼이나 고요한 얼굴로 화가를 마주보았다. 그러나 흘러나오는 목소리의 끝은 여전히 떨렸다.
“내 아이가 별이 되었소.”
화가는 헛웃음을 지었다. 별이 되다니, 조셉이 쓸 표현이 아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조셉은 다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핏발 선 눈이 고인 눈물로 빛나고 있었다. 화가는 목구멍까지 한숨이 솟아올랐지만 침을 삼키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물었잖소.”
별이 된다는 것은 닿지 못하는 곳이 되었다는 뜻. 그러나 이건 화가만의 정의였다. 아이조차도 모르는, 그만이 스스로 내린 결론이었다. 별에 이르는 것은 마침내 천천히 향하던 걸음의 끝맺음이다. 천천히.
“내가 듣기에는 지금 그 아이가, 그 아이가…….”
화가는 사실이 될 수 있는 말은 입 밖으로 뱉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까 제대로 말해 보시오.”
매사에 정확한 조셉이 할 수 없는 말은 얼마 안 될 것이다. 조셉의 대답이 없는 시점에서 이미 화가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만 아직 듣지 않은 것은 사실이 아니다. 결론은 누군가 알게 되므로 결론인 것이다. 화가는 방 안으로 숨고 싶어졌다. 그러나 조셉은 가라앉은 얼굴로 숨을 들이마시고 화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론을 전했다.
“차 사고였소.”
“차…….”
“당신도, 나도, 심지어 그 아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었소.”
조셉은 떨리는 목소리로 사고에 대해 설명했다. 아이는 모처럼 만나는 친구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사거리를 건넜을 뿐이다. 아를의 거리는 워낙 사람도 차도 자전거도 많았기 때문에 언젠가 화가도 지나가듯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말한 적은 있었다. 그 말을 하면서도 주변의 누군가가 사고를 당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는 비유적인 표현을 들어서는 못 알아듣습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화가 자신도 단어를 쓸 수 없었다. 이미 세워진 결론이 있음에도 그 단어에 혀가 말려들어 발음할 수 없었다.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합니까?”
조셉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는 언제였소?”
조셉은 사과하듯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틀 전에.”
결국 신은 이 고요한 세계에 돌을 던지고 만 것이다. 더 이상 남은 게 없었다. 이틀 전에는 아이와 본 론강의 흔들리는 물결을 칠하고 있었다. 자신의 강에 날아오는 돌은 보지도 못한 채. 영원히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다.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던 귀, 바게트를 잡았던 손, 농담에 받아치던 입. 모든 게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왜 말하지 않았소.”
숨이 걸려 절반쯤 뒤로 넘어간 목소리로 말했지만 조셉은 이해한 것 같았다.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소. 이틀 동안이나 아이가 만들어내던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이해가 되더군. 그러나 이제 세상에 없다는 사실만 이해했소. 나머지는 감도 안 잡히는데…….”
조셉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그러쥐고 한참을 울다 인사도 없이 내려갔다. 화가는 아침까지 울지 않았다. 사라진 것을 확인받을 방법은 없으니 사실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뿐이었다. 다음 날에도, 일주일 뒤에도, 한 달 뒤에도 빈 자리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의 옆은 비어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물감 묻은 의자는 주인을 기다리는 것 같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분명히 돌아올 것 같았다. 모든 것은 순환하니까. 거대한 고리를 거치면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까.
가끔 그의 마음을 내려앉게 만드는 것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아이의 낙서였다. 아이는 무언가를 그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린 걸 설명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화가가 발견한 것을 볼 수 있는 눈이었으니 유일한 동료를 잃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기감은 들지 않았다.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눈앞에 둥둥 띄워 놓고 그게 움직일 때까지 들여다 보는 기분이었다. 어항 속에 있는 물고기를 관찰하듯 사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현실 도피도, 외면도 아니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뿐이었다.
조셉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륀은 한 달째 문이 닫혀 있었고, 마을에서는 아이의 사고애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화가는 사람들이 조셉을 찾아와 몇 번 토닥여주고 위로금과 직접 만든 음식을 건네는 것을 가끔 보았다. 아이의 친구들 몇 명도 찾아와서 직접 만든 듯한 투박한 꽃다발을 올려두고 돌아갔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도 화가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이가 사라지고 세 달이 지나서야 화가는 영원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인정했다. 그는 아이의 죽음은 인정했으나, 아이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이해하지 못했다. 주어진 삶 동안 보지 못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별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의 마음은 죽음보다는 순환을 먼저 이해했고, 어떤 형태로든 모든 것을 다시 만나리라 믿었다. 그건 화가 자신도 어떻게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그림을 그려야만 했던 것처럼, 숨을 쉬어야 하는 것처럼 그의 사고방식도 그저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었다.
다행인 점은 게일이 아이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분명 할 수 있는 최대한 다정하고 부드러운 위로를 건네려 했겠지만 그건 정말이지 필요하지 않았다. 필요 없는 이야기를 화가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건 아이를 만나기 전부터 쭉 그래왔다. 게일은 여전히 화가의 그림을 믿는다는 편지와 함께 생활비를 보내왔다. 편지에 아무 언질도 없이 생활비가 줄어든 달에는 화가는 더욱 열심히 붓질을 했다. 그는 하루빨리 게일에게 도움이 될 만한 그림을 그려야 했다.
아이가 말했던 중요한 것들은 기억 속에서 점차 희미해졌다. 절대 잊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사라지고 가장 사소한 것만이 가끔 불쑥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슬프지 않았다.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런 법이니까. 이따금씩 귀에서 윙윙거리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사람들을 그렸다. 일하다 잠시 그늘에 쭈그려 앉아 쉬는 농부를, 그에게는 흔치 않은 친절함을 보이는 우체부도 그렸다. 그림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 그는 물감 묻은 손을 얼룩덜룩한 수건에 닦으며 멀찍이 떨어져서 전체적인 모습을 살폈다. 닮을 구석이 없는 모델의 그림 속 눈도 결국은 아이의 눈빛을 담았다. 화가는 게일이 편지로 인물들의 눈빛이 예전보다 생동감 넘친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그는 가장 사소한 것을 손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여전히 게일에 대한 미안함이 깔린 채 화가의 하루는 흘러갔다. 그는 가끔 그림을 그리다 말고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며 신에게 대체 언제쯤이냐고 질문했다. 질문이 구체적이지 않아서 그런지 답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신은 그가 상상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황금빛 밀밭을 그린 그림이 팔렸다는 소식을 들은 화가는 뛸 듯이 기뻤다. 그의 그림이 돈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날은 그의 그림이 어쩌면 몇백년 뒤에는 유물이 되어 누군가에게 북두칠성이 되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꼭 많은 사람들이 보는 큰 미술관에 걸리지 않아도 된다. 아들에게, 그리고 딸에게 전해지는 그런 그림이 되길. 한 해에 열 명 정도는 꾸준히 보는 그림이 되길.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면 신이 만든 고리를 한 바퀴 돌지 않을까. 모든 것은 순환하니까, 그 아이가 다시 세상에 돌아올 때에도 남아 있지 않을까.
겨울이 지나고 봄도 지났다. 슬슬 더워지는 시점에 화가는 다시 론강을 찾았다. 그 강은 언제 가든 그대로였다. 다른 점이라고는 팔에 닿는 온도, 강변을 거니는 사람들. 론강에서 본 별이 빛나는 밤의 그림은 완성한 지 오래였다. 화가는 그 그림만은 누구나 보았으면 하면서도 누구에게도 내어 주고 싶지 않았다. 끝까지 식탁 위에 세워져 있었던 그림은 게일에게 보낼 만한 그림이 더 이상 남지 않았을 때가 되어서야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나 우체국으로 향하기 전에 지금 자신이 처음 탄생한 강으로 오게 된 것이다.
화가는 완전히 어둑해진 하늘과 달과 별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보았다. 전혀 같지 않았다. 천문학이 발달한 미래에는 이 그림을 보며 비웃을까. 스스로를 변호하자면 이 그림은 있는 그대로의 론 강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 별의 위치가 맞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려면 취해서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연인들의 이목구비가 뭉개져 있다는 것도 함께 잡아내야 한다. 잔디를 실처럼 얇은 붓으로 한올한올 그리지 않고 두꺼운 선을 그었다는 뼈 아픈 비판도 해야 한다. 그 모든 걸 고려한다면 오히려 무엇 하나 맞지 않는 표현이 이 그림에 가장 맞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부디 이 그림이 과거 인류의 무지함을 설명하는 자료로 쓰이지만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달이 유독 선명하고 밝았다. 화가는 달을 향해 캔버스를 머리 위로 높게 들어 보였다. 달의 시선이 화가가 창조한 또 다른 자신을 따뜻하게 훑고 지나갔다. 지금이라면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믿어 줄 수 있었다. 신의 존재, 순환, 그리고 그림이 옳았다는 것까지.
프랑스의 아름다운 도시 아를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그 모양이 바뀐다. 지도에 그려진 그 도시의 모양을 보고 누군가는 날개를 편 천사의 모양을, 누군가는 모자를 쓴 사람을 떠올린다. 화가는 한 아이를 떠올렸다. 전혀 닮지 않았음에도 그의 마음속에서 한 세계로 자리잡은 아이를 생각했다.
아를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한 번은 들른다는 륀이라는 가게는 낮에는 카페를, 밤에는 술집을 운영했다. 그래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손님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륀이 있는 흰 건물의 2층에는 노란 집이 있었다. 벽이 온통 샛노랑으로 칠해진 2층은 멀리서 보면 동동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멀리서도 쉽게 륀을 알아보고 찾아온 몇몇 손님이 특이한 외관에 대해 물어보면 주인인 조셉은 집의 주인과 함께 칠했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몇 년 전 차에 치여 일찍 세상을 떠난 그의 아이가 노란색을 좋아해서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노란 집에는 붉은 수염의 화가가 살고 있었다. 그는 5년 정도 전까지만 해도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 불청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그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그가 언젠가부터 조셉과 함께 륀에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시점이 아이의 사고와 겹친다는 점을 예리한 사람들은 알아챘다. 두 사람은 가게 바깥의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아 날씨와 가게의 일, 그리고 화가의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륀의 주인보다는 화가에게 쏠렸다. 이따금씩 그는 소리내어 웃었고, 무언가 찾는 게 있는 사람처럼 하늘을 살폈다.
그 기묘한 화가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이나 상점가보다 도 론강에서 자주 모습을 보였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이 그의 뒤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구경하는 일도 허다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을 돌아보지 않고 묵묵하게 그림만 그렸다. 시와 동화를 좋 아하는 한 아이는 론강을 걷다 우연히 화가의 뒷모습과 절반쯤 채 워진 캔버스를 마주쳤다. 아이는 해가 질 때까지 그의 뒤에 앉아 캔버스가 파랗게 채워질 때까지 수첩에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밤 늦게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머니가 서 있었다. 평소보다 늦게 들어온 이유를 물어보는 어머니에게 아이는 강에서의 시간이 평온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