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푸른 대문 너머에는 독립투사가 살고 있다
바로 이 순간 복순은 유성에 대해 생각한다. 볼에는 뜨거운 것이 흐르고 팔에는 끈적한 것이 묻어나지만 정작 떠오르는 것은 그 어느 밤의 유성이다.
유독의 날이었다. 유독 하늘이 새카만 데다가 어머니가 유독 늦어서 복순이 유독 불안한 날이었다. 아직도 길거리에는 순사가 다니는데 혹여 어머니가 무거운 짐을 이고 오다가 신경을 거슬리게 한 것은 아닌가. 늘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다니는 어머니가 순사 앞에서도 어깨를 편 것은 아닌가. 그러다 그 올곧은 눈이 조선인을 살덩이로만 보는 그 눈과 마주친 것은 아닌가. 조선인이라면 죽지 않을 이유보다 죽어 마땅한 이유가 더 많아진 세상 아닌가. 복순은 열 걸음도 안 되는 작은 마당을 서성이다 결국 대문을 열고 나왔다. 바람이 스치우는 소리에도 혹시 선휘나 강단이 나온 걸까 펄떡 일어섰다가 틈도 없이 닫힌 푸른 대문을 보고 다 시 풀썩 앉았다. 이제 윤태는 나오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그때 대문이 열리는 쇳소리가 들렸다. 복순은 반가운 숨을 터트리며 고개를 들었지만 유성과 눈을 마주치고 다시 땅바닥을 보았다. 유성의 반질한 구두가 복순을 점잖게 지나쳤다. 복순은 왜인지 억울한 마음에 잽싸게 고개를 들어 멀어지는 유성의 뒷모습을 도끼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유성과 눈이 마주쳐 그대로 다시 땅바닥을 보았다.
“밤에 혼자 그러고 있으면 도깨비 장군이 잡아간다.”
아무리 어린아이에게 겁을 주는 말이라 해도 지나치게 성의가 없었다. 복순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놈의 도깨비 장군은 명색이 장군인 게 잡아가야 할 놈은 안 잡아가고 왜 집 밖으로 몇 발짝 나와 있다고 복순을 잡아가나. 복순은 홧김에 툭 질문을 던졌다.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요?”
바로 대답을 척 내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유성은 조용했다. 그는 집을 나선 이유도 잊은 듯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복순은 유성이 좀 더 괴로워하고 슬퍼하기를 바랐다. 왜였을까. 윤태는 복순보다 유성을 좋아했으니까. 윤태는 온데간데 없으니까. 영원히 사라졌으니까. 그렇게 괴롭고 모진 길이라면 다 같이 걷지 않는 게 나으니까. 과학을 가르치는 유성은 사람이 죽으면 썩어서 없어진다는 사실을 알 테니까. 죽으면 조국의 해방이고 독립이고 못 보니까.
그래, 그런데 왜일까. 그날 밤처럼 서늘한 땅 위를 쓸며 복순은 생각한다. 어느새 질문은 조금 바뀌어 있다. 왜일까. 이 지경까지 와서도 복순은 이유를 알 수 없다. 가슴이 끓어오르고 몸이 움직이는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그날 유성의 대답.
“저 별들 보이니.”
보인다. 오른쪽 귀퉁이에는 달까지 보인다.
“저기를 빙빙 돌다가 여기로 돌아온다.”
저 크고 작은 세상들 사이 다들 어디쯤 왔는가.
“다시 만나는 거야.”
오른쪽 귓가에 먹먹한 총소리가 울려퍼진다. 저 총성은 동지의 것인가. 복순은 이를 부득 갈며 성한 다리에 힘을 주어 다시 일어선다.
사진은 못 찍겠네요.
사진 찍을 돈으로 총포 하나 탄알 하나 더 구한다, 이놈아.
그렇게나 값이 나가요?
이번에는 화약이 제대로 터져야 할 텐데.
안 터져도 겁만 주면 그만이다. 그놈들이 겁먹은 모습만 보여 준다면 그것만으로 거사는 성공이야.
염려 마세요, 선생님. 제가 반드시 이어서 사살하겠습니다.
그게 걱정인 거야.
분명 터질 겁니다.
왜 당신이 확신하는 겁니까.
원래 확신은 옆 사람이 해 주는 겁니다, 선생님.
아새끼처럼 싸우지 말라.
아새끼라니요? 그날 지붕 날래 돌아다니시다 저에게 들킨 건 기억도 안 나시나 봅니다, 장군님.
덕분에 동지 하나 늘었지.
그래도 사진 한 장은 남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혹시 고향집에 부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 그리고.......
그리고?
자, 봐라! 우리가 있었다! 이런 느낌으로 찍으면 좋잖아요. 나중에 해방이 되면 책에 실릴 수도 있는 거고.......
요놈 봐라. 그렇게 찍고 싶으면 이 누나가 사진이랑 똑같이 그려 주마.
아뇨, 무르겠습니다.
뭐? 이윤태 네 이노옴.
아, 잠시만요. 오지 마세요. 잠시만— 콜록콜록!
둘 다 그만해라.
복순은 땅에 앉아 마지막으로 생각한다. 주마등은 죽음이 선사하는 마지막 선물 아닐까. 어렸을 때 어머니는 복순을 무릎에 앉혀 놓고 사람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가장 소중했던 기억들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죽음의 문턱에 발을 얹을 때가 되어서야 사람은 그리웠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숨을 쉬고 싶다면 소중한 기억들을 최대한 많이 쌓아 놓으라고 당부하셨다. 지금 땅바닥에 앉아서 그 말을 곱씹자니 저절로 피식거리며 웃음이 나왔다. 주마등이 그런 게 아닐 텐데.
어쨌든 복순은 땅에 앉아 기꺼이 죽음의 마지막 선물을 받는다. 온통 푸른색인 기억이 뒤엉켜 지나간다. 푸른색 대문, 벗겨진 페인트, 뒷모습, 어머니....... 난데없이 나타난 도깨비 장군의 얼굴에 잠시 복순의 얼굴이 구겨진다. 그리고 다시 장면들이 지나간다. 지금의 복순과 또래인 선휘, 찰박거리는 진흙, 흙탕물, 팔랑거리며 떨 어지는 꽃, 구겨진 포장지....... 다시 폭발음, 방아쇠를 그러쥔 손, 탄환이 심장을 뚫고 지나가는 광경, 뒤집어지는 하늘. 기억의 끝자락에 다다르고 나서야 아쉽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말로 더 쌓아 놓을걸. 저승의 문턱에 목숨과 다리를 올려놓고 한다는 생각이 이리 평범하다니.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는다. 힘이 다 빠진 얼굴 근육도 일그러질 정도로 억세게 잡아 흔든다. 자꾸 내려앉았던 눈이 뜨인다. 밝아오는 해를 등지고 누군가 서 있다.
천천히 쫓아오면 된다.
천천히, 세상이 밝아진다.
대한독립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