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km가 깨지다

2025.07.20

by 여전히

어제 포기한 17km를 걸어야 한다. 사진과 같은 풍경이 17km 내내 지속되었다. 예상과 다르게 지루하단 느낌은 없었다. 일단 해가 뜨기 전에는 주위가 보이지 않았다. 어떤 길을 걸어도 어둠 속이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그렇게 두 시간쯤 걷자 해가 떴다. 벌써 8km는 지나온 것이다. 9km쯤이야 금방이다. 마침 바람이 세차게 불어 나를 밀어주었다. 어제 땡볕에 걸었을 생각을 하니 아찔해지면서 바람에 감사하다.

이 길에는 400km 남았다는 비석이 있다. 남아있는 거리의 앞자리가 달라질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내가 이만큼이나 걸어왔나 싶다가도 아직도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부담감이 밀려온다. 400은 의미가 좀 다르게 다가왔다. 반은 걸었다는 뜻이니까. 요즘 꿈에 얼굴 없는 순례자가 자주 나타난다. 그들은 대부분 중도 포기 후 집으로 간다며 나에게 인사를 하곤 떠난다. 그들이 부러워 따라나서고 싶다가도 내가 여기를 어떻게 왔는지 되새기며 참다 꿈에서 깬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많이 지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400이란 숫자가 더 반가웠다. 반이나 걸어왔으니까 남은 반도 지금처럼만 걸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다시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제자리걸음같지만 나아가고 있는 발걸음이 모여 결국 산티아고까지 완주할 것이다.


<오늘의 기록>

이동 도시 carrion de los condes 5:02 -> 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11:47

거리 27.8km ( 공식 26.4km)

걸음 43.661

내일도 부엔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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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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