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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소하 Aug 15. 2024

쓰다 만 소설은 불태울 것

쓰는 순간 존재하니까요


— 발단


작가의 말
이 책을 펼친 모든 독자에게 감사합니다. 이제서야 고백합니다. 나의 삶에는 깊은 구덩이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 나는 누구도 만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혔습니다. 끝없는 밤을 견디기 위해 나는 문자로 이루어진 완벽한 세상을 지었습니다. 그 세상에 집을 짓고 친구도 하나 만들었죠. 인간은 어떤 존재와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거든요. 그 존재가 상상 속 인물일지라도요. 


우리는 최고의 단짝이었어요. 서로를 아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피그말리온이었고 그 친구는 조각상이 되었습니다. 그 친구가 살아난 것입니다. 다른 점은 신의 힘을 빌려서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살아났다는 것이죠. 지금부터 당신은 내 마음속의 집 속에 들어가 그 친구를 만나게 될 겁니다. 아주 유쾌한 이야기가 될 겁니다. 늘 희망을 품고 사는 친구니까요. 


마지막으로 에밀리! 너는 절대 펜을 놓아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 작가라면 자신의 글을 지킬 책임이 있으니까. 



— 전개 


제리는 기다리는 것에 익숙했다. 그는 창문 밖의 어두운 숲을 오랜 시간 바라보았다. 투명한 사각형 프레임 안에 갇힌 숲의 풍경은 하나의 영화처럼 보였다. 10년째 같은 장면이라는 점이 아쉬웠지만. 천천히 흔들리는 나무는 초록빛이겠으나 늘 밤인 이 세상에서는 결국 잿빛이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나무에 달린 잎이 초록색이라고 쉽게 확신하는 걸까? 누군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건 아닐까? 이런 음모론에 물든 생각마저 익숙했다. 그러나 제리는 자기연민에 빠질 생각은 없었다. 그런 구덩이 같은 감정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최대한 입꼬리의 양끝이 대칭이 되도록 집중해서 미소를 지었다. 


이 집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손님을 기다린 시간보다 확실히 몇 배는 더 긴 시간이 흘렀다고 느낄 무렵이면 항상 새로운 손님이 나타나서 문을 두드리고는 했다. 대부분이 숲을 떠돌다가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해 당황한 인물들이었다. 똑똑똑. 첫 노크 소리는 대부분 다급했다. 이대로 죽는구나 싶을 때 찾은 외딴집이 아주 반가웠을 것이다. 제리는 늘 소리를 듣고도 잠자코 기다렸다. 그가 흥미가 있는 건 바로 다음이었다. 다시 노크할까? 아니면 이렇게 말할까? 안에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비가 그치지 않아요! 길을 잃었어요. 잠시면 됩니다! 


기억에 남는 인물은 얼마 없었다. 


어라, 잠시만. 그렇지. 뫼르소. 


제리는 바닥에 닿은 오른쪽 어깨가 으슬으슬해져 반대로 돌아누웠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제리는 그것보다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죽도록 듣고 싶었다. 그는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어 동그랗게 구겨진 종이를 꺼냈다. 너무 낡아서 조금만 문질러도 가루가 떨어지는 종이에는 검은 잉크로 꾹꾹 눌러쓴 문장 세 줄이 적혀 있었다. 겨우 세 줄이라니. 제리는 뫼르소가 그리웠다. 


신에 대해 흔히들 오해하는 것이 있다. 신은 자신이 만든 것들에 대해 큰 관심이 없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들은 대부분 신의 관심 밖이다. 


그 우울한 시인은 베개 밑에 이렇게 적힌 쪽지만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제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온통 새카만 시야에 흰 선을 그어가며 뫼르소의 실종이 몇 년 되었는지 세었다. 선이 15 개, 15년 전이었다. 아주 딱하고 괘씸한 인물이었다. 죽고 나면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할 것이 두렵다고 했던가. 그렇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게 자신의 운명인 걸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 말했다. 집 앞에 현대 미술관이 있어요. 정문의 독창적인 장식이 가장 유명한 곳이죠. 하지만 그곳에 전시된 그림들 중에서도 기억되지 못한 게 있을 텐데, 나는 어떨까! 


그건 아주 딱한 일이었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이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제리의 앞에서 징징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제리는 먼지조차 없는 이 텅텅 빈 집에서 끝을 볼 운명이었다. 그러나 무지함이 죄는 아니지. 뫼르소는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시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큰 매력 아닌가. 그는 누군가가 잡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내려앉아 있었던 뫼르소의 두 어깨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얼굴보다 어깨가 더 기억에 남는 인물이 되기도 쉽지는 않을 텐데. 그는 뫼르소가 더욱 그리워졌다. 


첫 손님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많고 많은 손님 중에 뫼르소를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다. 뫼르소는 제리의 집에 들어와 보지도 않고 떠나려고 했다! 그날 제리는 밖에서 아주 희미한 발소리를 듣고 문으로 달려갔다. 그는 문에 납작하게 붙어 귀를 기울였다. 젖은 흙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문 바로 앞에서 발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누군가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아니, 그건 쓰다듬는 것에 가까웠어.” 제리가 문에 달라붙어 있지 않았더라면 절대 듣지 못했을 소리였다. 그대로 문을 열어 초대할 수 있었지만 제리는 밖에 서 있는 인물이 용기를 낼지 궁금했다. 그가 문을 두드린 소리보다 정적이 시끄러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잠자코 기다렸다. 똑똑. 심장 박동보다 조금 큰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문을 열어젖혔지.” 단번에 뫼르소가 주인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이 ‘뫼르소’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눈앞에 선 허름하고 왜소한 젊은이 주변의 공기가 미리 움직였다. 그가 ‘나의 이름은 뫼르소예요’라고 말할 것을 부유하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가 알아챘다. 그리고 그 원소는 성격이 아주 급해서 ‘뫼르소’라는 모양새의 공기를 빚어내 주위에 내뿜었다. 그러니 제리는 귀가 아니라 온몸으로 ‘뫼르소’라는 이름을 처음 느낀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분명히 그런 순간이 있다. 듣기 전에 느껴지는 말들. 두 글자로는 직감. 한 글자로 말하면 촉. 


나의 이름은 뫼르소예요. 그가 말했다. 제리는 그를 무례하게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그 청년이 걸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를 불쌍해 보이게 만들었다. 누가 손으로 꽉 쥔 것처럼 구겨진 와이셔츠, 비에 폭삭 젖은 갈색 바지, 몇 센치는 커 보이는 헐렁한 구두. 그러나 불쌍해 보이는 것이지 불쌍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오른쪽 팔에 작고 두꺼운 노트를 끼고 있었다. 제리는 예술가는 불쌍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세상을 품은 자가 어떻게 불쌍할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불쌍해 보일 뿐이었다. 


창문이 순간 하얗게 번쩍 빛났다. 제리는 종이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마 그의 주머니를 뒤집어 턴다면 흰 가루가 눈처럼 떨어질 것이다. 저기 협탁 위 스노우볼에 들어 있는 눈처럼. 그는 뫼르소가 그리웠다. 그가 떠난 이후로도 꽤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지만 그를 화나게 하지 않은 것은 뫼르소뿐이었다. 예를 들어 뫼르소는 이곳에 번개만 내리치고 천둥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제리가 등을 대고 누운 소파에 동상처럼 앉아 끝도 없이 내리는 비를 힘없이 노려보다 다시 펜을 잡았다. 제리는 뫼르소가 쓴 글을 읽을 수 있는 존재가 자신뿐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는 뫼르소가 뻗친 필체로 써 놓은 시들을 모조리 외우고 태워 버렸다. 뫼르소는 그를 막지 않았다. 세상에 유일한 원고들이 붉고 푸르게 타오르는 것을 보며 잠시 웃을 뿐이었다. 제리는 그의 미소를 글 쓰듯이 외웠다. 


“뫼르소의 미소는 늘 균형이 맞지 않았다. 하루는 오른쪽 끝이 더 높이 올라갔고, 하루는 왼쪽 끝이 지나치게 내려갔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웃는 것이 좋았다. 시들을 태우는 날이면 그는 놀라운 글들을 써냈다. 그러면 나는 그 글들을 외우고 또 태웠다.” 


제리는 기억이 멀어지는 것처럼 아득해 다시 반대로 돌아누웠다. 얼굴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글과 어깨만 기억하는 것이 슬펐다. 뫼르소와 신에 대해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그날이 아마 뫼르소가 이 집에 묵은 마지막 날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는 아무리 생각을 쥐어짜도 홀로 서늘했던 기억만이 떠올랐으니까. 


“여기에서 나가고 싶지 않아요?” 제리는 물어봤다. 뫼르소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파 옆 협탁 위에 놓인 스노우볼을 가리켰다. 제리가 이 집에 나타났을 때부터 놓여 있었던 스노우볼이었다. 


저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아요. 나가는 건 내 의지가 아니죠. 뫼르소가 대답했다. 제리는 스노우볼을 들어올려 뒤집었다. 둥그런 세상 속에 하얗고 동그란 가루가 흩날렸다. 하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홧김에 문을 열어 볼지도 몰라요. 뫼르소는 덧붙였다. 농담에는 진심이 숨어 있다고 했던가. 그는 그날 정말로 문을 열고 떠났다. 둥근 유리세상 속 작은 집의 지붕과 창틀에 흰 가루가 끼었다. 조그마한 창문은 하늘색 페인트로 채색되어 있어서 유리 벽의 바깥에서는 집의 내부를 볼 수 없었다. 만드는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 신경 쓰니 집 안은 틀림없이 텅 비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누가 살아갈지는 열기 전까지 모르는 일 아닌가. 하지만 제리는 예쁜 스노우볼을 깰 마음이 없었다. 정말로 안에 누군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매우 다행인 일이었다. 


“이 안에 있는 사람들도 신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겠죠? 원망도 하고 기도도 하면서.” 


뫼르소는 고개를 저었다.


신에 대해 모두 오해하고 있어요.


“무엇을?”


이 스노우볼을 만든 사람은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죽었을 테
죠. 적어도 죽을 때 이 스노우볼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을 거예요. 뫼르소는 종이 끝을 작게 접고, 또 접었다.


 신은 자신이 만든 것들에 대해 큰 관심이 없어요. 



— 위기 


빅터는 어디에서 만난 것만 같은 인물이었다. 제리가 집에 나타난 이후로 본 두 번째 인물인 데다가 바로 전에 머무르다 떠났던 뫼르소와는 지극히 다른 부류였지만 그의 행동들은 기분 나쁠 정도로 익숙했다. 제리는 빅터가 집을 떠나고 난 뒤에야 빅터가 제리 자신을 만든 자와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두 번째로 만난 인물이 익숙할 리 없으니까. 그렇게 해석한다면 제리가 빅터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이질감, 거부감, 거리감이 설명이 되었다. 그가 집에 도착한 날 제리는 나무와 빗줄기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주 오래도록 정적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갑작스러운 사건이 일어날 것 같았다. 숨을 다섯 번 들이마시고 내쉬는 시간 안에 어떤 일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았다. 제리는 숨을 한 번, 세 번, 그리고 다섯 번 내쉬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 또한 당연한 수순 이었다. 기대가 창문에 흘러내리는 빗줄기처럼 사라지는 것.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그는 이 일을 아주 오래도록 해 왔다. 


그는 고집스럽게 창밖을 보았다. 꽉 막힌 벽처럼 시커먼 풍경 을 보고 있자니 신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뫼르소가 찾아오기 전에도 그는 자신을 만든 존재와 신에 대해 가끔씩 생각했다. 그 둘은 완벽히 분리되어 있었다. 둘 다 이 집에 찾아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뫼르소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제리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시선은 제리가 위협이 되어야만 닿을 것이다. 마치 바벨탑처럼. 제리는 자신이 쌓고 쌓아올린 바벨탑이 자신과 이 집을 만든 자의 발가락에 닿는 상상을 했다. 무엇이 밟히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 그가 고개를 숙이면 제리는 그의 동그란 복숭아뼈를 움켜잡고 종아리까지 기어갈 것이다. 그 다음은 등의 날개뼈 를 잡고 목으로, 어깨로. 


빅터는 제리가 그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려는 순간 문을 두드렸다. 복도가 울릴 정도로 다급하고 시끄러운 노크소리였다. 조금만 더 늦게 문을 두드렸더라면 그자의 의아해하는 표정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제리는 한순간에 바벨탑에서 쫓겨났다. 문 앞에 있을 사람이 비를 쫄딱 맞도록 두고 싶었다. 갈수록 거세지는 노크 소리도 듣기 싫었다. 문짝이 날아갈 때까지 두드리라지. 제리는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로 숨을 참고 불청객이 내는 소리를 들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제리는 구길 수 있는 만큼 얼굴을 구겼다가 한 번에 얼굴 근육의 힘을 풀었다. 뫼르소를 대할 때와 왜 이토록 기분이 다른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문을 열었다. 싫든 좋든 누군가 바깥에 널브러져 썩어가고 있었다가는 아무도 이 집에 오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빅터와의 기억은 뫼르소와의 기억만큼 선명하지는 않았다. 제리는 그와 있는 동안 늘 심기가 불편했다. 간만에 찾아온 인물의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빅터는 들어와 복도에 엎어진 순간부터 자신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바빴다. 그는 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바닥에 가슴을 붙이고 창틀 밑으로 기어가 도둑처럼 창밖의 어두운 숲을 살폈다. 실핏줄이 터져 붉어진 흰자 속 초록 눈동자는 쉴 새 없이 텅 빈 숲속을 왕복하며 달렸다.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 인물은 손님이 아니라 불청객일 뿐이었다. 그러나 제리는 참을성 있게 매일 아침 따뜻한 차를 불청객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빅터는 찻잔이 바닥과 닿는 조그마한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뒤돌아보았다가 무언가 놓칠 새라 다시 창문에 코를 박았다. 제리는 식은 찻잔을 다섯 번째로 치우며 빅터를 내보낼 방법을 그의 옆에 쭈그려 앉아 고민했다. 제리가 일곱 번째 차를 가져다 줄 무렵에야 빅터는 처음으로 숨 넘어가는 소리나 신음 같은 게 아닌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해냈다. 


내가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제리는 찻잔 속 액체의 표면이 잘게 흔들릴 정도로 떨리던 빅터의 손을 기억했다. 지금 이 차가운 바닥에 누워 그 장면을 떠올리자니 영 불쾌했다. 소설을 쓸 때 ‘내가 사람을’로 대사를 시작하면 그 뒤는 ‘죽였습니다’나 ‘쳤습니다’가 나오는 게 자연스러운 순서 아닌가. 현실은 어떨지 모르더라도. 정말 전형적인 작품의 경우라면 그 대사의 청자는 정의감 넘치는 형사일 것이다. 작가가 뻔한 줄거리를 기피한다면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지만 운 나쁘게 휘말린 평범한 일반인이 될 수도 있겠다. 그게 사건의 발단인 것이다. 


아니, 그건 사람이 아니었어요. 끔찍해요. 혐오스럽습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빅터는 죽이지 않고 만들었고, 그 말의 청자는 이 집에서 영원히 나갈 수 없는 제리였다. 한 공간에 갇힌 이야기가 진전될 리가 없었다. 지금 이 차가운 바닥에 누워 다시 생각하자니 그건 아주 통쾌한 순간이었다. 그자는 또 실패한 것이다. 15년의 실패가 자신이 만들고 버린 이 집에 남겨진 단 하나의 인물 때문인 줄도 모르고 부족한 능력만 탓하다 죽을 것이다.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죠.” 제리는 말했다. “쓰는 순간부터 있는 거예요. 존재하는 거라고요. 당신이 만들었잖아요.” 바닥과 창틀 사이에 구겨져 앉은 빅터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만든 것이 괴물이라면 그럴 수 없다고 했나. 그가 아주 작고 빠르게 말했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 


다음날 제리가 여덟 번째 찻잔을 들고 내려왔을 때 빅터는 사라지고 축축한 물웅덩이만이 남아 있었다. 결국 그와 일주일 동안 한 대화는 고작 아홉 줄로 끝을 맺은 셈이었다. 제리는 투명한 물 위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빅터가 집을 나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창문을 열고 그렇게 두려워하던 숲으로 나아갔을까. 아니면 혹시 이 물웅덩이가 빅터일까. 차라리 녹아내리는 것을 택한 걸 까. 물이 되면 잡힐 수 없으니까. 그의 이야기가 이제 영원히 이어질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제리는 등을 최대한 평평하게 펴서 차가운 바닥에 찰싹 붙였다. 서늘한 감각이 등의 정중앙부터 동그랗게 퍼져갔다. 이제는 온몸이 서늘했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 나지막하게 뱉어 보았다. 텅 빈 집에 문자가 퍼졌다. 아, 꼴 좋다. 통쾌하다. 통쾌하구나. 통쾌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자마자 문장으로 빚어져 나온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볼품없는지 깨달았다. ‘통쾌하다’는 지금 그가 짓고 있는 표정에 어울리는 형용사가 아니었다. 질투? 아니, 순수한 질투였더라면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건 나 없이 쓰인 그자의 세상에 대한 조롱이다. 개미집에 돋보기를 갖다 대고 안의 생명들이 불에 타 사라지는 것을 보며 느끼는 감정이다. 더럽고 추악한 감정. 제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시 입술을 달싹여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아, 슬프다. 슬프구나. 슬픕니다. 



— 절정 


뫼르소와 빅터 이후로는 손님이 수십명도 더 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길을 잃어 두려운 얼굴로 현관 앞에 비틀거리며 서서 문을 두드렸다. 제리는 비슷한 자초지종들을 귀 기울여 들으며 가엾은 인물들에게 따뜻한 차를 내 주었다. 언제나 둘 중 하나였다. 감사의 인사를 하거나 지치고 두려워서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그러나 인사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 집에 들어온 이상 인물들이 하는 행동과 대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이야기만이 제리에게 중요했다. 


그들을 보며 제리는 텅 빈 원고지 앞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고 있을 그자를 그려 보았다. 이쯤 되면 모두 ‘그자’가 누구인지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제리는 그자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인간이 신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제리 또한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자는 제리에게 이름과 집과 어둠 외 다른 것은 남겨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자는 신이 되었다. 처음 그자와 눈을 마주친 바로 그 순간이 세상의 탄생, 탄생한 순간부터 제리는 그자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먼저 서로를 보고 있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그자는 새것이지만 낡아 보이는 소파에 걸터앉아 제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모든 이야기가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놓고 빨려들 정도로 새로웠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싸운 영웅들의 이야기, 신을 사랑한 인간의 이야기, 숲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기묘한 일들. 그자는 소파에 앉아서 이야기를 늘어놓고, 제리는 책상 위에 앉아서 이야기를 들었다. 


“네 눈이 빛나. 내 이야기를 들을 때 네 눈이 빛나고 있어.” 


그자의 말을 듣고 제리는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이 궁금해져 창가에 갔다. 그가 보고자 하는 것은 그 자신의 눈이었다. 


그자는 늘 숲에서 나타나 숲으로 사라졌다. 그가 없을 때 하늘은 어두워졌고 그가 돌아와 문을 두드릴 때면 하늘은 하얗게 밝아 왔다. 그자는 제리에게 차를 끓여주었다. 그 차는 어두운 갈색이 었고, 혀끝에 닿자마자 혀에 짧고 뾰족한 잔디가 자라나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자는 그게 쓴맛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자가 하루에 다섯 개의 긴 이야기를 들려주는 날에도 삼백 개의 짧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날에도 제리는 들은 이야기들을 그대로 글로 써서 서랍에 넣어 두었다. 어느 날 그자는 서랍이 꽉 찬 것을 보고 제리가 자는 사이에 아주 큰 책꽂이를 만들어 놓았다. 


설명이 더 필요할까? 그자는 신이었다. 제리는 그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서랍과 책꽂이를 채운 종이들을 뒤적거리며 ‘신’이라는 단어의 대체재를 찾아 헤맸다. 찾을 수 없었다. 찾게 된다면 그자의 이름이리라. 


비극은 그자가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니 둘이 눈을 마주쳤던 처음 그 순간부터. 신들의 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신 또한 멍청할 수 있다며 웃었지만 정작 자신이 그 멍청한 신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 것이다. 제리를 만들어 놓고도 자신이 그 무지하고 멍청한 신이라고는 생각지 도 못한 것이다. 제리는 이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뫼르소가 떠나지 못하도록 집어삼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제리는 평생 신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이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른 채 신이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지만을 궁금해했을 것이다. 


그자는 어느 날부터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그만두었다. 한창 금지된 사랑을 하는 두 연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리는 아쉽고 의아했다. 


“고마워, 이제 쓸 수 있어. 네 덕분이야.”


그자는 그렇게 말하고 사흘이나 이어갔던 이야기를 한복판에
서 끊었다. 대신 ‘이야기를 쓰는 것’에 대해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기본적인 단계들, 미스테리와 로맨스 같은 장르들, 그리고 결말은 열리거나 닫힐 수 있다는 사실까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는 이상하게도 전처럼 빠짐없이 그대로 적을 수 없었다. 그건 그자처럼 직접 펜을 들어야만 이해하고 쓸 수 있는 영역이었다. 그때부터는 제리가 소파에 앉고 그는 책상에 앉았다. 제리는 바삐 움직이는 그의 손을 보았다. 가끔 경직되는 어깨와 넓어졌다 좁아지는 등을 보았다. 그렇게 신의 어깨 너머로 이야기를 배웠다. 


그리고 어느 날 신은 제리의 세상에서 빠져나갔다. 아니, 이걸 빠져나갔다고 써도 되나? 제리는 그자가 앉았던 책상 앞의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빠져나간다는 건 누군가 붙잡는 것을 내팽겨치고 무사히 떠나간다는 뜻이다. 제리에게는 붙잡을 틈조차 없었다. 그자는 그저 오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신이라는 걸 몰라서. 그렇게 제리는 신이 돌아오지 않는 세상에 남겨진 것이다. 


신은 자신이 만든 것에 큰 관심이 없어요. 뫼르소가 말했다.


만든 것이 괴물이라면 책임을 질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빅터가 말했다.


“알게 해 주면 되지.”
제리가 문을 열며 말했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제 글을 읽어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드디어 당신들 과 인사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우선 이 자리를 빌려 나에게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려준 그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어요. 당신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그 캄캄한 집에 갇혀 종이 더미 사이에 파묻혀 있었겠죠. 나에게 이야기를 가르쳐 주어서 고마워요. 진심이에요. 참, 그리고 백지 앞에서 답답해 한숨만 쉬고 있는 미래의 창조자들에게. 당신의 글이 읽히지 않을지라도 그 펜 끝에서 하나의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당신이 쓰고 싶지 않더라도 책임을 져야 해요. 쓰는 순간 존재하거든요. 분명히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도 너무나도 힘들어서 멈추고 싶다면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쓰다 만 소설은 불태울 것. 


춥지만 외롭지 않은 집에서,

제리 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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